# 506
귀환 마교관
506화
능운파는 쥐죽은 듯 고요해진 장내를 훑어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네. 물론 ‘정도맹’이라는 공식 명칭은 본단이 유지해야겠지. 하나, 그 임무에 있어서는 둘로 나누는 게 좋다고 생각했네.”
“임무를 나눈다 하심은….”
“사비강 관주가 말했다시피… 아니, 이젠 ‘궁주’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무튼 멸마궁은 앞으로 마족들을 상대로 싸우게 되겠지. 하나, 마족에 대해 잘 모르는 본맹으로서는 직접 마족과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강호를 평정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네.”
“강호를 평정한다는 말씀은… 혹시 변절자들을 염두에 두신 겁니까?”
군사의 질문에 능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현재 강호 곳곳에서 마족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들었다. 어딜 가나 쓰레기들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좌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지.”
맹주의 말투가 자못 거칠었지만, 구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맹주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정도맹의 이원화도 좋은 방법이 될 듯합니다.”
“저 역시 맹주님과 같은 뜻입니다. 앞으로 멸마궁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본맹은 본맹이 해나가야 할 일을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족에게 붙어먹는 놈들이 벌써 나오고 있다는 소문은 저 역시 들었습니다. 그런 놈들은 반드시 응징해야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내가 조금 잠잠해지자 능운파가 사비강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떤가? 자네는 마족을, 나는 강호를 상대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군요.”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
“여기까지가 우리의 부탁이오.”
사비강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탁자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유자양과 당무열 그리고 혜현사태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사비강을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평생 무예만 갈고 닦아서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 순진한 것인지, 고도로 뻔뻔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호북에 장원을 하나 지어 달라니.
물론 공짜로 지어 달란 소리는 아니었다.
후일 사천에 복귀하고 나면 세 문파가 합심해서 비용을 모두 갚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차용증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국에서는 그저 종이쪼가리가 될 확률이 높았다.
막말로 전쟁이 끝났을 땐 세 문파 중 어느 한 곳도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
사비강이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했다.
“정도맹에 공식적으로 요청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미 이곳으로 오는 동안 공문을 보내 보았소. 하지만….”
세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제로 그들은 정도맹 본단으로 오면서 한 차례 서신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총군사 구윤은 그들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사천회가 머물기 위한 장원을 짓고 대응 체계를 갖춰 주게 된다면, 다른 곳에서 피해를 입은 문파들이 똑같은 요구를 해올 수도 있었다.
앞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후퇴하는 문파들마다 장원을 하나씩 지어 주게 된다면 돈이 남아나지 않으리라.
후일 갚는 건 둘째 문제다.
게다가 전쟁 기간에는 여기저기 막대한 자금이 지출된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무엇보다 맹주가 반대했다.
패잔병들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에게 관대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평소 온화한 인품이었던 맹주를 생각한다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경한 태도였다.
어쨌거나 졸지에 거처를 잃은 사천회가 찾은 사람은 바로 사비강이었다.
호북에 새로운 궁을 지을 정도로 자금력이 있는 데다 강호에는 그가 상상도 못할 부자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을 안내해 준 추량은 사비강의 눈치가 보여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침묵하던 사비강이 선뜻 말했다.
“뭐, 좋습니다. 그렇잖아도 그곳에 지금 제법 규모가 큰 장원을 짓는 중이니까.”
“그렇잖아도 들었소.”
유자양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혹시라도 그 장원을 준다는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하지만 사비강의 다음 말은 그를 다소 실망시켰다.
“예, 다만 사천회를 위한 장원은 아닙니다.”
“하면 무슨 장원이오?”
“멸마궁의 장원입니다.”
“멸마궁?”
유자양이 모른 척 묻자, 사비강이 웃으며 답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마족들을 섬멸할 때까지 여러분들이 멸마궁 산하 조직으로 남겠다면 그곳에 머무셔도 좋습니다.”
한 마디로 멸마궁 밑으로 들어오라는 뜻.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유자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사실 사비강이 장원 하나를 떡하니 지어 주긴 어려우리라 생각은 했다.
다만, 그가 호협으로 명성을 알리는데다 마족이라면 이를 간다고 하니, 일말의 기대를 하고 온 것이다.
게다가 당무열의 아들인 당이협이 사비강의 수하로 있다는 말도 들었기에 그 인맥의 힘을 믿어 본 것도 있었다.
한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아래로 받아 들이겠다?’
강호 사람들에게 ‘건곤신검’이라 추앙받는 유자양으로서는 내심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당무열만큼은 사비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지라 별 불만이 없었다.
“두 분만 찬성하신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당 가주, 진심이오?”
유자양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당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이협에게 사비강 관주님이 어떤 분인지 익히 들었습니다. 사비강 관주님이라면 당가의 운명을 맡길 수 있지요.”
유자양과 혜현사태는 물론, 추량도 내심 놀라서 당무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사천당가라면 강호에서 여전히 우러러 보는 대문파가 아니던가?
한데 이렇게도 선뜻 사비강의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물론, 그가 이렇게 순순히 나오는 것에는 그의 아들인 당이협의 지병을 낫게 해준 은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관계가 없는 유자양과 혜현사태는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혜현사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관주님의 제안이 나쁜 것은 아니나….”
“궁주요.”
혜현사태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관주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궁주요.”
“아, 그러십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비강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마족들을 단칼에 쓸어버리는 호협이라는 평가부터 시작해서, 도무지 성격을 알 수 없는 괴짜에다가 심지어 꼴통이라는 소문까지.
하지만 혜현사태는 그간 좋은 것만 받아들였다.
설마하니 만인의 추앙을 받는 존재가 그렇게 꼴통 같을 리야 없지 않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보니….
‘꼴통인가…?’
그녀의 이맛살이 접히면서 주름이 더욱 깊게 패였다.
“아무튼 사비강 궁주님의 제안도 나쁘진 않으나 우리 입장에서는 신중해야 할 문제입니다.”
“무엇이 그리 신중해야 할 문제요? 장원 하나를 지어 달라는 건 엿가락 하나 달라는 것처럼 가볍게 말씀하시던데?”
“그, 그거야 우리가 강요한 게 아니라 단순히 부탁을 드린 것으로 얼마든지 거절하면 그만인…!”
“나 역시 강요는 아니오. 제안일 뿐. 얼마든지 거절하면 그만이지.”
혜현사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요.”
“사태님…!”
유자양이 얼른 나서자 혜현사태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관주… 아니, 궁주께서 우리를 이끌 만한 능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군요.”
“어떻게?”
“나와 여기 계신 유 문주님을 동시에 상대해서 각각 백 초씩, 도합 이백 초를 버틴다면 아무 말 없이 따르지요.”
“받고 하나 더 해도 되겠소?”
“받고 하나 더?”
“세 분이 동시에 덤비시오.”
“셋이?”
유자양과 혜현사태는 물론 당무열도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만약 세 분이 날 동시에 상대해서 오십 합 이상을 버틴다면 멸마궁을 통째로 넘겨드리겠소. 그리고 내가 여러분의 명을 받겠소. 참고로 각각 오십 합이 아니라 총 오십 합만 버티면 되오.”
“허어!”
유자양이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리 구파일방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호를 대표하는 문파라고 자부했다.
구파일방 중 세 문파가 이곳에 모여 있다.
그럼에도 저런 오만한 도발이라니!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유자양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비강은 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단, 세 분이 버티지 못한다면 앞으로 내 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해 주시오. 단순히 산하 협력 조직이 아니라, 명백한 상명하복 관계가 되는 거요. 물론, 마족을 모두 물리친 후에는 그 관계를 끝내도록 하겠소.”
사비강의 눈이 빛났다.
만약 이들을 그렇게 굴복시켜서 입안의 혀처럼 굴릴 수만 있다면, 다른 강호 문파를 포섭하는 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유자양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좋소! 그 조건 받아들이지! 당 가주도 동의하시오?”
“음….”
당무열이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여 동참해 달란 뜻을 나타내자, 그가 결심을 굳힌 듯 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버텨 보지요.”
“흥! 버티는 건 우리가 아니라 사 관주가 될 지도 모를 일이지!”
유자양이 코웃음을 치더니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다들 뭐하시오? 나갑시다! 시원하게 한 판 붙어 봅시다!”
**
멸마궁의 임시 거처 연무장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어느새 소문이 퍼진 것인지 정도맹 본단에 있는 무인들 상당수가 모였다.
연무장 가장자리는 물론, 주변 전각의 지붕 위까지 올라가서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랴?”
“어허, 이 사람. 못 들었는가? 이번에 사비강 관주님이 멸마궁을 신설하신다잖은가?”
“그런데?”
“대충 듣기론 사비강 관주님과 저 장문인들이 한 판 붙어서 이긴 쪽이 멸마궁주가 된다는군. 듣기로는 저 세 분이 오십 합을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방식이라던데.”
“헐. 그게 정말인가? 그럼 보나마나 저 세 분이 이길 게 아닌가?”
“그러게 말일세. 아무리 사비강 관주님이 강해도 세 장문인을 한꺼번에 이기긴 무리겠지.”
“그야 당연한 소리지. 세 분이 합공을 해서 오십 합을 버티지 못하겠는가?”
“이번엔 사비강 관주님도 많이 무리하신 것 같단 말이야.”
여기저기 떠드는 사람들로 장내가 왁자했다.
연무장에 미리 나와 있던 유자양과 혜현사태는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비무는 이겨도 본전이 아닌가?
세 사람이 동시에 상대했음에도 오십 합을 버티지 못했다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일.
물론 그런 일이야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사실 이 소문은 사비강의 지시에 따라 추량이 퍼트린 것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만들어서 강호 전체에 소문이 퍼져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건 또 하나의 강호 세력을 모으는 수단이 될 것이기에.
준비를 마친 사비강이 연무장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사비강 관주님이시다!”
“와아아! 관주님 만세! 만세!”
그 엄청난 열기에 유자양과 혜현사태 그리고 당무열이 모두 놀란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비강 관주의 인지도가 이렇게 높단 말인가?’
사비강이 세 사람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포권을 취했다.
“그럼 세 분께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