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
귀환 마교관
504화
휘우우우웅!
싸늘한 바람이 들판을 지나 산기슭까지 불어왔다.
바람에는 혈향이 묻어 있었다.
이미 산기슭부터 저 멀리 들판이 펼쳐진 곳까지 수많은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인간의 시체도 있었고, 마물들의 시체도 여럿 보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싸움은 진행 중이었다.
자카르트 백작은 나뭇가지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전황을 살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깡마른 체구,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과 다리.
팔짱 안쪽으로는 기다란 은색 창이 사선으로 걸쳐져 있었다.
“일방적으로 밀고 있습니다.”
마족 기사 하나가 옆에 나타나면서 보고했다.
자카르트 백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던 그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고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건 뭔가?”
녹슨 쇠를 긁을 때나 들릴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족 기사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사내가 마물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면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녀석인데, 검은 갑옷을 입고 나타나서 놈들의 후퇴를 돕던 자들과 한패 같습니다.”
철혈단을 말한 것이었다.
자카르트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건…?’
분명 사내가 양 손목에 착용하고 있는 무구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카르텔의 수호구가 아닌가?’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바로 그 사내가 추량이었기에.
추량은 모든 무인들이 후퇴를 한 상황임에도 마물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부상자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자카르트 백작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정말이지 순수하게 웃겨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지 않는가?”
“저자의 멍청한 행동을 말씀하시는군요.”
마족 기사가 바로 알아듣고는 답했다.
자카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서 멀쩡한 자가 위험을 무릅쓰다니. 저런 효율성이 제로에 가까운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군. 하여튼 인간들이란 이해할 수가 없는 족속들이야.”
“그러니 인간이겠지요.”
“그렇겠지.”
자카르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팔을 풀었다.
그가 창을 쥐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럼, 내가 가보지.”
팟!
순간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하아아앗!”
촤아아악!
마나검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자, 허공을 가르며 덮쳐 오던 웨어울프가 그대로 상하반신이 양분되며 쓰러졌다.
“쿠아아악!”
“이 쓰레기 같은 녀석들! 죽어엇!”
푸우욱!
이번엔 사이클롭스의 복부 깊숙이 마나검이 박혔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등 뒤에서부터 드리워지더니,
슈우우우우욱!
“헛!”
쿠우우웅!
커다란 도끼가 그대로 마나방패를 내려찍는 것이 아닌가?
오우거였다.
만약 조금만 늦게 눈치 챘더라면 추량의 머리통은 지금쯤 절반으로 갈라져 적의 발아래 짓밟히고 있으리라.
“하아앗!”
추량이 다시 한 번 기합성을 터뜨리자 파기검이 발동하면서 마나 조각이 사이클롭스의 배를 찢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촤촤촤촤촤아악!
다음 순간 퍼져 나간 파편이 그대로 벌떼처럼 모여들면서 허공을 한 차례 회전하더니 등 뒤에서 도끼를 내려찍은 오우거에게 날아갔다.
푸푸푸푸푸푹!
“쿠어어어어억!”
오우거가 굵직한 비명을 내지르며 대목이 쓰러지듯 육중한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쿠우웅!
“훅, 훅, 훅…!”
추량이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몰아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수라장.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마물들은 거침없이 밀려들어 왔고, 미처 완전히 몸을 빼내지 못한 무인들은 적들에게 포위된 채 온몸이 난자당하면서 쓰러져 갔다.
청성파의 이름 난 장로들이나, 아미파에서 무공 실력이 남다른 비구니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마족 기사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검은 기운과 함께 목숨을 잃어 갔다.
마족이 작정하고 밀어닥치면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던가?
아마 이들의 싸움이 낯선 방식이기에 당황한 탓도 있으리라.
먼 옛날 어느 소왕국의 일만 군대가 말을 탄 무인 열 명을 처음 보고는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다는 말도 전해오지 않던가?
인간에게 낯설다는 건 그만큼 두려움을 안긴다.
물론, 이 마족들을 그저 말 탄 열 명의 무인들과 비교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게 사실이다.
특히 마족 기사들은 일수에 절정 고수도 죽여 버릴 정도다.
하지만 초절정 고수들조차도 그들을 당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건 역시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으리라.
‘한 명이라도 더 살리자!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
아직 힘이 있을 때 그래야만 했다.
강림지 전투에서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구윤은 그러한 심경으로 지원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던가?
타다닷!
잠시 호흡을 돌린 추량이 빠르게 달려가며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을 붕 가로지른 그가 마침 한 인간을 덮치려는 오크의 등짝에 마나검을 쑤셔 박았다.
푸우우욱!
“퀴이이이이익!”
오크가 멧돼지 소리를 터뜨리면서 몸을 뒤틀었다.
주변에서 오크와 고블린, 오우거가 동시에 몰려들었다.
“흐아압!”
또 한 번 기합성을 터뜨리자 파기검이 발동되면서 마나 파편이 오크의 몸을 찢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푸푸푸푸푸푸푹!
“퀴이익!”
“크르렁!”
“쿠아악!”
수 마리의 마물들이 그 자리에서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하지만 추량의 등 뒤에서 달려드는 리자드맨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크룩! 인간 죽어라!”
리자드맨이 검을 내려찍는 순간,
- 크르러렁!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반묘가 나타나더니 리자드맨의 허리를 덥썩 물어뜯는 것이 아닌가?
“크루우우욱! 크아악!”
허리가 뭉텅 뜯겨 나간 리자드맨이 몸을 비틀며 쓰러졌다.
한숨 돌린 추량이 반묘의 콧잔등을 한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다, 반묘. 우선 이 부상자부터 업어.”
한편 부상을 당했던 무인은 갑자기 백호 같은 짐승이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밀자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으허어억!”
추량이 얼른 다가가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이 녀석은 인간을 해하지 않으니.”
“당, 당신은 누구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난 맹의 본단에서 왔소. 사비강 관주님의 수제자, 추량이라고 하오. 이제 막 혹독한 폐.관.수.련에서 나온 길이오!”
“사, 사비강 관주님이라면… 그 멸마관주님 말씀하시는 거요?”
“그렇소. 내가 바로 그분의 수제자요. 그리고 이제 막 나 자신과의 싸움인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거고. 반묘가 당신을 무사히 데려다 줄 거요.”
말을 마친 추량은 다시 저만치 쓰러진 부상자를 발견하고는 달려갔다.
마침 부상자를 뜯어먹으려던 워타이거가 추량을 보고는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왔다.
하지만 그 녀석보다 추량의 마나검이 더 빨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검의 길이가 늘어나면서 녀석의 급소를 내지른 것이다.
쿠우웅!
허파가 뚫린 것인지 녀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반묘, 여기도!”
추량이 얼른 부상자를 부축해서 반묘의 등에 올렸다.
두 명의 부상자를 등에 업은 반묘가 한 차례 포효를 내지르더니 잽싸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그만 빠져나가야겠군.”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왔다.
더 늦기 전에 몸을 빼내야만 했다.
분명 아직도 어딘가에 부상자가 있겠지만 그들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는데,
팟!
눈앞에 거짓말처럼 누군가 나타났다.
깡마른 체구에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팔다리가 유난히 긴 마족.
바로 천부장 자카르트 백작이었다.
“블링크…인가?”
추량이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자카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블링크를 안단 말인가? 중원의 무인이? 아… 하긴, 카르텔의 수호구를 착용한 걸 보니 놀랄 일은 아니군.”
추량은 마른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 거릴 정도로 강렬한 마력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마주한 그 어떤 마물하고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카르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걸 내놔라. 네놈 따위가 착용하기엔 과분한 물건이다.”
“시, 시끄럽다.”
“그럼 잘라 버려야겠군.”
쉬이이이잇!
순간 검은 바람이 불었다.
추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 이대로 팔이 잘리는구나!’
마나검을 발현할 생각도, 마나방패를 펼칠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미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상대가 너무 빨랐다.
그런데,
쉬이이이잇!
따다다다다다다다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카르트가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이제 보니 매우 작고 검은 돌기가 자카르트를 사정없이 공격했고, 그는 은빛 창을 휘둘러 막아낸 것이었다.
‘조 소협이 왔구나!’
반색하며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문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카르트 백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카르트 백작은 여전히 차분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우리 물건을 네놈들이 다 가져갔구나.”
“흥! 강호에 이런 속담이 있지.”
조문탁의 말에 추량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소리쳤다.
“줍는 사람이 임자라는!”
쒸에에에엑!
“가소로운.”
자카르트 백작이 몸을 가볍게 뒤틀면서 마나검을 피했다.
다음 순간, 그가 은빛 창을 휘두르며 그대로 추량의 등을 내질러 갔다.
한데, 추량이 보법을 밟자 아슬아슬하게 창날을 피할 수 있었다.
자카르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피해…?’
그는 잠깐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르텔의 수호구를 착용하고 이런 식으로 검술을 펼친 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추량이 펼친 호조마나검법은 사비강이 만들어서 추량에게 전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몸은 폐관수련을 했다고!”
쉬이이이익, 쩌엉!
마지막 혼신의 일격을 가한 마나검과 은빛 창이 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성이 울렸다.
츠츠츠츠츠츳!
자카르트 백작이 뒤로 주룩 미끄러졌다.
바닥에 그의 발자국이 길게 남았다.
다음 순간,
“하앗!”
“이여업!”
촤촤촤촤촤촤촤아앙!
슁슁슁슁슁슁슁쉬잉!
추량과 조문탁이 동시에 기합성을 터뜨리자 깨져 나간 마나 파편과 검은 벌집의 돌기들이 일시에 자카르트 백작을 향해 날아갔다.
사실 추량은 마지막 일격에서 모든 힘을 쏟아 부었고, 조문탁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소모한 내공과 조금 전 사용했던 검은 벌집 공격으로 기력이 거의 바닥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후의 일격이 가능했던 것은 부상자를 데려다 주고 돌아온 반묘의 버프 효과 덕분이었다.
- 크르르렁!
포효 소리와 함께 나타난 반묘.
하지만 마나 파편과 검은 돌기들도 자카르트 백작의 몸에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뚜따다다다다다다당!
철판에 콩을 볶는 것과 같은 소리가 울리면서 마나 파편이 빛 알갱이처럼 깨져 나가고, 검은 돌기들은 불꽃을 마구 터뜨리며 튕겨 나갔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진 광경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이번 합공은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였다.
애초에 자카르트 백작은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터였다.
“반묘, 어서!”
추량과 조문탁이 얼른 등에 올라타자, 반묘가 한 차례 포효를 내지르고는 비호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내 준다더냐!”
순간 괴물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팟!
반묘가 달려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자카르트 백작이 번쩍하며 나타났다.
‘제길… 무리인가!’
추량이 이를 빠득 가는데,
쒸에에에에에에에엑!
강기를 머금은 화살 한 자루가 바람마저 찢어발기며 자카르트 백작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단리정이 쏜 화살이었다.
순간 자카르트 백작이 돌아서며 창을 앞세웠다.
쩌어엉!
촤츠츠츠츠츠츠츳!
- 크르르렁!
순간 반묘가 두 사람을 등에 태운 채 몸을 훌쩍 날렸다.
미끄러지는 자카르트 백작을 훌쩍 뛰어넘은 반묘가 쏜살같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