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
귀환 마교관
491화
상필지가 앞으로 나서자, 카시스가 피식 웃었다.
“감히 네놈 혼자 이 몸을 막아 보겠다는 거냐?”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을까?”
상필지가 탁한 목소리를 흘려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카시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인간이 무모하다는 것은 진즉 알았지만, 정말이지 멍청할 정도군. 후회하기 전에 기회를 주지. 누구든 더 나서도 좋다.”
“나 혼자로도 충분…”
“정 그렇다면 나도 나서 주지!”
갑자기 불쑥 들린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허공을 가르며 경신법을 펼쳐 날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천세명이었다.
그가 은기륭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불초 천 아무개가 관주님을 뵙습니다!”
“천 교관. 돌아왔구려.”
“상황이 시급한 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천세명이 휙 돌아서더니 검을 꺼내 들었다.
“네놈 마족들에게 인간의 존엄함을 가르쳐 주마!”
카시스가 실소를 머금었다.
“진정한 존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다음 순간,
“엇?”
“헛!”
상필지와 천세명이 헛바람을 삼키며 움찔거렸다.
놀랍게도 카시스의 몸이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지더니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 낯선 광경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간 거지?”
그 순간,
“앗! 뒤에요!”
뒤쪽에서 지켜보던 여영이 비명처럼 외쳤다.
동시에 상필지와 천세명이 휙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스까앙!
불꽃이 일어나면서 카시스가 뒤로 주룩 밀려났다.
놀랍게도 그는 두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른 것.
잠시 후,
쉬르르르르!
다시 카시스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날리며 사라졌다.
상필지와 천세명은 서로 등진 채 사방을 살피며 기감을 활짝 펼쳤다.
찰나,
“아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며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파밧!
마침 두 사람의 그림자 안에서 카시스가 회오리치듯 솟구쳐 올랐다.
따다다다당!
불꽃이 터지고 두 사람에게 강한 충격이 전달됐다.
한바탕 공방이 끝나자 카시스는 다시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는 계속해서 몸을 감쪽같이 숨겼다가 다시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서 불현 듯 튀어나오길 반복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그의 전용 출입문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쪽이오!”
스까앙!
“젠장! 또 사라졌군!”
“이익! 이번엔 여기!”
따앙!
상필지와 천세명은 연신 불쑥불쑥 튀어나오면서 공격하는 카시스를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검을 섞었을까?
마침내 카시스가 두 사람 앞에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시종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제법 버티는군. 하면, 이건 어떨까?”
그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흥을 돋우기 위한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다.
카시스가 양팔을 활짝 펼치고는 뭐라고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마계어를 중얼거렸기에 상필지와 천세명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마침내 웅얼거림이 멈췄을 때,
스스스스스스…!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림자가…!”
놀랍게도 카시스의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더니 뾰족하게 다듬어지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날카롭게 벼른 그림자가 그대로 두 사람을 향해 빠른 속도로 뻗어 왔다.
쒸쒸쒸이이잇!
놀랍게도 그림자는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건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다!’
상필지와 천세명이 화들짝 놀라 보법을 밟으며 검을 부렸다.
따다당!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검신에 부딪친 그림자가 뚝뚝 부러지면서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살다 살다 그림자와 싸우게 될 줄이야.
이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지만, 카시스를 가호하는 악신이 바로 ‘숨은 그림자’의 악신이었다.
쉬이이이잇! 쉬쉬이이이잇!
수십 갈래의 그림자가 쉴 새 없이 두 사람에게 쇄도했다.
따다다다다다다당!
언뜻 보기에 마치 두 사람이 허공에 칼질을 하며 검무를 추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버틸까?”
카시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이 섀도우 공격을 없앨 방법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그림자가 생기기도 힘들 만큼 강렬한 빛을 사방에서 쏘거나, 아예 완전한 어둠이 잠식해 버리거나.
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그런 공간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쉬이이이이이이잇!
한 줄기 검은 바람이 불어 닥쳤다.
다음 순간, 카시스는 물론 상필지와 천세명 모두가 칠흑처럼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먼발치의 나뭇가지 위에 앉은 올빼미 역시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
“역시 살아 있었군.”
커다란 구슬을 보던 바리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올빼미의 눈과 연결된 구슬을 통해 용천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단박에 흑귀를 알아보았다.
그날 절벽에서 추락하면서 흑귀를 확실히 죽이진 못했기에.
존야가 물었다.
“카시스 남작이 그를 제거할까요?”
“흐음. 알 수 없다.”
의외로 바리탄의 대답은 신중했다.
분명 그는 흑귀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마족에게 걸리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존야의 의문을 눈치 챈 것인지, 바리탄이 말을 이었다.
“카시스 남작과 저자의 수호 악신은 같은 계열에 같은 등급이다. 하지만 저자의 악신이 좀 더 강한 편이지.”
“하지만 인간의 몸에 빙의하지 않았습니까?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리탄이 빙그레 웃으며 존야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에 존야는 정말이지 의식을 잃을 정도로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너 역시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구나.”
“주군은 아니십니까?”
“물론 내게 인간은 하찮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진 않다. 가령 사비강 같은 인간은 나도 조심해야 할 상대지.”
바리탄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존야의 몸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인간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점.
그들은 바퀴벌레만큼이나 까다롭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라니우스를 보낸 것이다.
결과는 어느 쪽이어도 좋다.
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만약 저자가 카시스 남작을 이긴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계열이 같기 때문에 저자의 악신이 카시스의 악신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럼 악신의 등급이 올라갈 가능성이 높지.”
“그렇다면, 저자가 더 강해지겠군요.”
“그렇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백작 이상의 마족에게는 당해낼 수 없을 테니.”
“물론입니다.”
존야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바리탄이 창밖의 어둠으로 시선을 던지며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아라니우스 공작님을 마중 나가자꾸나.”
“마왕 폐하께는 사비강에 대해서 언제 알리실 건지요?”
“곧 때가 되면.”
바리탄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맴돌았다.
**
카시스는 당황했다.
이렇게 완벽한 어둠을 본 적이 없었기에.
어둠 속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크크크. 내게 딱 맞는 먹이다.
“뭐, 뭐냐? 웬 놈이냐!”
- 너를 삼킬 존재다.
카시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위기 의식을 느낀 그가 얼른 마법을 캐스팅했다.
“라이트!”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환한 빛이 맺히면서 주변의 어둠이 훅 물러갔다.
쏴아아아아아악!
어둠이 사라지고 나자 카시스는 원래 있던 관주전 안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상필지와 천세명 모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암흑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처음 어둠에 휩싸였을 때는 카시스가 저지른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지금 보니 카시스 역시 자신들만큼이나 당황하지 않는가?
그때 천세명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앗! 흑귀!”
은기륭을 포함한 무인들의 시선이 천세명의 눈길을 쫓았다.
그곳에는 사슬에 양손과 발목이 묶인 거적때기 사내가 퀭한 눈으로 카시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 그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또 다른 자가 있었으니….
‘저건 또 뭐야?’
아라니우스가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흑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인간 주제에 악신과 계약했다는 건가?
분명 ‘흑귀’라고 불린 저 사내에게서는 악신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을 가호하는 악신들에 비하면 한참 아래 급의 악신이었다.
하지만…
“카시스. 그대는 이제 빠지도록.”
“공작님! 저는 괜찮습니다!”
“저자는 경에게 벅찰 수 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저자에게도 악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보십시오. 악신에게 완전히 영혼을 장악당한 인간일 뿐입니다. 제게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저자를 제가 취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카시스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라니우스는 카시스가 무엇을 그리 욕심내는지 알고 있었다.
그를 가호하는 악신은 숨은 그림자의 악신.
하급 악신이다.
하지만 악신끼리 싸워서 다른 한쪽을 삼키게 된다면, 중급 악신 혹은 상급 악신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어떤 마족도 자신을 가호하는 악신이 상대에게 잡아먹히길 바라지 않으므로.
하지만 인간에게 깃든 악신이라면?
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은가?
그 악신과 공존하지 못해 영혼마저 파괴되어서 거적때기 하나 걸치고 서성거리는 인간이 아닌가?
물론, 흑귀가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였지만, 그 속사정까지는 그들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어차피 사비강이 오려면 하루 이상 걸리리라.
마냥 기다리기도 지루한데, 카시스가 저 인간에게서 악신을 빼앗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아라니우스에게는 소용도 없는 악신이다.
이미 그를 가호하는 악신이 모두 최상급인데다 더 이상 악신을 채울 수도 없다.
결국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하노라. 단, 실수 없이.”
“감사합니다, 공작님”
카시스는 전에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크르르…!”
흑귀와 카시스가 서로를 마주본 채 기를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카시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깃든 악신이라지만, 분명 자신을 가호하는 악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하지만 악신이 담긴 그릇이 형편없는 인간이다.
방심은 하지 않되 충분히 해볼 만은 했다.
타앗!
카시스가 순간 바닥을 차며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흑귀를 향해 날아갔다.
솨아아아아아!
카시스의 검과 바닥에서 솟아오른 그림자들이 흑귀에게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파앗!
순간 사방이 암흑으로 바뀌었다.
카시스의 검이 허공을 찔렀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얼른 다른 손을 뻗으며 준비했던 마법을 캐스팅했다.
“라이트!”
팟!
빛이 생기자 다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엇?”
카시스가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