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
귀환 마교관
474화
적무린의 얼굴이 아예 하얗게 질렸다.
서래향이 목청을 높였다.
“그날 말이야. 무린이 나와 관계를 가진 날! 그때 내 상태가 어땠는지, 내가 많이 괴로워했는지, 그리고… 그리고… 무린 넌 즐거웠는지! 전부 자세히 알고 싶어.”
“…….”
적무린은 입을 딱 벌린 채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한참이 지나서야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객잔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무인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숙덕거렸다.
“저건 겁간했단… 거지?”
“맙소사…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사파 무인들이 아무리 깨끗해졌다지만… 역시 본질은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러니까 지금 저 남자가 저 여자를 덮쳤다는 소리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괴로워하는 여자를 상대로 남자가 즐겼다니…!”
“도저히 못 봐주겠군. 내가 나서서 훈계라도 해야겠어!”
“아서, 지금 그렇잖아도 분위기가 흉흉하네. 큰 일 만들지 말자고.”
별의 별 소리가 다 나오고 있었다.
이제 적무린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가고 있었다.
“홍, 홍묘님. 목소리를 좀 낮추시는 게….”
“음? 내 목소리가 컸나?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뇨, 꽤 중요해 보입니다.”
당장 자신이 무기력한 여자를 겁간한 천하의 쓰레기가 될 순간이지 않은가!
하지만 서래향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봐. 그날 어땠어? 넌… 좋았어?”
“갑, 갑자기 왜 그게 궁금하신 건지….”
“그야 당연하잖아. 남녀가 몸을 섞었는데,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그리고 넌 어땠는지 알고 싶은 거지.”
이쯤 되자 몇몇 무인들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면서 아예 자리를 떠버리기도 했다.
결국 적무린이 긴 한숨을 지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날 홍묘님은….”
“나는…?”
서래향이 반짝이는 눈으로 적무린을 응시했다.
적무린은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백주대낮에 이런 곳에서 무엇을 말하란 건가?
갑자기 왜 그날의 일이 궁금해진 것일까?
확실히 오늘 서래향은 좀 이상했다.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와서 세혼폭멸고에 당했을 때에 대해서 자꾸만 물었다.
뭔가 마음이 심란한 것일까 싶어서 일부러 정도맹 외원에 있는 국수집으로 데려왔다.
이곳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국수집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집요하게 그날의 일을 묻는 거지?’
게다가 질문의 요지가 좀….
‘이상하잖아!’
누가 봐도 자신이 서래향을 겁간한 것 같지 않은가?
괴로운 여자와 즐기는 남자라니!
“뜸 그만 들이고 좀 말하지?”
서래향이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고할 때의 표정이다.
결국 적무린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답했다.
“홍묘님은… 홍묘님은… 많이…”
‘이런 젠장. 뭐라고 해야 하나? 발정이 난 상태였다고? 색기 충만했다고?’
적무린이 할 말을 찾지 못해 갈등하자, 서래향이 불쑥 내뱉었다.
“역시 괴로워했구나.”
“아닙니다! 홍묘님은 당시 무척 흥분하신 상태였습니다. 매우 열정적이셨고, 격렬하셨습니다. 저보다는 홍묘님이 더욱 주도적으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 물, 물론 저 역시 열심히… 최선을….”
‘이런 젠장!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적무린이 얼떨결에 대답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한편, 적무린을 힐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무인들은 이제 호기심 어린 눈이 되어서 다시 슬그머니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서래향이 물었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흥분한 상태였다고?”
“그, 그랬습니다. 아, 물론 그건 홍묘님의 의지라기보다는 세혼폭….”
“그 이야기는 됐어. 그냥 결과만 말해도 충분해.”
“아,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예?”
“그리고 어떻게 됐지? 아니, 넌 어땠지?”
“황홀… 했습니다.”
“…정말?”
적무린이 포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국수가 나왔고, 면이 불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적무린은 그날을 떠올리는 눈빛이 되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날 홍묘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셨습니다. 몸은 부드럽고… 매끈했으며… 신음은 달콤했습니다. 마지막 정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황홀했고 행복했습니다.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적무린이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가만히 회상에 젖었다.
서래향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랐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점소이가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면서 홍조를 띠고 묻는 게 아닌가?
“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요?”
“그래, 어서 더 말해 보시오.”
“그 다음은?”
“뭐 구체적일수록 좋소. 커험!”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사람들이 빙글 둘러싼 채 뜨거운 숨을 내쉬며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닌가?
“이, 이런 미친…!”
깜짝 놀란 적무린이 벌떡 일어났다.
반면 서래향은 주변의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나, 제대로 절정을 느꼈구나.”
“그, 그렇습니다. 아니! 그보다 홍묘님! 그만 가시죠! 이놈들! 썩 비키지 못할까!”
“됐어.”
“예?”
“아무렴 어때? 괜찮아.”
서래향의 가느다란 손이 흥분한 적무린의 손목을 잡았다.
적무린이 흠칫거리고 돌아보는데,
“흡!”
그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어느새 일어난 서래향이 새처럼 날아들어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댄 것이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향기롭다.
그래, 그때도 이랬었지…가 아니잖아! 지금!
얼른 정신을 차린 적무린이 주변을 의식하고는 물러나려는데,
와락!
서래향의 팔이 적무린의 목을 감았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적무린은 이내 서서히 눈을 감아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이어 갔다.
“우오오!”
무인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참 후 서래향이 살짝 물러나서는 말했다.
“이제 인생의 작은 행복을 찾으러 매일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 곁에는 더 큰 행복이 생겼으니까.”
“홍묘님…”
서래향이 싱긋 웃으면서 적무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더 큰 행복을 느끼러.”
그렇게 적무린이 이끌려가자 객잔에 남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매설란은 오늘도 정도맹 외원에 위치한 망루에 올라 먼발치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다행히 사비강이 무사하다는 소식은 받았다.
그리고 사비강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맹의 본단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접할 수 있었다.
멸마관을 나선 매설란은 곧장 무인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
당장 그 많은 사람들을 거둘 수 있는 곳은 정도맹 본단이 유일했기에.
그리고 이곳이라면 사비강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정도맹은 거의 비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는데, 다행히 감찰총국주가 된 섭청은 남아 있었다.
그는 감찰국을 맡게 되면서 비게 된 검영각의 건물을 내어 주면서 멸마관 무인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그날부터 매설란은 매일 같이 이곳 망루에 올라와 먼 곳을 바라보며 사비강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인지, 그에게 하루라도 빨리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
사비강이 너무 그리웠다.
매설란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아래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곧 망루 위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래향이었다.
“오늘도 여기 계셨군요.”
그녀가 건넨 말에 매설란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진전이 있다고 들었어요.”
오후 내내 정도맹에 잔류한 무인들 사이에서는 적무린과 서래향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서래향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남자들을 상대로는 강단이 있는 그녀였지만, 같은 여자로서 매설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어쩐지 낯부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총관님 덕분이랍니다.”
“제가요?”
매설란이 의외라는 듯 묻자, 서래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님이 부러웠어요. 저렇게 당당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제가 그랬다고요?”
“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거든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부러웠죠. 그리고 깨달았답니다. 결국 감정이라는 건 참고 숨기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라는 걸.”
매설란은 잠시 멍한 시선으로 서래향을 보았다.
자신이 정말 그랬던가?
오히려 그녀는 서래향에게서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다.
“참지 말고 표현하라는 말. 왠지 좋은 말이네요.”
“네. 오래 전 제가 힘들었던 건… 아마도 저답지 않게 사랑해서 그랬나 봐요.”
매설란은 먼 곳을 응시하는 서래향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석양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침 그녀가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는 것을 느끼고는 그 시선을 쫓는 순간, 매설란은 저도 모르게 환한 표정을 지었다.
저만치 먼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사연맹을 상징하는 깃발을 펄럭이며.
매설란이 서래향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내가 배웠어요.”
“얼른 가보세요.”
서래향이 화답하자, 매설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사비강을 만나면 아이처럼 안기리라.
참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리라.
그리웠노라고.
보고 싶었노라고.
눈물이 나면 마음껏 울어 버리리라.
그래, 오늘만큼은 응석을 부릴 지도 모른다.
그녀의 경공이 점점 빨라졌다.
**
저벅저벅.
소녀는 아성의 지하 계단을 따라 한참이나 내려갔다.
눅눅한 바닥까지 다다른 그녀는 통로를 따라 계속해서 이동했다.
마침내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어서 열었다.
어두침침한 실내.
안쪽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실내는 굉장히 기묘한 분위기였는데, 사방이 마치 생물처럼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마치 건물의 방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의 몸속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게다가 꿈틀거리는 벽 속으로는 혈관처럼 생긴 검붉은 줄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이따금씩 붉은 빛이 그 줄기를 따라 지나가면 방이 조금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곤 했다.
마치 벽속의 혈관을 타고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또 하나 특징이 있다면 실내에서 굉장히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벽과 천장, 바닥 등에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는 액체에서 나는 냄새였다.
이 모든 것들이 무척 생소할 만도 하지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실내 복판으로 들어가니 천장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대한 기둥이 보였다.
그 기둥 역시 마치 생물의 일부인 것처럼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붉은 빛을 뿜었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기이한 심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녀가 그 앞에 서서 기둥을 물끄러미 보는데, 마침 등 뒤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리탄 후작님이시군요.”
“오랜만이군.”
소녀가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 뒤에 나타난 자는 붉은색 로브를 어깨에 두르고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하지만 후드 안쪽 어두운 공간에서 유독 그의 두 눈동자만은 노란 색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삼백여 년만이군요.”
그가 후드를 벗자 그야말로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얼굴이 드러났다.
피부는 파충류처럼 두껍고 거칠었는데, 콩알만 한 흰색 돌기가 얼굴을 가득 덮고 있었다.
하지만 바리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여전하군, 아들러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