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
귀환 마교관
472화
“저, 저건…?”
정사연맹의 무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 위에 떠 있는 배들을 보았다.
이자준은 안력을 돋우어서 가장 큰 배의 갑판에 선 남자를 확인했다.
다음 순간, 그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총, 총군사님이시다! 총군사님이 지원병을 이끌고 오셨다!”
“우아아아아아아!”
“총군사님 만세! 구윤 군사님 만세!”
무인들이 저마다 부둥켜안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강 위에 도열한 배가 불을 뿜어냈다.
쾅! 콰콰콰콰콰콰쾅!
쑤우우우우우우웅!
이번엔 커다란 포탄이 하늘을 가르면서 마물들의 복판에 마구 떨어지며 터져 나갔다.
꽝! 꽈과과과과과과앙!
언덕 경사면으로 날아가 터진 포탄은 마물들을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산산조각 내버렸다.
“퀴에에엑!”
“크아아악!”
연신 마물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고막을 내찔렀다.
녀석들의 비명이 높아질 때마다 겨우 살아남은 삼백여 명의 함성은 드높아져만 갔다.
**
갑판에 오른 구윤은 언덕배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마물들을 보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체계적이구나.”
“마치 인간의 군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비령이 말하자, 구윤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들이 의사소통까지 한다는 걸 안다면, 더욱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어쨌거나 그는 너무 늦지 않게 온 것을 천운이라 여기면서 하늘에 감사했다.
또 한편으로는 좀 더 일찍 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신의 무능을 탓했다.
생존자들의 환호성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리라.
아니, 어쩌면 기다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절망하면서 죽어 갔으리라.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강가로 갑시다.”
그의 말에 옆에선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강변으로 간다!”
“존명!”
이구동성으로 외친 무인들이 일제히 전투 태세를 갖추고는 곧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구윤이 탄 배가 강변으로 향하자, 다른 배들도 일제히 강변으로 다가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다른 배에 있던 무인 한 명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허공답보를 펼치며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곧 그 뒤를 이어 그 배에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수상비를 펼치면서 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윤 곁에 있던 사내도 질 수 없다는 듯 갑판에서 뛰어내리고는 수상비를 펼치며 달려갔다.
“저 흉측한 것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라!”
“존명!”
**
맹주 능운파는 가장 먼저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다시피 달려오는 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자는 분명 곤륜파의 문주, 청허진인(淸虛眞人)이 아닌가?”
한때 구파일방 중에서도 가장 큰 권세를 지녀서 강호를 호령했던 곤륜파였다.
물론 지금이야 구파일방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곤륜파만큼은 예외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워낙 새외 세력에 속하다 보니 정도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권외로 물러난 경우였다.
한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니, 어쩌면 이런 곳이니 다시 보게 된 것이리라.
기련산이라면 곤륜산이 있는 청해도에서도 무척 가깝지 않은가?
과연 청허진인은 곤륜의 자랑인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을 능숙하게 펼치면서 한 달음에 뭍에 다다랐다.
그의 경공술은 생존자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되었고, 또 한편 희망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청허진인은 곤륜파의 장문인답게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어딘지 서역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무척 급박한 와중에도 그는 능운파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곤륜 지역의 독특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 왔다.
“곤륜의 곽 아무개가 강호의 기둥을 뵙소이다.”
“부끄럽소. 곤륜의 주인을 이럴 때 뵙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영광이오.”
“허허, 맹주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시군요.”
껄껄 웃음을 터뜨린 청허진인이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일순간 검을 뻗었다.
쒸에에엑!
푸푸푹!
이기어검술로 빛살처럼 날아간 검이 이제 막 달려들던 오거 한 마리와 고블린 세 마리, 사이클롭스 한 마리를 연이어 제거했다.
쿵! 털썩! 풀썩! 쿠쿠웅!
육중한 덩치들이 연이어 쓰러지자,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무인들이 입을 딱 벌렸다.
청허진인은 되돌아오는 검을 보지도 않은 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꽤나 시끄러운 곳이군요.”
“과연 태청검(太淸劍). 명불허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자세한 인사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말을 마친 청허진인이 무서운 속도로 적들을 향해 질주했다.
마치 용이 구름 위를 노니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은 운룡대구식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의 경공이었다.
고블린의 머리를 마치 징검다리처럼 밟아 가며 날아간 청허진인은 사이클롭스나 오우거 같은 거인족들을 가차 없이 태청검법으로 찌르고 베어 갔다.
지쳐 가던 생존자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자 희망이 되었다.
잠시 후 수상비를 펼치며 달려온 또 다른 중년인이 능운파 앞에 다다라서 포권을 취했다.
“공동의 양 아무개가 맹주님을 뵙소이다.”
능운파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가 공동파(崆峒派)의 장문인 현진도장(玄震道長)임을 알아본 것이다.
“현진도장께서 이렇게 도와주시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본파가 정도맹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보아하니 사정이 급하여 자세한 인사는 후에 드리겠소이다.”
“고맙소!”
현진도장 역시 기합성을 터뜨리며 마물들에게 마주쳐 갔다.
그 역시 공동파의 자랑인 복마검(伏魔劍)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면서 마물들을 상대해 갔다.
‘복마검’이라는 이름답게 마물들은 그의 검법 앞에서 힘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난주에서 ‘태산북두’라고 불리는 난주황가(蘭州黃家)의 가주와 난주검문(蘭州劍門)의 문주가 도착했다.
그들 역시 능운파에게 간단한 인사를 던지고는 마물들에게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 나갔다.
이 모습을 본 혈사련 소속 무인들은 마음 깊이 감동하면서도 조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렇게 급박한 와중에도 인사부터 건네는 정도 문파의 방식이 못내 낯설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기를 구해 준 은인들이니 아무렴 어떤가?
단지 콧대가 높은 악천괴만이 툴툴거리듯 말할 뿐이었다.
“니미럴, 곧 죽어도 인사는 하고 죽을 귀인들일세. 앞에 마물들이 북적이는데 저런 거추장스러운 예를 차리고 싶을까?”
“그게 그들의 방식이고, 때론 그래서 그들이 강할 때도 있는 법이지.”
언제 다가온 것인지 사비강이 옆에 서서 말했다.
평소 같으면 그의 말에 토를 달거나 말 꼬리를 잡아 물고 늘어졌겠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동안 사비강이 보여준 무위는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나 다름없었기에.
감히 함부로 그에게 말을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아무튼 난 이해가 안 될 뿐.”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툭 뱉은 악천괴가 어디론가 훌쩍 달려갔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오우거의 머리를 단숨에 베르타스로 잘라냈다.
슈컥!
츄아아아아!
쿵!
순식간에 머리를 잃은 오우거가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무척 단순하고 가볍게 처리한 것 같았지만, 이런 일격 하나하나가 공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복용한 마나 포션 덕분에 버티고 있었지만, 사비강은 지원군이 나타난 이상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네 개 문파를 중심으로 지원군들이 상승무공을 펼치며 부딪치자, 머릿수로 밀어붙이던 마물들도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둥…! 둥…! 둥…! 둥…!
언덕 위에서 북소리가 울리자, 마물들이 아쉽다는 듯 후퇴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로서는 남은 삼백 명을 굳이 몰살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죽일 수 있었기에 행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생각보다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순순히 포기한 것이다.
처음이었다.
마물들이 습격을 시작한 후에 자진 후퇴를 하는 모습은.
때문에 생존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저놈들이 돌아간다!”
“이 개새끼들아! 우리가 그리 만만하게 죽어 줄 걸로 알았더냐!”
“다음에 만나면 이번에 당한 걸 두 배, 세 배로 갚아 줄 거다!”
“총군사님 만세!”
“사비강 관주님 만세!”
“곤륜파, 공동파 만세!”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생존자들은 그제야 울컥 치미는 설움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죽은 자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움이 만든 눈물이었다.
마침 작은 나룻배가 뭍에 다다르자, 구윤이 비령과 함께 뛰어내려 달려왔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그나저나 자네 덕분에 모두가 살 수 있었어. 큰일을 해주었어.”
맹주의 칭찬에 구윤이 얼굴을 붉히고는 손사래를 쳤다.
“당치도 않습니다. 만약 제가 좀 더 제대로 작전을 세웠더라면… 그랬더라면…!”
구윤이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질끈 씹었다.
능운파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우리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잖은가? 심지어 사비강 관주조차도.”
“아, 예…”
“정말이지 힘든 싸움이었네. 마지막 순간에는 나 역시 포기했었는데… 자네가 와 주었어.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구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소리쳤다.
능운파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어 보이고는 지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쉬고 싶군.”
“아, 령! 어서 맹주님을 쉴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드려라!”
“알겠습니다!”
비령이 재빨리 능운파를 부축하면서 나룻배에 태웠다.
그야말로 모든 기력을 쏟아낸 듯 능운파는 그 사이 몇 년은 늙어 보였다.
배를 타고 멀어져 가는 능운파를 보던 구윤이 다시 고개를 돌려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 저 미소.’
같은 남자가 보아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긴장도 완전히 풀어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사비강이 지척에 다다르자, 구윤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시오?”
“그냥… 모든 게 다 감사합니다! 이들을 지켜주시고, 끝까지 본맹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를 시켜 절 보호해 주신 것까지 모두…!”
흑귀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랬군. 그는… 죽었소?”
“죄송합니다! 수색조를 보냈으나 아직 소식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됐소.”
“예?”
구윤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은 그리 쉽게 죽을 놈이 아니오. 수색조를 보냈는데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 말은 시체도 못 찾았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특별한 놈이오. 분명 살아 있을 것이오.”
구윤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저런 강렬한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사비강은 흑귀가 악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지만, 구윤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저 자신의 판단을 믿는 확고한 신념으로.
그러다 보니 자신이 상대적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그랬어야 했다.
정사연맹의 무인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절망에 빠지기보다는 곧바로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움직인다면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사비강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우시오? 내가 뭐 실수했소?”
“아니, 아닙니다. 단지… 제가 조금만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
“…예?”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고 하지 마시오. 대신 저들을 보시오.”
사비강의 시선이 생존자들에게 향했다.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기쁨의 미소가 스며 있었다.
“당신 덕분에 산 거요. 당신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주었기에. 나도 구할 수 없었던 삼백여 명의 목숨을 구한 거요. 삼백의 목숨은 당신 생각보다 무겁소.”
“…….”
“희생당한 자들 하나하나 기억할 수는 없어도,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거요. 그게 책임져야 할 자가 지녀야 할 자세요. 희생자들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는 것.”
“사비강 관주님… 당신은 정말 모를 사람이군요.”
결국 구윤은 목 놓아 흐느끼고 말았다.
사비강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와 깨달음을 얻은 탓에.
한편 그런 그의 모습을 흘러가는 배 위에서 물끄러미 보는 자가 있었으니….
“군사가 우는군.”
맹주 능운파였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겁니다.”
비령이 나직이 답하자, 능운파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내게 괜찮은지 물었다. 그리고 사비강 관주에게는 감사하다고 말했지.’
물결 때문인지 수면에 비친 능운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게 이지러져 있었다.
“군사는 나를 걱정하고, 그에게는 의지하는구나.”
“…네?”
“아니다. 아무것도.”
능운파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참방.
비령이 저은 노가 수면에 비친 그의 얼굴을 깨트리며 천천히 강물을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