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437화 (437/670)

# 437

귀환 마교관

437화

초환당의 병실.

“그렇군요.”

사비강이 침중한 표정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는 한참동안 창밖을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하면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까?”

“흐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진백이 턱을 괴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의 시선은 침상에 얌전히 누워 있는 유정에게 향했다.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다만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야. 이 아이로서는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을 테지.”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

두 사람은 그러고도 한참동안 말없이 유정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비강이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아이가 부럽군요.”

진백이 사비강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자네도 가끔은 어깨에 짊어진 것들을 내려놓게. 잠깐 내려놓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네. 오히려 다시 들어 올릴 힘을 비축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짊어진 것들을 내려 두기만을 기다리는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한. 아마 내가 죽든, 놈들이 죽든. 둘 중 하나는 끝장을 봐야 끝날 싸움이지요.”

“그렇다면 부러워하지도 말게. 그것도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니.”

의외로 냉정하게 대꾸하는 진백을 보면서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이럴 땐 좀 매정하시군요.”

“어차피 내려놓지 못할 짐이라면, 짊어지지 않은 자들을 쳐다볼 것도 없지 않나?”

“그렇군요.”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유정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살려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안하이. 내 좀 더 심혈을 기울여서 그녀의 기억까지 온전하게….”

“진 당주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요. 진 당주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셨습니다. 사과는 단지 할 수 있는 것만 했던 녀석이 해야지요.”

사비강이 누굴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충분히 짐작한 진백이 쓴 웃음을 그리며 답했다.

“자 교관을 너무 미워하진 마시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교관으로서 용서가 안 되는 부분도 있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진백이 다시 쓴 웃음을 짓고는 병실을 나갔다.

사비강이 유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결국 도망치기로 했구나. 하지만 때로는 맞부딪쳐야 할 용기가 필요하기도 한 법이란다.”

**

사비강이 초환당을 막 벗어날 때였다.

마침 저만치서 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사비강 앞에 다다라서 숨을 몰아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운룡이었다.

그가 사비강의 양팔을 붙들고는 소리쳐 물었다.

“정아! 정아는 어떻게 되었소?”

“의식이 깨어났지만 지금은 다시 잠들었다.”

“다친 곳은….”

“아이는 무사해.”

“아…!”

자운룡이 몸을 가늘게 떨면서 흐느꼈다.

“고맙소. 고맙소! 혹시 지금 내가 만나 봐도 되겠소?”

“뭐, 그러던지.”

“그럼.”

자운룡이 심호흡을 하고는 초환당 안쪽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사비강이 잊은 게 기억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혹시라도 조심해.”

“무슨… 소리요?”

자운룡이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기억을 잃었거든.”

“기억을 잃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설마…!”

자운룡이 흠칫거리고는 얼른 다그치듯 물었다.

“설마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단 말이오?”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너는 그녀가 널 기억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그건…”

“뭐, 다행히 너에 대한 기억은 있다.”

“그럼 무슨…?”

“그녀는 끝까지 널 배려해 주는 모양이야. 네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것들을 모조리 잊어 버렸으니까. 나라면 너라는 인간 자체를 내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을 텐데.”

“내 과오에 대한 기억이….”

“네가 그 여자를 실험체로 넘겼던 것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기억에서 지워졌단 말이다. 덕분에 넌 편해졌지. 끝까지 그녀가 널 배려해 주었으니까.”

“그, 그게 사실이오?”

“내가 굳이 재미없는 장난을 칠 필요도 없지 않나?”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걸어가려는데, 다시 자운룡의 목소리가 발길을 잡아끌었다.

“잠깐. 하나만 묻겠소.”

“뭐지?”

“내가…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다시 물었다.

“뭘?”

“말 그대로요. 당신은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그녀는 그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기가 두려웠을 지도 모르오. 아니면, 내가 했던 일들을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그녀가 무의식중에 선택한 결과요. 한데….”

“한데?”

“내가 그 기억을 다시 깨워서 돌려줘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잊도록 한 다음 이제부터라도 그녀에게 잘해….”

짜악!

말을 잇던 자운룡의 뺨이 휙 돌아갔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사비강이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와락!

사비강이 자운룡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는 끝까지 비겁하군.”

“무슨 소릴! 나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무엇이 진정 그녀를 위한 것인지!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이미 그녀를 한 번 망친 경험이 있었다.

또 한 번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자운룡이 눈시울마저 붉히며 소리쳤다.

“내 선택에 따라 그 아이가 받을 상처가 또 생길 수…!”

“닥쳐. 그러니까 그걸 네가 결정하라는 거다. 열 번 고민해서 답을 찾지 못하면 백 번 고민하고, 그래도 안 되면 백만 번, 천만 번을 고민하란 말이다. 그조차 고민하지 않고 내게 답을 묻는 게 비겁하다는 거야.”

“……!”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군!”

자운룡이 멍하니 바라보자, 사비강이 더욱 쌀쌀맞은 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책임도 지지 못할 일을 저질러 놓고, 이제 또 다시 고민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그 여자의 사부라고 할 수 있냐?”

“그건…”

“이래서야 오히려 그녀가 널 가르치는 꼴이군.”

사비강이 던지듯이 멱살을 놔주자, 자운룡이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사비강이 차디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너 같은 놈을 왜 사부라며 따르는지 모르겠다.”

사비강이 휙 몸을 돌리다가 다시 멈칫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착각하지 마라. 네가 멸마관을 도왔다고 한들, 나는 너에게 조금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네가 아니라도 그 정도 쓰레기 녀석들은 충분히 쓸어 버릴 수 있었거든.”

이제야말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사비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자운룡은 멍하니 사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비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대체 뭔가? 저 당당함은… 한데… 빌어먹게도 반박할 수가 없군. 젠장….”

자운룡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처지가 비참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 상태로 억겁의 시간도 버틸 것만 같은 그때,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옥구슬이 구르듯 맑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움찔 거리고 돌아보니 유정이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운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아…!”

유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예요, 소소.”

그제야 자운룡은 상대가 유정이 아니라, 능소소라는 것을 깨닫고는 사죄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제가 착각을….”

능소소를 보니 이제 알겠다.

왜 그딴 멍청한 질문을 사비강에게 던졌던 것인지.

이 여자 때문이다.

적어도 이 여자는 자신의 사부인 사비강을 한 없이 존경하지 않았던가?

능소소는 자운룡의 착각을 개의치 않는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고는 초환당을 돌아보았다.

“여기에 그녀가 있는 거죠? 늘 말씀하시던 분. 저와 닮았다는 그분 말이에요.”

자운룡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네. 교관님 표정만 봐도 그분이 교관님께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운룡이 능소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간 속여서 죄송합니다.”

“사실…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지금은 상관하지 않아요. 전 그래도 사람의 선의를 믿으니까요.”

자운룡이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보면 볼수록 닮은 구석이 있었다.

“사랑합니다.”

“네?”

능소소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자운룡이 초환당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물론, 사부로서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요.”

“아, 네.”

“한데 능 조교님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그리고 능 조교님이 그토록 우러러보는 그 사람을 보면서 또 한 번 느꼈습니다. 저는 아직 누군가를 책임질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자운룡이 초환당 병실을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조금 보입니다. 제가 짊어진 짐이. 사실… 많이 부러웠습니다. 능 조교님이 존경한다는 그분. 그런데 이제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또한 비겁한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앞으로는 부러워 할 시간에… 더 깊이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능소소가 가만히 바라보자, 자운룡이 잠깐 당황한 듯 물었다.

“아, 제가 너무 수다스러웠나요?”

“아니에요. 방금 자 교관님에게서 제가 존경하는 그분의 모습이 살짝 보였답니다.”

능소소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

“누가 내 칭찬을 심하게 하는 모양이네. 귀가 간질간질한 걸 보니.”

사비강이 귀를 후비며 관주전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쉬르르륵!

불붙은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느닷없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콰자앙!

조금 전까지 사비강이 서 있던 자리가 움푹 꺼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타다다다당!

사비강이 얼른 베르타스를 휘둘러 막아내자,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칫! 잘도 피하시는군요!”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불붙은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쉬르르르르르륵!

사비강이 얼른 베르타스로 채찍을 쳐내고는 미간을 구겼다.

따앙!

“뭐하는 짓이냐? 날 암살하는 과제는 끝난 걸로 아는데.”

“과제 때문이 아니라고요! 말씀드렸다시피 가지지 못할 바에는 부숴 버릴 생각이에요! 물론, 아예 부술 생각은 없지만! 적당히 내 곁에 둘 수 있을 만큼 생명만 꺼 버릴 거예요.”

설서린의 뺨에 새겨진 문신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쉴 틈도 주지 않고 매섭게 몰아붙여 왔다.

휘르르륵! 쉬르르륵!

화끈한 열기가 관주전 안마당을 가득 메웠다.

“칫! 그러니 이제 얌전히 죽어 달라고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왜 말이 안 돼요? 아, 걱정 마세요. 시체는 썩지 않도록 잘 보관해 드릴 테니. 매일 안아 주고, 입 맞추고, 쓰다듬어 줄 거니까!”

“그게 핵심이 아니잖냐!”

따당! 촤르르륵! 따앙!

두 사람 사이에서 화려한 불놀이가 이어졌다.

어느 순간, 사비강이 설서린 코앞으로 불쑥 다가서자,

“어머, 이렇게 갑자기 들이대시면 소녀의 가슴이 마구 뛰어….”

사비강이 순간 설서린의 왼쪽 어깨를 툭 쳤다.

“어깨를 열고,”

탁!

이번엔 왼발로 그녀의 오른발을 툭 걷어차니, 절로 설서린의 자세가 달라졌다.

“오른발은 한 보 더 빼야 한다.”

탁탁.

“이렇게 두 곳의 혈도에 기를 집중하도록 하고. 느껴지느냐?”

“저야 언제나 온몸으로 서방님을 느끼고 있죠.”

“멍청한 소리 그만하고. 여기서는 균형을 잡아라.”

탁탁탁.

연이어 사비강이 설서린의 혈도 세 군데를 점하자, 그녀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사비강이 혀를 찼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넌 마칸의 꼬리를 제대로 다룰 수 없어.”

“아이참! 뭐냐고요! 지금 소녀의 진지함을 욕보이시는 건가요?”

“욕보이긴. 진짜 욕보이는 건 바로 이런 거지!”

말을 마친 사비강이 순간 바닥을 차더니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쉬이이이잇!

“헉!”

설서린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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