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424화 (424/670)

# 424

귀환 마교관

424화

“……!”

얼굴을 온통 하얗게 칠한 백면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봉인이… 깨졌군.’

백면인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금면인의 방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인가?”

금면인의 물음에 백면인이 대답했다.

“봉인이 깨졌습니다.”

“봉인이?”

금면인 역시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백면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정류광이 죽어서 그런 거라면…?”

“그래도 봉인은 깨진 걸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가 걸어 놓은 봉인은 깨졌습니다.”

“하면… 자면이 실패했단 말인가?”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였다.

수하 하나가 들어오더니 금면인에게 다급히 보고를 올렸다.

“자면과 혈살팔귀가 당했습니다.”

“……!”

금면인이 나직이 침음을 흘리며 그대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백면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비강이 존야에 대해 알았다면, 반드시 찾아 나설 겁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찾아오겠지.”

“그전에 수를 써야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이쪽에서 먼저 부딪치는 것도 방법일 테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직접 나설 것이네. 아, 그 아이도 쓰도록 하지.”

“아직 완전하진 않습니다만.”

“얼마나…?”

“팔 할입니다.”

“그 정도면 됐네.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어.”

“우선 보시겠습니까?”

“그러세.”

금면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촤아악! 촤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피와 살점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샤샤샤샷!

그림자가 분신을 이뤄 흩어지듯이 무리 속을 휘젓고 다녔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아악!”

“아아악!”

머리가 뎅겅 잘린 무인도 있었고, 팔다리가 잘려 나간 무인도 있었다.

상하반신이 완전히 분리되어 내장을 쏟아내며 바닥을 기어가는 무인도 있었다.

끔찍한 부상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무인들의 표정에는 고통보다 공포가 스며들었다.

“흐익…! 저, 저리가!”

“괴, 괴물…이다! 이건 진짜… 크악!”

부상당한 무인들이 엉거주춤 물러나며 부들부들 떨었다.

한데 그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예상과 달리 가냘픈 체형의 여인이었다.

만약 다른 누군가 보았더라면, 고개를 갸웃거렸으리라.

어딘지 홀린 듯 멍한 표정의 여인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킬 만큼 연약하고 청초해보였다.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욱 보호본능을 불러오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엉거주춤 물러나는 부상자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마침 여인의 뒤에서 용기를 낸 다섯 명의 무인들이 일갈을 터뜨리며 바닥을 찼다.

“죽어랏! 이 괴…!”

슈콰과과곽!

촤촤촤촤촤아앗!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여인의 등에서 거뭇한 줄기들이 어지럽게 뻗어 나간다 싶더니, 도약했던 다섯 명의 무인들은 갈가리 찢어진 인육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부상을 입은 무인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떨어댔다.

여인의 등에서 절지곤충처럼 자라난 촉수가 연신 꾸물거리며 흐느적거렸다.

마치 수십 장 길이의 지네가 여인의 몸에 기생하는 듯했다.

츠츠츠츠츳…!

절지곤충을 닮은 촉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여인의 등 속으로 완전히 파묻혔다.

때마침 부상자들의 시야에 저만치 공동의 위층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백면인이 보였다.

그들이 소리쳤다.

“단주님! 살려 주십시오! 단…!”

슈콰가가가가각!

하지만 그들의 절규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인의 몸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가닥의 절지 촉수가 그들의 몸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고슴도치 같은 모양이 되어 버린 무인들이 그대로 피를 뿜어 내며 쓰러졌다.

슈슈슈슈슉…!

다음 순간, 절지 촉수는 여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여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공동의 벽 중간쯤에 나타난 백면인과 금면인을 올려다보았다.

금면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에는 문제가 없나?”

“암시를 걸어 두었습니다. 다만… 아직 완전하진 않은 만큼 폭주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비강… 그놈을 확실히 죽일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하면 구멍을 한번 파보지요.”

금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깊게 파도록 하게.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깊고 깊게.”

**

관주전이 세워진 언덕의 정자.

“소울비드가 단순한 구슬이 아니라고?”

“그렇소.”

무랑의 물음에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지. 영혼을 가둬 두는 구슬이니….”

“그런 뜻이 아니오. 애초에 그건 구슬이 아니라는 뜻이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무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미간을 잔뜩 모았다.

사비강이 생각에 빠진 채 말을 이어 갔다.

“소울비드는 중원의 언어로 ‘흡혼충(吸魂蟲)’이라는 마계의 벌레가 모여 만든 군집이오.”

물론 그 이름 역시 사비강이 중원의 방식대로 지은 것이었다.

무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럼 한 마디로 그 구슬이 ‘벌레집’이라는 말인가?”

“그것들 자체로 벌레가 모인 덩어리요. 영혼을 흡수한 벌레들이 서로 뭉쳐서 화석이 된 게 바로 소울비드요. 얼음에 갇힌 물고기가 생명력을 일순 잃어버리듯이 영혼을 흡수한 흡혼충이 구슬로 굳어 버리면 그땐 생명체라고 할 수 없소.”

“하긴 그러니 일찌감치 차원을 이동했을 테지. 그런데 그게 문제될 건 무엇인가? 이미 소울비드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존야의 몸을 화신으로 삼았다면, 이젠 그저 쓸모없는 돌덩이 아닌가?”

“그게 그렇지 않소. 혼을 잃어버린 소울비드는 언제든 다시 혼을 채울 수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소. 이 소울비드를 인간의 몸에 박아 넣으면, 흡혼충이 생명력을 얻어 살아 움직일 수 있소.”

“가만. 그렇다면 그 소울비드를 인간의 몸에 이식할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소. 그땐 더 이상 구슬로 존재하지 않고, 수백 마리의 흡혼충으로 변해 인간의 몸에 녹아들어가 기생하게 되어 있소. 게다가 인간의 혼을 반쯤 흡수해서 숙주를 지배하려고 하지.”

“한 마디로 혼을 잃은 악마가 만들어진다는 건가?”

“그렇소. 녀석들은 인간의 신체까지 변형하지.”

“끔찍하군.”

“마계에서는 그걸 ‘키메라(Chimera)’라고 불렀소.”

“얼마나 강한가?”

“아마 내가 없다면 그 악마가 멸마관을 초토화할 수 있을 만큼.”

“그럼 걱정 없군.”

사비강이 눈매를 좁히고는 돌아보자, 무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멸마관에는 자네가 있으니까 말일세.”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오. 나는 이걸 잘 이용하면 뭔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요.”

“이젠 소울비드까지 욕심내는 건가?”

“안 될 건 없잖소?”

“아서, 나는 그런 흉측한 마물 따윈 관심도 없네.”

무랑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여미고는 물었다.

“정말이오? 뭐, 그렇다면 신수각으로 넘기….”

“거참, 신수각에서 그런 마물을 가지고 뭘 하겠나?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서.”

“하면 초환당에 넘겨서 약재로….”

“허참! 위험한 마물일지 모르니 내가 먼저 한 번 봐야겠네!”

“아직 구할 거란 말도 안했소. 뭐, 정 흡혼충을 구경해 보고 싶다면 생각을 좀 해보겠소.”

“허어! 그냥 정중히 부탁을 하면 어디 덧나는가?”

“그냥 관심이 많으니 구해 달라고 하면 어디 덧나오?”

무랑이 혀를 차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먼발치로 시선을 던졌다.

마침 저만치 아래쪽에 위검종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등부형과 자운룡이 좀 떨어진 곳에서 나란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요즘 꽤나 사이가 좋군.”

사비강이 무심히 던진 말에 무랑이 답했다.

“듣자 하니, 등 조교가 위검종 교관을 의심한다는군.”

“무슨 뜻이오?”

“위검종 교관이 어디론가 서신을 보내는 걸 봤다고 하네.”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서신을?”

“한데 등 조교의 말 뿐일세. 사실 위검종 교관이 무뚝뚝하긴 해도 생도들 사이에서는 꽤나 신망이 두텁기도 하고.”

“도사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등 조교가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게 아닌가 싶네.”

“사파에 대한 편견이라는 말이오?”

“그렇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나는…”

사비강이 저만치 걸어가는 세 사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의심하고 있었소.”

“뭐?”

무랑도사의 허연 눈썹이 모처럼 성큼 올라가면서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의심하고 있었다니? 오늘 내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말인가?”

“그렇소.”

“어째서?”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하오.”

사비강이 진중한 표정으로 무랑을 돌아보았다.

**

쉭쉭쉭!

파바박!

숲속을 가로지르며 날아든 비수들이 나무기둥에 나란히 박혔다.

타닷!

나무기둥을 발로 찬 복면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경신법을 펼치며 내달렸다.

그는 옆구리를 한 손으로 쥐고 있었는데, 벌건 핏물이 진득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면서 복면인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우당탕탕!

그대로 곤두박질친 그의 얼굴이 온통 상처 범벅이 되었다.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서 달렸다.

“노옴! 서라!”

“반드시 놈을 죽여라!”

“놓치면 안 된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복면인을 쫓고 있었다.

그들 모두 하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마기가 풀풀 휘날리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달리던 복면인이 더 이상은 달아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돌아섰다.

차앙!

그는 빠르게 적의 수를 셌다.

‘다섯, 열… 둘.’

모두 열두 명!

이 정도면 할 만하다.

필살기가 통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차라리 빠르게 이들을 처리하고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나으리라.

‘반드시 살아남아서 관주님께 보고하겠다!’

그가 의지를 가득 담은 눈으로 열두 명의 추격자를 노려보다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바닥을 차고 날았다.

“죽엿!”

“흐아앗!”

열세 명이 한꺼번에 부딪쳤다.

촤촤촤촤촤아앙!

단 한 줌의 공력만을 남기고 모두 쏟아 붓는 초식.

광폭천멸(狂暴天滅)!

복면인은 여기에 생의 모든 운을 걸었다.

격렬한 마찰이 일어난 후, 복면인은 포위망을 뚫고 튀어나와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척!

열두 명의 백의 마인들은 얼음처럼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츄아아아아아!

열두 명의 마인들이 피분수를 터뜨리면서 저마다 고목처럼 넘어갔다.

복면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피츗! 피츗! 츄아앗!

옆구리의 상처가 더욱 벌어졌고, 등과 어깨, 허벅지에 자상이 생겼다.

탁탁탁!

그는 재빨리 혈을 점해 지혈하고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운이 따랐는지 더 이상의 추격자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 줌 공력으로 마을까지 들어가 잠복한 다음 기력을 회복한다면 멸마관까지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그는 은밀하면서도 최대한 신속하게 그곳을 벗어났다.

그가 떠나고 잠시 후,

처척!

백면인과 금면인이 백의 마인들이 쓰러진 자리에 뚝 떨어져 내렸다.

복면인이 걸어간 방향을 보던 백면인이 나직이 읊조렸다.

“이만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금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구멍에 빠질 때까지 기다릴 일만 남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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