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
귀환 마교관
407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옹기승은 비에 젖은 봉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신이 흠뻑 젖었지만 그는 목석처럼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은 쉼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늘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지금은 봉분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투시를 해서 그 안에 누워 있는 옹해인을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실제로 그의 눈에는 옹해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옹해인이 자신을 향해 나무라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거기서 왜 비를 맞고 서 있느냐?
아직 날이 차다.
몸 상할라, 어서 들어가서 네 일에 집중해라.
환청인지, 언젠가 옹해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건지, 그저 상상인지 모를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옹해인은 늘 그렇게 자신을 따뜻하게 대했다.
마치 아버지처럼.
아니, 아버지보다 오히려 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다시 옹기승의 귀에 옹해인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흘러들었다.
“미련한 것아, 다가올 시간은 네 안에 채우고, 지나간 시간은 흘려보내 거라. 그게 살아갈 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니라.”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가득했다.
그렇게 꼬박 한 시진이나 흐르고 나서야 옹기승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흐르는 빗물에 모든 감정을 쏟아 부어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가 막 돌아서려는데, 언제 다가온 것인지 사비강이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관주님…”
“미안하다.”
옹기승이 흠칫 떨었다.
사비강이 이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기에.
그래서일까?
꾹꾹 억누르고 참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턱 끝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게 빗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또한 자신이 지나간 시간을 흘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죄송합니다.”
“그래, 그 한 번의 감정으로 족하다. 이제는 잊고 앞으로 나아갈 때지.”
옹기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사비강이 그 자리에 서서 옹기승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옹기승이 사라지고 나자, 사비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옹해인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멸마관 후원에 옹해인을 묻은 것은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옹해인의 장례를 지냈다면, 옹기승은 더욱 큰 상실감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리라.
차라리 이렇게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하는 것도 좌절감을 극복할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사비강은 옹해인을 기리는 비석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에 은은한 기운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생각 이상으로 신세를 졌소.”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사비강은 진심으로 옹해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베르타스와 격전을 치렀던 그 다음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 사비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운기를 하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아주 미약한 변화였지만, 사비강은 그 변화가 어쩐지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다시 한 번 내공을 일주천 해보았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내공의 질이 달라진 느낌이다.
아니다.
이건 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래, 결이 달라진 기분이다.
여태까지의 내공을 물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혈맥을 따라 순환하는 내공이 기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매끄럽지만, 어딘지 농도가 짙은.
물론 범인이라면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다.
하지만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비강은 그 근소한 차이가 매우 크게 다가왔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한데 그 다음날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내공을 일주천하자 음양의 기운이 마구 뒤섞이면서 혈맥을 따라 어지럽게 활보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베르타스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뭔가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렇다고 뭔가를 할 방법이 없었다.
사비강은 그날 이동을 멈추고 하루 종일 숲속에서 운기행공에만 집중했다.
놀랍게도 내공은 운기를 할 때마다 그 성질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비강의 몸도 그때그때 다른 증상을 나타냈는데, 어느 순간에는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도 했다.
그 변화가 어찌나 심한지 주변이 열기에 녹거나 서리가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지난 다음 날.
사비강은 비로소 완벽한 변화를 느꼈다.
‘껍질을 벗긴 기분이다.’
이 표현이 과연 어울리기나 할까?
하지만 다른 표현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환골탈태가 육체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면, 이번에는 내공이 완전히 다른 기운으로 탈바꿈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공을 일주천한 사비강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음양환유마나심법이 통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앞으로 마족과 맞서 싸워야 할 판에 내공을 마나로 치환할 수 없다면 한 쪽 팔을 잃고 맞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곧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심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게 됐구나!’
즉, 내공을 마나로 치환하지 않아도 곧바로 마법에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명 내공과 마나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는데!
하면, 이 기운으로 중원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사비강은 곧장 베르타스를 뽑아 들고 검강을 만들어내 보았다.
쑤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베르타스에서 자줏빛 기운이 솟아나왔다.
그 빛깔이 몹시 오묘했다.
어딘지 거뭇해 보이면서도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을 모두 품은 색이었다.
‘역시 된다!’
사비강은 희열에 차올랐다.
딱히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자신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며칠에 걸쳐서 일어난 변화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특이점이 있었다.
‘이걸… 몇 갑자라고 해야 하지?’
단전에 쌓인 내공이 달라지니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그 수치를 측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쉽게 말해 내공의 부피가 줄어든 대신, 질량은 늘어났다.
고효율의 기운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도 이전의 방식대로 굳이 따지자면 겨우 일 갑자가 될까?
하지만 같은 크기라도 흙구슬과 쇠구슬의 무게가 다른 것처럼, 일반적인 내공과 비유할 수는 없다.
파지지지짓!
쑤아아아앙!
사비강이 왼손에 라이트닝볼트를, 오른손에는 검강을 동시에 일으켜 보았다.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마나로 치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드니 훨씬 편했다.
“하하하하!”
그는 모처럼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멸마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바로 무랑이었다.
옹해인의 장례를 치른 후, 무랑은 사비강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자네… 진정 천해경에 도달했군.”
“천해경? 그게 뭐요?”
사비강의 질문에 무랑이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초절정이라고 보지. 물론, 초절정도 여러 단계로 나뉠 수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인간도 극히 드무니까 단계를 구분하는 것도 무색하지. 한데 그 단계를 모두 채우고 나면 도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천해경이라는 거군.”
“그렇다네. 지금은 잊힌 경지지. 다만 고대 영희제가 그 단계에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
“천해경이라… 그 다음에도 있소?”
“있지. 만해경(萬解境)이라는….”
“그 다음은?”
“만해경 다음은… 쩝. 그 다음은 꺼낼 필요도 없겠어.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경지니까.”
사비강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천해경에 오르고 나서 내공에 변화가 생겼소.”
사비강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무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런 거였군.”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물었다.
“무슨 뜻이오?”
“천해경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달라져서 다시 시작하게 된다고 하지. 내공도 갑자의 단위로 세는 것이 아닐세. 그때부터는 양이 아닌 질의 승부이기에 단위가 달라진다네.”
“그럼 어떤 단위로?”
“‘해량(解量)’이라고 부른다네. 자네는 지금 일 해량인 게야. 십 해량이 넘으면 ‘만해경’이라는 경지에 들어서게 되지.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랬군. 그래서…”
사비강이 손바닥을 보며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자신이 이루어낸 경지를 직접 듣게 되니 기분이 또 새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무랑은 천해경 이후의 경지가 따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 이후도.
어쩌면 그 다음도 존재할지 모른다.
그 말은 누군가는 그 단계에 다다른 적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역사에 남은 인물이 없을 뿐, 어느 누군가는 이루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무림의 고수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고 하니.
이를 달리 해석하면,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 역시 그 수준에 다다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마왕은 어느 정도일까?
천해경? 만해경? 그도 아니면…?
‘끝없이 강해지는 수밖엔 없다.’
긴 상념에서 깨어난 사비강은 비에 젖은 비석을 손바닥으로 한 차례 훑었다.
축축한 물기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그 의지… 이어 받겠소.”
가만히 중얼거린 사비강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
귀영단이 파악한 소환지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중원 각지에서 신고 되는 건수까지 합해지니 순식간에 수백 군데의 소환지가 등록되었다.
소환지 발견과 신고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사비강은 귀영단 인력의 절반을 마령교 본거지 수색에 투입했다.
만약 마령교가 테라포밍을 시도하고 있다면, 반드시 막아야 했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발견된 소환지 중에서 사비강이 처음 갔던 곳만큼 높은 등급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환지는 사비강이 내세운 기준에 따라 우선 일곱 단계로 나뉘었는데 최하, 하, 중하, 중, 중상, 상, 최상 순이었다.
상급 이상이 되면 멸마관에서 직접 나서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중상급까지만 보고되었다.
한편, 멸마관도 교육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생존 본능을 끌어올리고 다양한 전투 감각을 익히기 위해 진행되었던 무차별적인 비무는 이제 중단되었다.
대신 좀 더 체계적으로 소환지를 공략하기 위해서 생도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사비강이 마계에서 익힌 조직 구성을 그대로 적용했다.
첫째, 마물의 공격을 저지하거나 막으면서 버텨 주는 방어조다.
그 다음은 적에게 상처를 입힐 공격조다.
공격조는 다시 원거리와 근거리로 구분되었는데, 단리정이나 조문탁처럼 활이나 비수 등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자들이 원거리 공격조에 해당되었다.
마지막으로 치유조.
초환당 의생이거나 내공심법이 우수한 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부상자가 발생했을 시에 공력을 불어넣거나 응급처치를 전담했다.
사비강은 애초에 이런 기본 구성을 바탕으로 무랑에게 진법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세 부류의 무인들이 좀 더 유기적으로 호환될 수 있는 진법.
그리하여 창안된 것이 바로 무랑초환진(無浪超換陳)이었다.
무랑답지 않게 이례적으로 짧은 명칭이 붙은 이유는 전투 시에 그 긴 이름을 읊다간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진법은 사비강이 마계에서 단순히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공략이 가능했는데, 특히 중원인의 특성에 맞춰서 설계되다 보니 매우 유용했다.
사비강은 이 무랑초환진을 멸마관의 공식 진법으로 선정하고 중원 각지의 문파들에게 무랑초환진을 익히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자신들의 독문진법과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문파들은 이 진법을 굳이 새로 익힐 생각이 없었다.
천도문(天刀門)도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콰과과과앙!
소환지 출입구에서 뿌연 먼지가 훅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먼지구름을 뚫고 저벅저벅 나오는 사람들.
하나 같이 도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천도문 무인들이었다.
“하하하! 이번에도 제대로 건졌군요! 이런 식이면 중원 제일 문파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호탕하게 소리치자, 죽립을 눌러 쓴 노인이 피식 웃었다.
“아직이다. 곧바로 치옹산(峙翁山)으로 간다.”
“하지만 그곳은 최근에 소환지 등급이 중상급에서 상급으로 상향 조정되었다고 합니다. 일차로 마물 사냥에 나선 자들이 귀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관없다. 본문이 가면 해결될 일.”
“귀영단 녀석들이 순순히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겁니다.”
“그들도 우리 업적을 무시하진 못할 거다. 우선 가보자.”
말을 마친 노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