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
귀환 마교관
391화
스르르르.
호수면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형상은 이내 한 사람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는 바로 무랑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할 만도 했지만, 노인은 전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자네는 언제나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군.”
그러자 무랑이 대답했다.
“허허,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청해자.”
만약 이 자리에 다른 무인이 있었더라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리라.
청해자.
방금 무랑은 노인을 가리켜 분명 ‘청해자’라고 불렀다.
청해자의 본명은 옹해인.
그는 옹기승을 거둔 이후에 병을 얻어 죽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청해자 옹해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그런 모습은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도량이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닐는지.”
무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지만, 그 뜻에는 어딘지 가시가 돋혀 있었다.
사실 무랑은 옹해인과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했지만, 내심 서로를 경쟁 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남모를 기 싸움이 은근하게 진행 중이었다.
무랑이 조금 서운한 투로 말했다.
“자네 제자가 내 제자를 그럴싸하게 속였더군.”
무랑의 제자인 정류광은 옹해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제자의 이야기를 들은 무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렇게 옹해인이 버젓이 살아있으니, 결국 정류광은 옹기승의 거짓 장례에 속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옹해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건 자네 제자의 도량이 부족한 것 아니겠나?”
“뭐, 부정하진 않겠네. 한참 모자란 녀석이니.”
“그나저나 이걸 어쩌누? 내가 꽤나 중요한 사람을 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기우제까지 지낸 걸 보면 말일세.”
“사정이 있었네. 한데 자네도 사정이 꽤나 복잡한가 보군. 죽은 척하며 지내는 걸 보면.”
“뭐, 사정이랄 것까지야 있겠나? 그저 세상일이 피곤해서 그렇지.”
“마령혼 때문이면 신경 쓸 것도 없네. 이제 그 아이보다 더한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옹기승을 두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옹해인이 죽은 척을 하며 은거해서 지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마령혼이 깃든 옹기승을 세상에 내놓으면 응당 주변이 시끄러워질 것이었기에.
옹해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녀석이 지금 자네와 함께 있나 보군.”
“그렇네. 이곳은 멸마관일세. 그 아이는 지금 이곳의 조교로 일하는 중이지.”
“멸마관이라… 과연 자네도 천문을 읽었나보군.”
옹해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자네답지 않군. 그런 일에는 나서지 않는 성격인줄 알았는데. 멸마관까지 세울 줄이야.”
무랑이 피식 웃었다.
“멸마관은 내가 세운 게 아닐세.”
“하면?”
“이곳 멸마관주는 ‘사비강’이라는 자일세.”
“사비강이라… 그자가 누군가?”
“바로 자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일세.”
그제야 옹해인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랬어.”
“지금쯤 자네도 짐작했겠지만, 그자는 보통사람이 아닐세.”
“그런 것 같더군.”
“조만간 사람이 찾아갈 걸세. 그들에게 사비강 관주를 잘 인도해 주길 바라네.”
“허허, 어찌 그리 열심인가?”
옹해인의 질문에 무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글쎄… 그냥 이런 세상이라도 한 번 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 누군가의 열정을 지켜보다 보니.”
“그렇군. 자네도 꽤나 감상적이군.”
“이제 알았는가?”
“진작 알았지.”
“실없기는.”
“다만…”
“이번엔 또 뭔가?”
무랑이 미간을 슬쩍 좁히며 묻자, 옹해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찾아올 자들에게 사비강 관주를 넘기긴 어렵겠는 걸?”
“어째서인가?”
“사비강 그자의 몸에 깃든 건 마령혼과 질적으로 다르네. 게다가 그가 가진 검에서 뿜어지는 강맹한 기운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지경일세. 그런 기운은 생전 처음 겪었네. 그리고 그 기운을 받아내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
“대체 지금 어떤 상태지?”
옹해인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도 짐작하기 어렵네. 다만, 자네도 알겠지만, 그가 가진 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마기를 지녔다네. 평범한 무인이라면 그 검을 잡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렸을 테지. 한데 지금은 그 검에 또 다른 강맹한 기운이 깃들었어. 나는 정말이지 그가 그런 검을 들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하네. 그는 검에서 뿜어지는 온갖 사악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중이야. 한 마디로 무의식 중에 싸우는 것이지. 그런 자는 처음 보았네.”
실제로 옹해인의 우려는 사실이었다.
현재 강맹한 요기를 품어 버린 베르타스는 사비강의 몸에 깃든 드래곤의 기운마저 흔들어 폭주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초인적인 힘을 한 사람의 몸으로 고스란히 감내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옹해인의 말이 조곤조곤 이어졌다.
“그 엄청난 기운을 억누르고 멀쩡하게 깨어나게 만들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족히 삼 년은 걸릴 걸세.”
이번엔 무랑이 놀라서 물었다.
“삼 년씩이나?”
“만약 그 전에 그들이 굳이 데려가겠다고 하면…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폭주할 걸세. 내 장담하지.”
“끄음…”
“하니 그들에게 최대한 천천히 오라고 하게. 일찍 도착해 봐야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터이니.”
무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잇더니, 옹해인을 보고 대답했다.
“알겠네. 우선은 그들을 내치지는 말게. 그 사이 내가 대책을 생각해 보지.”
“그럼세.”
옹해인의 말을 끝으로 얼굴 모양으로 솟아올랐던 물기둥이 스르르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그때 낚싯대가 슬쩍 흔들렸다.
순간 옹해인이 낚싯대를 들어 올리자, 물고기 한 마리가 파닥거리며 날아들었다.
**
사비강은 숲속 한가운데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크르르. 크르르.”
그의 전신에서 시뻘건 기운이 불길처럼 넘실거렸다.
구오오오오…!
사비강이 천천히 베르타스를 들어 올리자, 강렬한 기운이 운집하면서 묘한 공명을 울려댔다.
그리고 그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려는 순간,
털썩!
사비강은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비강이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신음을 흘리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자아가 온전하지 않은 그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이상하게도 일정 수준 이상의 기운을 남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랬다.
사실 이곳은 옹해인이 직접 만든 진법이 펼쳐져 있었는데, 적정 수준 이상의 기운을 품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이상의 기운을 품게 되면, 그 즉시 정신을 잃고 마는 환경이었다.
“크으…!”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직이 으르렁거린 사비강이 다시 기운을 베르타스에 집중했다.
고오오오…!
다음 순간,
쒸잉! 쒸쒸쒸쒸쒸잉!
수십 가닥의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다.
쿠쿠쿠쿠쿠쿠…궁!
토막 난 나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희뿌옇게 솟아오르는 먼지구름 사이에 사비강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가까스로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찾아낸 것이다.
**
해가 저물 무렵, 묵양제가 올라탄 마차는 무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다다랐다.
창밖을 바라본 묵양제는 내심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과연 넓구나.”
그는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북적북적한 도시 전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취하는 것만 남았다.’
우선은 곧장 신월문으로 가서 멸마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멸마관을 찾아가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
마음을 다잡은 묵양제가 창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워어! 워!”
마부가 갑자기 마차를 멈춰 세우는 바람에 묵양제가 얼른 중심을 잡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뒹굴었겠지만, 그는 민첩하게 균형을 잡고는 문을 열고 내렸다.
“무슨 일이냐?”
그의 외침에 마부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저 영감이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묵양제가 고개를 돌려보니 죽립을 덮어 쓴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으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맹인인가?’
노인이 엉뚱한 방향으로 굽실거리며 사죄했다.
“어이쿠,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뭐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원….”
묵양제가 혀를 차고는 시선을 돌렸다.
노인의 몸에서는 악취가 풍겼는데, 제법 멀리 떨어진 묵양제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영감! 빨리 비키시오!”
“예, 예! 갑니다, 갑니다.”
노인이 서둘러 대답을 했지만, 걷는 방향은 줄곧 길 복판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돌부리에 발이 걸리면서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저런!”
묵양제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고는 얼른 달려가 노인을 부축해 주었다.
‘크으! 지독한 냄새구나.’
정말이지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독한 악취였다.
아주 잠깐 묵양제는 자신이 왜 이렇게 노인을 신경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일면식도 없는 노인이 쓰러지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오히려 빨리 길을 비키지 않는다고 호통을 쳤으리라.
어쨌거나 그는 노인을 부축해서 길가로 안전하게 옮겨 주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다른 무인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역시 묵 당주님은 의로운 분이시구나.”
“저런 늙은이에게도 친절하시다니.”
“과연 훌륭한 분이시다.”
수하들의 술렁임을 들으며 묵양제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 노인에게 말했다.
“어르신,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예, 예. 감사합니다.”
묵양제는 앞이 보이지도 않는 노인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마차로 돌아갔다.
잠시 후, 마차가 출발하자 묵양제는 돌연 불쾌한 생각이 치밀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왜 저딴 노인에게 불필요한 친절을….’
뒤늦게 참았던 구토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얼른 창문을 열어젖히자 시원한 밤공기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번쩍이는 번화가의 불빛을 보니 그나마 속이 좀 진정되는 듯했다.
뭐, 그래도 그 덕에 수하들의 선망어린 시선을 받았으니 손해 본 건 아닐 지도.
마음을 다스린 묵양제가 마부석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체 말고 신월문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마부가 대답과 함께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한편 묵양제의 마차가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을 죽립의 노인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지팡이로 땅을 더듬던 노인이었는데, 그는 검지로 죽립을 밀어 올리고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옹해인은 입을 척 벌린 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집 뒷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더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무를 몇 그루나 베어 버린 거지?”
그야말로 장작으로 언덕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숲으로 채워져 있던 집 뒷마당이 엄청나게 넓어졌다.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옹해인이 옆에서 음침하게 서 있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일단은 수고했네. 이제 가서 저녁거리를 해오게. 그래, 물고기나 좀 잡아 오면 좋겠군.”
“크으…”
마치 명령을 받는 것에 대한 불만이라도 있는 듯 사비강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옹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뭐하는가? 배고프지 않나?”
그 말에 사비강이 몸을 휙 돌리고는 호숫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옹해인이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파직! 파지지지직!
호숫가에 선 사비강의 손에서 강렬한 뇌류가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헉! 잠까안!”
옹해인이 얼른 소리치며 달려갔다.
호수에 벼락 한 줄기를 내다 꽂으려던 사비강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옹해인이 한숨을 내쉬며 호통을 쳤다.
“대체 뭐하는 건가? 이곳 생태계를 아예 파괴할 작정인가?”
만약 그대로 두었다면 호수의 물고기들은 물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감전되어 씨가 말라 버렸으리라.
하지만 사비강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음침한 표정으로 옹해인을 노려보기만 했다.
옹해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네. 됐어. 물고기는 내가 잡도록 하지. 자네는 가서 불이나 지피게.”
“크으…”
“뭐하는가? 어서 가지 않고.”
이번에도 사비강은 한참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짓더니 휙 몸을 돌렸다.
옹해인이 혀를 끌끌 차고는 호숫가로 다가갔다.
그가 낚싯대를 드리우려고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 뒷마당에서 불기둥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옹해인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불기둥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일을 시키지 말라는 반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