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
귀환 마교관
387화
회면인은 흔들리는 나뭇가지 꼭대기에 올라서서 까마득하게 먼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역시 전멸인가?’
그가 팔짱을 낀 채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하긴 누군가 살아서 나올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행한 의식은 그야말로 중원 역사에 두 번 다시없을 위업이었으니까.
게다가 하필 이곳은 소환지 중에서도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교주는 신중한 사람이다.
무엇이든 확실한 것을 원한다.
적어도 열흘은 이곳에서 지켜보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만족할 것이다.
‘지루한 시간이 되겠군.’
회면인은 얕게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은 느긋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던 시간들이다.
조금은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눈을 떼지 말고 감시하도록.]
[존명]
그가 전음을 흘리자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하들이 전음으로 답해 왔다.
어차피 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몰라 회마단(灰魔團)의 최정예들만 스무 명 추려서 데려온 것이었다.
저들이라면 조그마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쉴 수 있으리라.
‘그럼 눈 좀 붙여 볼까?’
회면인이 팔짱을 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리니 그야말로 요람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정말 깜빡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
무언가를 느낀 회면인이 눈을 번쩍 떴다.
[방금 뭐였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전음으로 묻자, 곧 수하들이 전음으로 답해 왔다.
하지만 회면인은 뭔가를 느꼈다.
그가 천리경을 들어 저만치 동혈 입구를 바라보았다.
수하들의 말대로 어떠한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회면인이 천리경을 내리고는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
또 느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선명한 파동이다.
이번만큼은 수하들도 느낀 것인지 묻기도 전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뭔가 반응이 있습니다!]
[동혈 깊은 곳에서 진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회면인은 보고를 들으며 천리경을 다시 눈에 댔다.
꿍…!
이번에는 더욱 명확한 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게다가 미세한 기의 파동마저 느껴졌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꽤나 큰 파장이 일어난 것이리라.
마침내 천리경으로도 보일 만큼 강렬한 진동이 동혈 근처에서 일어났다.
‘뭔가… 변화가 생겼어!’
회면인은 안력을 돋우어서 천리경을 뚫어질 듯 보았다.
진동과 소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엇?”
뭔가가 동혈에서 내뱉어지듯 후두둑 튀어나왔다.
분명 멸마관 생도들이었다.
“저, 저것들이 어떻게…?”
회면인이 입을 척 벌리고 있는데, 수하들의 전음이 연이어졌다.
[뭔, 뭔가가 튀어나왔습니다!]
[사람 같습니다!]
“시끄럽다! 나도 보고 있어!”
회면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는 입술을 쿡 씹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것들이 살아서 나오다니…!’
때마침 육중한 소리와 함께 동혈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난 가운데에 또 다시 뭔가가 툭 튀어나왔다.
회면인은 얼른 천리경으로 그 그림자를 쫓아갔다.
‘맙소사…! 사, 사비강…!’
틀림없다.
회면인이 직접 사비강을 본 적은 없었지만, 그 인상착의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지금 핏빛 기운을 퍼뜨리며 서 있는 자는 틀림없는 사비강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른 생도들은 사비강의 뒷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 긴장감이 멀리 떨어져 있는 회면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회면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중얼거렸다.
“제길.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설마 석실이 무너졌다는 건가?”
서둘러 천리경을 움직여 보니 생도들 틈에 섞여 있는 은면인도 보였다.
‘은면이… 실패한 모양이군!’
회면인이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그는 다시 천리경으로 사비강을 주시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먹이는 사비강은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는 핏빛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그 기운은 사비강이 들고 있는 검에서 뿜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조금 생소하게 생긴 그 검이 연신 핏빛으로 물들었다가 자줏빛으로 가라앉길 반복했다.
어느 순간 흩어졌던 핏빛 안개 기운이 검신에 스며들 듯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핏빛 기운이 완전히 검신에 갈무리 되었을 때, 사비강이 고개를 꺾어 들고 포효했다.
“끄아아아아아!”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던 회면인에게도 쟁쟁하게 들릴 정도였다.
다음 순간,
“헉!”
회면인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포효를 내지른 사비강이 문득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정확히 회면인을 응시한 것이다.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은 회면인이 얼른 천리경을 내렸다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저기서 여기가 보일 리 없잖아?’
저곳에서 이곳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내공으로 안력을 돋우고 천리경을 들이대야만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니까.
한데 단 한 번에 자신이 있는 곳을 어찌 눈치 채고 보겠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회면인은 다시 천리경을 들어 사비강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헉…!”
회면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보고… 있다?
사비강의 핏빛으로 물든 두 눈이 분명히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마냥 부정하기에는 사비강의 시선이 너무나 정확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팟!
“엇! 사라졌다!”
천리경으로 보이던 사비강의 얼굴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회면인이 천리경으로 얼른 주변을 더듬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생도들 역시 갑자기 사비강이 사라진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그때,
“……!”
회면인은 배후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순간 회면인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아니, 숨도 내쉬지 못했다.
‘맙소사… 어떻게…?’
놀랍게도 핏빛 기운을 풀풀 풍기는 사비강이 자신의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언제 어떻게 이동한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크르르.”
사비강은 맹수와 같은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회면인은 그 앞에서 먹이가 된 짐승마냥 온몸의 털이 곤두선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사비강의 새빨간 두 눈에서도 핏빛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순간 사비강이 손을 불쑥 뻗어 회면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억! 컥!”
속수무책으로 당한 회면인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슈우우우욱! 꽈앙!
사비강은 마치 물건을 내팽개치듯 회면인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수직으로 떨어진 회면인은 그대로 땅바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면서 곤두박질쳤다.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척!
사비강이 쓰러진 회면인 바로 앞으로 내려섰다.
“쿨럭! 쿠웨엑!”
내상을 입은 회면인이 바닥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이건… 괴물이다…!’
회면인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사비강이 한 걸음 내디뎠다.
회면인이 주저앉은 채로 두어 걸음을 후다닥 물러났다.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다시 사비강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
“멈춰라!”
날카로운 호통과 함께 회면인의 정예 수하 스무 명이 사비강을 포위하며 내려섰다.
그들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사비강을 겨누고 있었다.
초절정이 둘이었고, 나머지 열여덟 명이 절정 고수였다.
그들이 한꺼번에 살기를 폭사하니, 숨막힐 듯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크르르.”
사비강은 입가에서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
찰나,
“죽여랏!”
수하 중 한 명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스무 명의 정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동시에,
츄아아아앗!
한 줄기 붉은 바람이 날아오르는 정예들을 향해 부채꼴 모양으로 휩쓸었다.
마치 베르타스가 저절로 움직였고, 사비강은 그 움직임을 쫓아간 것처럼만 보였다.
회면인은 너무 놀라서 입을 척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저, 저, 저런…!’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비강에게 쇄도하던 스무 명의 정예 고수들이 단 일격에 몸이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들이 흘린 피의 상당량은 베르타스가 거짓말처럼 흡수해 버렸다.
우우우우우우웅!
베르타스가 희열을 느끼는 듯 격렬하게 몸을 떨어댔다.
그와 함께 핏빛 기운도 더욱 펄펄 휘날렸다.
사비강이 다시 돌아서서 회면인을 보았다.
이제 회면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물러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
생도들은 멍하니 사비강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대체… 왜?’
사비강은 갑자기 어디로 간 걸까?
사비강이 바로 뒤이어 튀어나왔을 때는 꼼짝없이 모두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비강은 그 직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경신법을 펼치는 것도 보지 못했다.
하긴 마법을 사용해서 이동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 먼 곳에서 뭔가 희미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능소소가 얼른 실레스틴을 소환했다.
“관주님을 찾아줘!”
그녀의 부탁을 들은 실레스틴이 빠른 속도로 숲을 헤집으며 날았다.
잠시 후, 능소소는 실레스틴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사비강이 있는 방향을 무심코 돌아보았다.
‘사부님이 마령교도와…?’
마침 능소소의 반응을 살핀 자운룡과 위검종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을 차고는 달려갔다.
타닷!
자운룡이 나란히 경공을 펼쳐 달리는 위검종을 힐끗 보고는 물었다.
“살기가 지나칩니다. 그렇게까지 관주님을 쫓는 이유가 뭡니까?”
“위협이 된다면 누구라도 찾아서 제거해야지. 그러는 넌 어째서 관주님에게 가는 거지?”
그러자 자운룡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대답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모셔 가야 하니까요.”
위검종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운룡 역시 경신법을 펼치며 말을 흘렸다.
“만약 당신이 관주님을 모셔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겠는데요?”
“관주님은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과 같은 상태다. 굳이 멸마관으로 모셔 갈 필요가 있을까?”
“다른 대안이라도 있습니까?”
“없지. 없으니까 깔끔하게 후환을 없애 버리자는 거지. 너와 손을 잡는다면 좀 더 수월할 것 같군.”
“사람에 대한 포기가 빠르시군요.”
“난 너 같은 우유부단한 정파와 달라서 말이지.”
위검종이 차갑게 비웃자, 자운룡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두 사람은 사비강이 머물렀던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경악한 표정으로 죽어 널브러진 회면인과 상하반신이 깔끔하게 양단된 마인들만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이건…!”
자운룡의 표정이 팍 일그러지자, 옆에 선 위검종이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벌써 한 차례 일이 끝난 모양이군.”
“어디로 가셨을까요?”
위검종이 대답 대신 사체들을 살폈다.
“우리가 도착하기 한참 전에 끝난 상황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더 이상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게 됐지.”
“큰일이군요. 이대로 관주님이 행방불명이라니.”
자운룡이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데,
팟!
위검종이 얼른 경신법을 펼쳐 옆의 나무를 밟고 꼭대기 위로 올라섰다.
휘청휘청.
그가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사비강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