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
귀환 마교관
371화
내당은 무척 넓었다.
내당 한가운데에는 비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앞서 심사를 치른 것인지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이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마침 내당으로 들어서던 등부형은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비무대 위에 서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왠지 낯이 익는 외모.
호리호리한 체격에 흑립과 검은 옷을 착용한 무인.
“아…! 객잔에서…!”
등부형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자, 옆에 서 있던 자운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니, 뭐… 그건 아닐세. 잠깐 본 적이 있을 뿐.”
등부형이 대충 얼버무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비무가 끝난 듯했는데, 그와 함께 겨루었던 상대는 각혈을 한 듯 입가가 피에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릎 아래의 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꺾여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심판 역할을 하던 추량이 흑립의 사내를 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승패가 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소?”
그러자 흑립의 사내가 서늘한 표정으로 추량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멸마관은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설립된 곳 아니오?”
“그, 그렇소.”
“난 그저 상대를 마물이라 생각하고 비무에 진지하게 임했을 뿐이오. 내 마음가짐과 각오가 문제였다면 따로 드릴 말은 없소.”
“그런…”
추량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데, 마침 저만치 단상 위에서 불쑥 사비강이 일어났다.
“됐어. 그만해라.”
그러더니 흑립의 사내를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물을 상대하는 마음가짐이라. 훌륭하오. 한데 이름이….”
“위검종(偉黔宗)입니다.”
“위 대협은 사파의 무공을 익힌 듯한데….”
“문제라도 됩니까? 멸마관은 정사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문제될 건 없고 어떤 무공인지 궁금해서 물었소. 처음 견식하는지라.”
“평생을 은거하시다 세상을 떠나신 사부님께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무공입니다.”
“그렇군. 뭐, 알겠소. 위 대협은 합격이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위검종이 포권을 하고는 물러났다.
고적산이 등부형과 자운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이제 비무대로 오르시오.”
하지만 등부형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척 벌리고 말았다.
그의 태도가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고적산이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말했다.
“뭐하시오? 두 분은 비무대로 오르시오.”
자운룡도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등부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저, 저기… 저 사람은 분명히….”
“네? 관주님 말씀이십니까?”
“관주라고? 누가?”
등부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자운룡을 돌아보았다.
자운룡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참, 선배님은 모르셨지요. 저분이 바로 관주님입니다. 저도 실제로 뵙는 건 처음입니다. 역시 소문대로 젊고 잘생기셨군요.”
“아니, 잠깐. 저 사람… 저 사비강이 이곳 관주라고?”
등부형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주변 눈치를 살폈다.
자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그 사비강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전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럴 수가… 제기랄!”
“왜… 그러십니까?”
“젠장, 젠장, 젠장.”
등부형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필 관주가 사비강이라니!
그때 고적산이 다소 짜증스러운 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 심사를 받을 생각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시오!”
“아아, 죄송합니다. 여기 등 선배님께서 너무 감개가 무량하신 나머지. 하하. 이해 좀 해주십시오. 자자, 선배님 이제 올라가요.”
결국 등부형은 자운룡에게 떠밀리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비강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비무대 복판에 나란히 선 등부형이 사비강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사비강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음? 날 아시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등부형은 더욱 충격을 받았다.
‘나란 존재를 아예 기억에서 지운 거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마침 옆에 선 자운룡이 포권을 취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봉양의 철신문에서 온 자운룡입니다!”
인사를 끝낸 그가 팔꿈치로 등부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등부형이 마지못해 포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용, 용… 용천관에서 온… 등부형입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
“용천관? 용천관의 등부… 아! 등부형 교관!”
그제야 사비강이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그간 잘 지냈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반갑소.”
“예…”
“음? 그런데 칼이 바뀌었소? 원래 도를 쓰지 않았던가?”
“최근 검술에 뜻을 두고 있어서….”
“아, 그렇소? 등 형의 검술이라. 견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군. 기대하겠소.”
말을 마친 사비강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추량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두 분은 서로를 상대로 비무를 하시면 됩니다. 딱히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이윽고 등부형과 자운룡이 마주섰다.
자운룡이 먼저 포권을 하며 발랄하게 외쳤다.
“선배님!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세.”
등부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원자끼리 비무를 하는 거였나? 그나마 다행이군.’
만약 사비강을 상대로 비무를 펼쳐야 했다면, 응시 자체를 포기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응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갈 곳도 없지만.’
그는 이미 용천관을 나올 때부터 돌아갈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천세명에게는 자신의 후임 교관을 일찌감치 뽑으라고 조언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다행이면 다행이군. 이런 애송이와 비무를 하게 됐으니. 그럼 적당히 어울… 음?’
등부형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자운룡을 바라보았다.
검을 앞세운 채로 기수식을 취한 자운룡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뭐, 뭐야? 이놈…! 갑자기 어디서 이런 위압감이…!’
마침내 자운룡의 장삼자락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머리카락마저 한 올 한 올 허공으로 솟아오르면서 너풀거렸다.
뜨끈한 공기가 훅 뻗어 오는 것을 느낀 등부형이 저도 모르게 얼른 검을 뽑아 들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식…! 비무에는 자신이 있다더니… 빈말은 아니었구나!’
자운룡은 확실히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적당히 어울리다가 승리를 거머쥘 생각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자운룡의 기도가 대단했다.
절로 긴장이 된 등부형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운룡을 보았다.
‘자칫하다간 당할 수도 있다. 방심은 금물!’
스스슷.
등부형이 천천히 보법을 밟았다.
물론 선공을 양보할 생각도 싹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염탐했을까?
‘간다!’
평정심을 찾은 등부형이 일순 바닥을 박차면서 달려 나갔다.
쒸에에에엑!
날카로운 파공음에 이어 주변으로 자줏빛 연무가 흩날렸다.
자운룡은 검봉이 꽤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꿈쩍하지 못했다.
그제야 등부형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녀석, 반응이 느리구나! 이걸로 승패는 정해졌다고 봐야겠군!’
그런데 찰나지간,
쒸에에엑!
자운룡이 거짓말 같은 속도로 마주쳐 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사람이 순간적으로 이동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찌르기…?’
곧장 찔러 들어가는 검을 상대로 똑같은 찌르기 수법으로 마주쳐 오는 게 아닌가?
‘이런 미친…!’
검기를 잔뜩 머금은 상대의 검봉이 그대로 연무자령검의 검봉과 마주쳐 왔다.
조금만 어긋나도 둘 중 한 사람은 팔을 크게 베이고 말 상황.
‘흥! 해보자는 건가!’
짧은 순간 등부형은 몸을 비틀며 상대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한데 놀랍게도 자운룡은 거의 똑같은 동작으로 등부형에게 마주쳐 오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검봉과 검봉이 정확히 마주치는 순간!
쩌어어어엉!
“크웃!”
등부형은 온 팔이 저릿하게 떨려 오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반면 자운룡은 시종일관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검봉과 검봉은 서로 맞닿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공의 싸움이 되리라.
“하아아앗!”
등부형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잔뜩 힘을 주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지는 순간, 팔이 찢겨 나갈 정도의 치명상을 입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단전의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연무자령검에 쏟아 부었지만, 자운룡 역시 검을 뻗은 채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팟!
자운룡이 두 눈을 번쩍 뜨자,
쩌적…!
‘헉! 쩌적…?’
불길한 소리가 귀에 닿았다.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려고 했다.
쩌적… 쩍…!
‘안, 안 돼!’
하지만 그의 바람도 허무하게…
까차아아앙!
쉬이이잇, 츄아앗!
놀랍게도 연무자령검이 산산조각 나면서 깨지자, 자운룡의 검신이 등부형의 어깻죽지를 얕게 베면서 지나쳤다.
“크윽!”
비틀거리며 물러난 등부형은 충격에 휩싸인 채 오른쪽 어깨를 부여 쥐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검신이 산산조각 나면서 손잡이만 남은 연무자령검만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데, 그의 목덜미로 차가운 검신이 와 닿았다.
척!
어느새 뒤로 돌아간 자운룡이 검을 내밀어 겨눈 것이다.
완벽한 패배.
그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역시…
‘내… 연무자령검이… 강호 삼십대 보검인 연무자령검이…!’
그가 몸을 가늘게 떨자, 추량이 얼른 나서며 심사 종료를 알렸다.
“여기까지 하겠소.”
그러자 자운룡도 얼른 검을 거두고는 등부형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봐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앞서 만난 것을 인연으로 제게 이만한 희생을 하시다니….”
등부형이 자운룡의 멱살이라도 쥘 것처럼 휙 돌아서다가, 눈물까지 그렁거리는 그를 보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헛기침을 했다.
“커험! 희, 희생이라기보다 자네의 검술이 뛰어난 것일세.”
“과찬이십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만약 선배님의 검이 조금만 더 좋은 것이었어도….”
등부형은 차마 그것이 강호 삼십대 보검에 속하는 연무자령검이라는 사실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울분을 삼키며 짐짓 근엄한 척 말했다.
“고수는 도구를 문제 삼지 않는 법이지.”
한편 비무를 관전한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했소. 자운룡 응시자는 합격. 등부형 응시자는 불합격이오. 단, 등 형께서 괜찮으시다면 본관의 조교로 발탁하고 싶소.”
어차피 등부형은 이곳에서 돌아가더라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처지였다.
결국 그가 마지못해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사비강이 빙그레 웃으며 전음을 흘려보내 왔다.
[옛정을 봐서 조교 자리를 주는 거요. 앞으로 잘 해봅시다.]
[고, 고맙습니다.]
등부형의 얼굴에 억지에 가까운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