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귀환 마교관
368화
끼이이익.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듣기 싫은 마찰음을 내지르며 비스듬히 열렸다.
저벅저벅.
열린 문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보면서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남자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이 차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주변 전경을 살폈다.
눈이 녹은 자리, 앙상한 나뭇가지, 살얼음이 낀 물웅덩이, 입김을 뿜으며 지나다니는 생도들.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약간 낯설게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 수개월 동안 폐관수련을 했기에.
사내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껏 폐관수련을 하면서 이만큼 만족감을 얻었던 적도 없었다.
한데 이번엔 확실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역시 내게 어울리는 것은 도가 아니라 검이었구나.’
돌이켜보면 그런 의문은 오래 전부터 들었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도보다 검이 어울리지 않을지.
그런데 그 의문이 사실이었음을 이번에 수련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됐다.
특히 새로 익힌 질풍순환검법(疾風循環劍法)은 자신에게 딱 맞았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초절정 고수가 와도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생도 한 명이 달려왔다.
“등부형 교관님, 나오셨습니까?”
“오냐, 잘 지냈느냐?”
오랜만에 생도 목소리를 들은 등부형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생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예, 천세명 교관님이 찾으십니다.”
“그래? 알겠다. 곧 가마.”
생도가 돌아가고 나서 등부형은 고개를 들고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겨울도 곧 끝나겠구나.”
**
또로로롱.
찻물이 잔을 채웠다.
시녀가 물러가고 나자, 천세명이 그윽한 눈으로 등부형을 바라보았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이오.”
“덕분입니다. 이번에 확실히 검을 깨우친 것 같습니다.”
“그렇소? 정말 다행이오. 내 뭐라고 했소? 등 형은 도보다는 검이 어울린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껏 그걸 왜 모르고 살았는지. 지난 세월이 야속할 지경입니다.”
“허허, 어쨌든 지금이라도 맞는 옷을 입으셨다니 감축드리오.”
“감사합니다. 한데 오늘 절 보자고 하신 일은…?”
천세명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답했다.
“그간 세상이 많이 변했소.”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폐관수련에만 몰두했더니 벌써 겨울이 끝나가는 것 같더군요.”
“계절 말하는 게 아니외다.”
“하면…?”
천세명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알려 주었다.
등부형의 표정이 시시때때로 변했다.
특히 혈사련이 마령교와 손을 잡고 정도맹을 배반했다고 했을 때는 분노로 치를 떨기도 했다.
또한 마령교가 소환한 마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천세명이 대략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여튼 그렇게 되어서 맹에서는 무한에 멸마관을 만들게 되었소. 적극적인 지원 역시 이루어지고 있소.”
“마령교와 마물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이라니. 목적성만큼은 분명하군요.”
“그렇소. 하나 마령교가 소환한 마물들의 실체가 밝혀진 이상, 수많은 강호 인재들이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오.”
“그렇겠군요.”
“하나, 그만큼 교관도 많이 필요할 테지. 해서 본관에도 지원 요청이 들어왔소.”
“아…”
등부형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은 기대하는 눈치로 천세명을 보았다.
“그럼 혹시 저를….”
“그렇소. 등 형께서 괜찮다면 내가 추천서를 넣을까 하오만.”
“오, 그게 정말입니까? 멸마관은 맹에서도 가장 신경 쓰는 학관이 아닙니까?”
“그렇소. 본관보다 훨씬 많은 지원을 받고 있소.”
“그렇게 대단한 곳에 저를….”
“등 형은 도법에 능할 뿐만 아니라, 이제 검법마저 숙달했으니 아주 훌륭한 인재가 아니겠소?”
“과찬이십니다!”
“허허, 그리 겸손해 할 것 없소. 다만 문제는 그곳 관주가 좀….”
“관주가 누군들 대수겠습니까? 그런 곳은 누구나 지원하고 싶은 곳 아니겠습니까?”
“뭐, 일단 그건 사실이오. 실제로 지금도 많은 무인들이 입관 심사를 받는 것은 물론, 교관 심사도 받고 있으니.”
“그렇군요! 그런 곳에 절 추천해 주실 줄이야.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 내가 추천서를 쓴다고 해도 그곳에서 심사를 받아야 하니 무조건 멸마관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아니오.”
“물론입니다. 그 후는 어디까지나 제 역량에 달린 일 아니겠습니까? 천 부장님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제가 나머지는 잘 해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알겠소. 다만 등 형께서는 그곳 관주가….”
“하하하!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어디서나 잘 적응해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 관주가….”
“괜찮습니다! 그 누구든 잘 적응할 자신 있습니다!”
등부형이 거듭 말을 막으며 외쳤다.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출세 기회가 날아갈까 다소 조급한 마음마저 들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천세명도 굳이 더 말을 이어 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물건을 가져오게.”
그러자 잠시 후 시종이 기다란 검갑을 들고 들어왔다.
시종이 탁자 위에 놓고 물러나자, 등부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물었다.
“이게… 뭡니까?”
“내 선물이오.”
“선물이라니….”
“우선 받으시오.”
등부형이 조금은 기대하는 눈으로 검갑을 열어 보았다.
과연 궤 안에는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보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이건…”
“연무자령검(煙霧紫靈劍)이오.”
“헉! 연무자령검이라면… 강호 삼십대 보검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소. 오래 전에 선물로 받았던 것인데 이번에 등 형이 검법을 익힌 기념이자, 멸마관으로 가게 되는 기념으로 작별 선물이라 생각해 주시오.”
“이, 이런 귀한 걸 제가….”
“사양치 마시오.”
“감사합니다! 천 부장님의 세심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등부형이 벌떡 일어나며 포권을 취했다.
천세명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럼 내가 너무 생색내는 것 같잖소? 그저 잘 사용하시고, 멸마관에서도 부디 좋은 교관이 되어 주시오.”
“물론입니다!”
힘차게 대답한 등부형은 반짝이는 눈으로 앞에 놓인 보검을 들여다보았다.
**
양쪽으로 늘어선 색면인들이 진득한 마기를 숨 막힐 듯 뿜어대고 있는 동혈 깊숙한 곳.
어두침침한 동혈의 가장 깊은 곳에는 높은 단상 위에 태사의가 있었고, 거기에 마령교주가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만약 일반인이 이곳에 들어왔더라면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마기에 질식해 죽고 말리라.
마침내 교주가 눈을 뜨더니 묵직한 음성을 흘려냈다.
“보고하라.”
그러자 얼굴을 자주색으로 칠한 자면인(紫面人)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존야께서 지시하신 대로 중원 열 군데에 신도들을 파견하였습니다. 내일부터는 의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물론입니다. 성공적으로 완료하면 강림지(降臨地)에서도 대대적인 의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교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때쯤엔 강호에 난리가 일어날 테니 본교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터. 하나 강림지에서 진행할 의식은 반 년 이상의 기간이 걸릴 만큼 각별히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당장 저들도 본교의 흔적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을 터.”
“이목을 속일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몇 군데 유인책을 두었습니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교주가 다른 말을 꺼냈다.
“사비강에 대한 건 어찌 되었나?”
“현재 정도맹에서 학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걸 주도한 자가 사비강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학관? 무슨 학관이지?”
“절대지존최강… 음… 본교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을 훈련시키는 학관으로 보입니다. 통상 ‘멸마관’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멸마관이라… 가소로운.”
교주가 피식 웃어 버리자, 자면인이 보고를 이어 갔다.
“현재 대대적으로 입관생을 모집하는 중입니다. 교관도 모집 중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하면 이참에 그자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군.”
탁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색면인들 사이에서 한 걸음 나선 자는 얼굴을 온통 은빛으로 칠한 은면인(銀面人)이었다.
체구는 호리호리했으나, 어딘지 음산해 보이는 표정이 섬뜩해 보이는 자였다.
교주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은면인이 서늘하게 식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입관생으로 위장하여 잠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네가 직접?”
교주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묻자, 은면인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찾긴 어려울 겁니다.”
“그야 그렇지.”
교주 역시 인정한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무리는 하지 말도록. 중요한 시기인 만큼 어디까지나 염탐에만 뜻을 둔다.”
“존명.”
은면인이 예의 그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
띠리리링. 띵.
맑은 선율이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꽃이 가득 핀 분지에 아름다운 선율이 불어오자 나비들이 그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다.
띠링. 띵. 띵.
선율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이곳의 풍경과 무척 잘 어울렸다.
유유히 흘러가던 선율이 어느 순간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분지에도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며 꽃잎과 풀잎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내질렀다.
나비들과 벌떼가 날아오르며 한 폭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그대로 넋을 잃고 말았으리라.
그만큼 선율과 풍경은 하나의 작품처럼 잘 어울렸다.
절정을 찍은 선율이 다시금 고요하게 내려앉자 춤을 추듯 날아오르던 나비와 벌떼가 차분하게 꽃잎 위로 가라앉았다.
흔들리던 꽃잎과 풀잎도 이제는 끝나가는 음악의 여운을 느끼기라도 하듯 천천히 몸을 흔들 뿐이었다.
띠링. 띵.
마침내 끝을 알리는 마지막 음이 울렸다.
살랑이던 바람조차 고요함 속으로 잠겨들었다.
모든 자연이 호흡을 멈추고는 끝나 버린 음악의 여운을 느끼는 듯했다.
금을 타던 곱고 여린 손이 살며시 무릎 위로 돌아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선율을 연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존야’라 불리는 소녀였다.
정자에 앉아 금을 연주하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세상은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다시 바람이 살랑이고 꽃잎이 흔들리며 나비가 날아올랐다.
그토록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한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차갑고 무감한 목소리가 그 작은 입술을 비집으며 흘러나왔다.
“따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주로다.”
무심한 그 목소리는 분명 소녀가 중얼거렸지만, 어딘지 소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스스로에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뭐, 어린 마음과 나름 어울리긴 했다.”
“어리다니요. 백 년 가까이 산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흥! 수백 년 이상을 살아 온 내가 볼 때는 가소로운 생명이지.”
“그도 그렇군요. 한데 그곳에도 음악이 있습니까?”
“소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할 수밖에.”
“그곳의 음악도 들어보고 싶군요.”
만약 누군가 보았더라면 소녀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소녀의 눈빛이 너무나 맑고 차가웠다.
소녀는 가만히 금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다. 들려주마.”
순간 소녀의 눈빛이 어딘지 매섭게 변했다.
곧이어,
띠리리리리링!
뚜두둥! 땅!
그녀의 손이 어지럽게 금을 타며 춤을 추는 듯했다.
하나 악기에서 울려나오는 음악 소리는 그야말로 등골이 서늘해지고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뚜루루루룽! 따당! 따당!
연주가 절정으로 치닫자, 주변으로 광풍이 휘몰아쳤다.
잠시 후 하늘을 날아다니던 나비와 벌들이 이내 힘을 잃고 비실비실 떨어져 내리더니 활짝 핀 꽃들마저 시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띠리리리링! 따앙!
소녀의 손가락이 줄을 튕기고는 하늘로 치켜 올라갔을 때,
“여기까지입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소녀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소녀가 피식 웃었다.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아닙니다. 듣기 좋았습니다. 다만… 오직 강맹함만으로는 인간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뚜루루루룽.
다시 맑은 소리가 울려나왔다.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자, 비실거리던 나비와 벌떼가 다시 날아올랐고, 시들어 가던 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인간은 복잡하지요.”
“그래서 나약한 존재라는 거다.”
소녀는 스스로의 말에 반박하면서 연주를 멈췄다.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정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마령교주였다.
“어찌 되고 있느냐?”
소녀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마령교주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모든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강림지 선별은 어찌 되었나?”
“감숙성(甘肅省)의 기련산(祁連山)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습니다.”
“사비강은?”
“무한에 학관을 만들어 본교에 대항할 것으로 파악됩니다. 수하를 보내 위장 잠입을 지시했습니다.”
“그렇군. 잘 알겠다.”
“그럼.”
교주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났다.
한참 후 소녀가 입을 열었다.
“감숙성의 기련산이면 너무 멀지 않은가?”
“하지만 강림지 의식은 반 년 이상이 걸릴 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기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소녀가 자문자답을 이어 갔다.
“그렇군. 사비강이라는 자가 계속 신경이 쓰이는군.”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렇지. 한낱 인간일 뿐이지. 하지만….”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어딘지 그놈에게서는 냄새가 나. 익숙한 냄새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