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
귀환 마교관
358화
“헉, 헉, 헉…!”
묵양제는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 검강을 일으키는 것보다 호신강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흑마병의 칼날을 막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호신강기를 발휘했더니 온몸이 녹초가 됐다.
그는 겨우 고개를 들고 저만치 맹주전 벽을 부수며 날아간 흑마병을 보았다.
흑마병은 결국 사비강이 쏘아 보낸 파이어 캐논(Fire Cannon) 마법에 당해서 즉사하고 말았다.
‘제길…!’
묵양제는 뒤늦게 왼쪽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하고는 허리를 폈다.
결국 도움을 청하고 말았다.
사비강이 귓가로 전음을 보냈을 때, 그는 잠시나마 갈등했다.
차마 그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흑마병의 칼날에 호신강기는 점점 찢겨 나가고 있었고, 묵양제의 기력은 차츰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런 순간에 사비강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전음을 보냈다.
[말만 해. 도와줄 테니까.]
[닥쳐라! 나는… 숭고한… 희생을…!]
[정말 그걸 원하나? 과연 저런 괴물 따위에게 죽어 버리는 게 숭고한 희생일까? 그냥 개죽음이 아니고?]
[크읏!]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괴물 따위한테 목숨을 잃게 되다니.
사비강은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결국 개죽음이야. 네가 여기서 죽으면 누군가는 네 시체를 치우겠지. 맹주전 바닥은 다시 깨끗해질 거고. 뭐, 장례는 치러 주겠지만 사람들은 머지않아 널 잊어 가겠지.]
[닥쳐…!]
[하지만 지금 내게 도움을 청하면, 너는 살아서 뭐든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이익…!]
[말만 해. 네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
마지막 그 한 마디는 그야말로 강렬한 유혹이었다.
체면도 지키고 목숨도 지킨다면 손해 볼 건 없지 않은가?
이제 호신강기를 찢으며 들어선 칼날은 거의 눈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한순간의 집중력만 흐트러져도 흑마병의 칼날이 이마를 뚫고 말리라.
그때 사비강이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다시 말하지만 네 명예는 지켜 주지. 내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비밀로 해준다.]
[젠장…!]
[뭐, 싫다면 할 수 없…]
[도, 도와줘!]
[뭐라고?]
[이 개자식! 이제 와서 다른 소리냐? 도와 달란 말이다!]
[그럼,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그게 마지막이었다.
묵양제는 순간 집중력을 잃었고, 동시에 호신강기는 유리처럼 깨져 나가고 말았다.
흑마병의 칼날이 그대로 이마에 박혀 드는 순간,
쏴아아아아앙!
사비강이 내뿜은 불꽃 광선이 그대로 흑마병의 몸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꽈아아앙!
튕겨 나가다시피 날아간 흑마병은 그대로 맹주전 벽을 부수면서 안마당에 나뒹굴었다.
즉사였다.
온몸이 시커멓게 타버린 흑마병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후우우.”
묵양제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반면 숨을 죽여 가며 싸움을 지켜보던 수뇌 인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우선 그들은 두 가지에서 놀랐다.
첫째로 사비강의 마법이 이 정도로 강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직접 목격하니 그 위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두 번째로 사비강이 직접 나서서 묵양제를 구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수뇌 인사 중에는 일부러 묵양제를 구하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만약 묵양제가 이 자리에서 죽기라도 하면, 그걸 빌미로 사비강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는 묵양제의 목숨조차도 하나의 권력 유지 수단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사비강은 주위 시선을 의식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게 됐소. 자칫 묵 당주가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나섰소. 내가 묵 당주의 숭고한 뜻을 오해한 것 같소. 생각보다 말 뿐인 사람들이 많거든.”
사비강이 말끝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묵양제를 바라보았다.
묵양제는 마음속에서 은근한 수치심이 일어났지만, 곧 모르쇠로 일관하며 포권을 취했다.
“나 역시 직접 겪어 보니 사 대협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소. 이 녀석들은 평범한 무공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대협이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무공을 그저 사악한 술법으로만 치부한 것은 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소. 혹시 내 말에 기분이 언짢았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별 말씀을.”
사비강이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수뇌 인사들은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하기가 애매해졌다.
가장 격하게 맞서던 묵양제는 갑자기 사비강과 뜻을 맞춰 버렸고, 욱청풍과 조적상은 여전히 혼곤한 잠에 빠져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사비강이 손바닥을 펼쳤다.
화르르륵!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생겨났다.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싶은 생각에 사람들이 움찔거리고는 사비강을 경계했다.
사비강이 장내를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것이 그 술법이오. 여러분들이 사악한 마계의 술법이라고 말한 것이오.”
“…….”
어떤 이는 마냥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고, 어떤 이는 두려움이 담긴 눈빛으로 보았다.
또 어떤 이는 경멸을 담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묻겠소. 여기에 어떤 사악함이 있소?”
“…….”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무엇이 사악한 거요? 가령 내가 이 불덩이를 날려서 죄 없는 아이를 죽이면 사악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나, 이 불덩이를 날려서 마병을 죽인다면? 그것은 정의요? 불의요?”
“끄음…”
몇몇 수뇌 인사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사비강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반대로 정도의 무공을 익힌 자가 죄 없는 아기를 죽인다면? 그건 정의요? 불의요? 모름지기 정과 사는 무공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 아니겠소? 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인간들이야 그 형식에만 집착하게 마련이지만.”
수뇌 인사들이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뭐라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나서서 물었다.
“하면 사비강 대협께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오?”
“지금은 정과 사를 나누고 인간들끼리 서로 치고 박으며 싸울 때가 아니란 거요. 더욱이 맹 내의 권력에만 눈이 멀어 알력다툼이나 한다면 더더욱 패망의 지름길로 가는 것이지.”
“커험.”
내심 찔리는 것이 있는 것인지 묵양제를 비롯한 몇몇 수뇌 인사들이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응시했다.
사비강이 부서진 벽과 그 너머의 흑마병 사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만간 저 녀석들보다 더한 것들이 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할 거요. 어디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지는 확실히 알 수 없소. 하지만 주로 음기가 집약되어 있는 곳에 나타날 거요. 우린 그걸 대비해야 하오.”
“잠깐. 아무리 그래도 혈사련은 용서할 수 없소! 그들은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를 배반한 자들이오! 그들 때문에 은휘 당주님이 돌아가시고, 수많은 정도 무인들이 죽었소. 이를 그냥 묵과한다면 강호가 본맹을 비웃을 거요!”
불쑥 끼어들면서 소리친 사람은 무적당주(無敵堂主) 방철(方哲)이었다.
그는 원래 대외 온건파였지만, 이번 전쟁 중 각별한 사이로 지냈던 은휘가 죽자 혈사련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져 강경파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사비강이 그를 물끄러미 보다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원의 모든 사파 무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건 멍청한 짓이오. 그리고 신의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응징은 이번 전쟁으로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오.”
“하나 살아남은 자들은…!”
“그럼 방 당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사파 무인들의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벌이자는 거요? 언제 끝날지도 모를 소모적인 전쟁을?”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대의를 그르칠 생각이오?”
“크음!”
“혈사련주 허무극은 죽었소. 그리고 백호당의 추희룡 당주는 련주마저 배신하고 본맹을 도왔소. 특히 소비광 대주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분이오.”
사비강의 시선이 소비광에게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소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추희룡 당주가 아니었다면 전 진즉 죽었을 겁니다.”
사비강이 말을 받았다.
“해서 내 생각에는 혈사련을 추희룡 당주에게 맡기는 것이 어떨까 싶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라고 본맹을 돕겠다는 심정으로 그런 일을 했을까? 그저 이 기회에 련주의 자리를 노려보겠다는 심보였겠지! 그러니 그가 목적을 이룬다면 또 본맹을 배신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겠소?”
그러자 사비강이 다시 천멸대를 향해 명령했다.
“끌고 와라.”
그러자 장내에 모여 있던 수뇌 인사들이 저마다 움찔 떨며 단상이 있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냥 말로 하시오! 아까부터 뭘 자꾸 끌고 오라는….”
하지만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천멸대원들은 곧 맹주전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그들이 끌고 들어온 것은 마병 같은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공진철에 구속되어 있는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수뇌 인사 중에는 그를 알아보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저, 저자는…!”
“의파지단주… 곡자강!”
“저자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오?”
수뇌 인사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씩 내뱉어댔다.
의파지단주 곡자강.
정도맹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살아온 마령교도!
바로 녹면인이었다.
곡자강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멸을 넘어 지독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죽이려고 했소.”
“무슨 말을…?”
사비강이 턱짓을 하자, 곡자강을 끌고 온 염자량이 등 뒤로 다가가 혈을 점했다.
탁탁탁.
“컥!”
순간 곡자강이 허리를 꺾으며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사비강이 손에 든 뭔가를 튕겨 날렸다.
휘익!
붉은 빛의 단환이 순식간에 곡자강의 입안으로 쑥 들어가더니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염자량이 다시 혈을 점해서 아혈을 풀어 주자, 곡자강이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내게 뭘 먹인 거냐?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입을 열지는 못할 거다.”
“알아. 어차피 넌 열 입도 없겠지.”
사비강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곡자강이 눈썹을 구기고는 물었다.
“무슨 뜻이지?”
“생각해 보니 너 따위에게 중한 정보를 남겼을 리는 없을 것 같거든. 애초에 그런 위치에 있는 자라면 이번 전쟁에 참전도 시키지 않았을 테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곡자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흥! 격장지계라면 소용…!”
“격장지계는 무슨. 그냥 대놓고 무시하는 거다.”
사비강이 조소를 지으며 말하자, 곡자강의 안면이 팍 일그러졌다.
한편 사람들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사비강과 곡자강을 번갈아보았다.
사비강이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방금 저 녀석이 복용한 것은 ‘위선자의 혀’라는 거요. 얼마 전, 혈사련주가 홍묘를 이용할 때 쓴 세혼폭멸고와 비슷한 용도라고 보면 될 거요. 내가 원한다면 저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죽을 수 있소.”
말을 마친 사비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짤막한 주문을 읊었다.
다음 순간,
“헉! 으아아악!”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 곡자강이 비명을 내지르더니,
퍼어억!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수박 깨지듯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참혹한 광경에 모두들 넋을 놓고 보았다.
사비강이 장내를 훑으며 예의 그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혈사련주에게 저걸 복용시킬 거요. 그럼 배신할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이 순간 사비강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철 역시 더 이상은 반박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비강이 본론을 꺼냈다.
“해서, 나는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앞으로 닥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강호 조직을 새로 만들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