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
귀환 마교관
344화
막사 안에서 사기와 마기가 소용돌이쳤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혈사련주 허무극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파의 고수들이 도열해 있었고, 우측에는 마령교 고수들이 서 있었다.
“크음.”
허무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헛기침을 뱉었다.
마침 막사 안으로 녹면인이 들어섰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좀 늦었습니다.”
그러자 혈사련 쪽 무인 중에서 현무당주 독고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일렀다.
“몸이 많이 무거우신가 보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야, 원. 살을 빼든지 해야지.”
녹면인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자, 독고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건방진…!’
이쪽에서는 련주가 직접 가담해서 막사에 머물고 있는데, 마령교에선 교주는커녕 부교주 조차 코빼기도 안 보이지 않는가?
물론, 차후의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편이 더 낫다고 총군사 류여중이 말했지만, 독고진으로서는 그들의 건방진 태도에 내심 배알이 뒤틀렸다.
“생각보다 마령교가 제 역할을 해주었네.”
허무극이 말하자, 녹면인이 빙그레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다만, 정도맹주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은근한 질책.
그 속뜻을 알고 있는 허무극이 미간을 좁히고 사기를 드러내자, 녹면인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아, 혹시라도 오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저 능글맞은 놈…!’
독고진이 이를 빠득 갈면서도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류여중이 한 걸음 나서며 회의를 진행했다.
“정도맹주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은 안타깝습니다만,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여, 본 사마연맹은 이대로 정도맹 본단까지 치고 올라갈 계획입니다. 이에 이의가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당연히 따라야지요.”
녹면인이 예의 그 헤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류여중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심중을 알기 어려운 자로군.’
이후로도 마령교 측에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혈사련의 입장을 따랐다.
회의가 끝난 후, 막사를 나오던 백호당주 추희룡은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추 당주.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소?”
돌아보니 현무당주 독고진이었다.
평소에도 잦은 의견 충돌로 서먹한 사이였기에 추희룡은 께름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추 당주가 보기에는 저들에게서 저의가 느껴지지 않소?”
독고진이 저만치 멀어져 가는 마령교 고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추희룡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올시다. 내가 독심술을 익힌 것은 아니니 어찌 알겠소? 다만… 그들 역시 이 강호에서 저만큼 뿌리를 내릴 정도이니, 뭔가 따로 둔 생각이 있을 것 같긴 하오.”
“바로 그거요. 한낱 바람결에 날아 온 씨앗이라도 토지가 좋으면 뿌리를 내리는 법이 아니겠소? 저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본련이지만,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진 않을 것 같소. 어떻게든 마령교의 뿌리를 이 강호에 더욱 깊이 박으려고 하겠지.”
“해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이오?”
추희룡이 눈살을 구기고 묻자, 독고진이 주변을 훑어보다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정도맹을 정리하면 곧바로 저 녹면인부터 제거하는 게 어떻겠소?”
“뭐요?”
추희룡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치자, 독고진이 얼른 주변을 훑으면서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쉿!”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전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전음으로 해야겠군. 사실 추 당주도 말하지 않았소? 저들에게 따로 둔 생각이 있을 거라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모처럼 추 당주와 내가 의견 일치를 보았으니,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추후 본련이 저들 때문에 곤란에 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는 거요. 물론 그건 실수를 가장할 거요. 만약 당주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저 녹면인 쯤은 손쉽게 제거할 수 있지 않겠소?]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라면?]
[설마 추 당주와 내가 힘을 합쳐도 저자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독고진이 비아냥거리듯 말했지만, 추희룡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거요.]
[신중이 아니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오. 아니면 저들의 세력이 잡초처럼 자라날 게 뻔하오.]
추희룡이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독고진은 대외적으로 시종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다.
‘어떻게든 일을 크게 벌이려고 작정을 한 자 같군.’
확실히 섣불리 대답할 사안은 아니다.
만약 사비강이 이 판도를 뒤집어 줄 만한 사건을 일으킨다면 뭐라 답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괜히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사비강 교관은 아직 무사하다. 어쩌면 이 판도가 달라질 수 있어.’
하지만 사비강만 믿고 마냥 기다리기에는 너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닌가?
만에 하나 독고진의 말대로 정도맹을 궤멸시켰을 때를 대비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때였다.
독고진의 수하 한 명이 다가왔다.
“당주님!”
“무슨 일이냐?”
독고진이 까칠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당주끼리 대화하는 자리에 불쑥 끼어든 것이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안이 그만큼 급하리라 짐작해서인지 더 나무라지는 않았다.
“총타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총타? 천상궁에서 말이냐?”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그것이 명리각이….”
수하가 말끝을 흐리면서 추희룡을 힐끔거렸다.
명리각이라는 말에 추희룡도 귀를 쫑긋 세웠다.
‘설마 사비강의 짓이 들킨 건가?’
만약 그랬다면 모든 게 끝이다.
특히 그에게 설계도면을 건넨 것까지 발각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리라.
독고진이 추희룡을 힐끔 보더니 곧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괜찮으니까 보고해라.”
어차피 여기까지 들었는데 괜히 은밀하게 보고를 이어 가면 오해만 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이어진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명리각 무인들이… 전멸 당했습니다.”
“뭐얏?”
전혀 예상치도 못한 보고에 독고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다시 한 번 주위를 의식하더니 나직이 소리쳤다.
“명리각 무인들이 전멸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수하가 대략의 사정을 전하자, 독고진의 표정이 점점 참혹하게 일그러져 갔다.
뜻밖의 소식에 이번에는 추희룡이 성큼 나서며 물었다.
“흉수는?”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살막이 개입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막이라니! 그들이 대체 왜?”
독고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추희룡도 얼른 말을 보탰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지 않겠나? 또 다른 누군가가 없었나?”
“예,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독고진은 입을 딱 벌린 채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이었고, 추희룡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됐다! 사비강 교관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한편 독고진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수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저었다.
“알았으니 그만 가보라. 련주님과 군사는?”
“지금쯤 보고를 받았을 겁니다.”
“제길.”
독고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을 저었다.
추희룡이 짐짓 걱정이 되는 척 다가갔다.
“괜찮소?”
“지금 괜찮게 생겼소? 하필 명리각이…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살막이 노렸다면 어쩔 수 없었을 거요.”
“아무리 그래도…! 가만, 그러고 보니 일전에 신생조 녀석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았소?”
“무슨 말이오?”
“아니지. 분명 그 녀석들이 그런 말을 했소. 사비강이 살막의 살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허참.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어째서….”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출정하는 동안 사비강은 몸을 숨겼고, 이제는 신생조도 행방불명이오! 거기에 살막의 개입이라니. 이게 우연이겠소?”
“흐음. 그래도 너무 억측에 가까운 것 같소만.”
추희룡이 시치미를 떼자 독고진도 맥이 풀리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진 않았다.
하긴. 정도맹에서 파견 온 교관이 살막을 수하처럼 거느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갖다 붙인 게 아닌가 싶었다.
독고진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어쨌든 내 제안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슨 제안 말이오? 아, 녹면인을 제거하자는 것?”
“그렇소.”
“사실 좀 우려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나 역시 마령교 녀석들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독고 당주와 뜻을 같이 하겠소.”
독고진의 표정이 모처럼 밝아졌다.
“오, 진심이오?”
“물론이오.”
“잘 생각하셨소. 사실 추 당주는 워낙 둘러가는 걸 선호해서 내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염려했었소.”
“오해요. 나 역시 본련을 위하는 마음이 왜 없겠소? 본련에 도움만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소.”
“흠. 좋소. 자세한 건 후에 다시 논의합시다.”
“그럽시다.”
추희룡이 내심 조소를 머금으며 돌아섰다.
그런데 그가 두어 걸음 옮겼을 때였다.
문득 독고진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한데… 얼마 전에 놓친 정도맹의 무인 말이외다.”
“정도맹의 무인?”
“은휘의 수하 말이오.”
소비광을 두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추희룡이 그를 놓아 주었기에 내심 긴장하며 되물었다.
“아, 그자. 그건 왜…?”
“그자를 놓친 건 추 당주답지 않았소.”
“물론 내 책임이 없진 않지. 한데 이제 와서 다시 그걸 따지자는 건….”
추희룡의 시선이 조금 전 수하가 있었던 곳으로 슬쩍 향했다.
명리각의 실수에 대해서 따져보자는 의미였다.
전시 상황에서 조무래기 하나를 놓친 것과 명리각 무인들이 전멸한 것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독고진으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독고진도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헛기침과 함께 한 발 물러섰다.
“뭐,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니. 다음엔 서로 조심합시다.”
“그럽시다.”
마침내 독고진도 께름칙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추희룡이나직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감이 좋은 편이군. 하지만 집요함이 떨어진다는 게 당신의 치명적인 단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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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덕만 넘어가면 맹주님이 계십니다.”
조문탁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사비강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왜 그렇게 실성한 녀석처럼 웃는 거냐?”
“그냥. 이렇게 교관님이 살아계시니까요.”
사비강이 슬쩍 물러났다.
“너… 남색 하냐?”
“무슨 말입니까! 그냥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살아계셔서 기쁘다는 뭐 그런 말이라고욧!”
“흐음. 오해했군.”
“보통은 그 시점에 오해 안 한다고요!”
“보통은 남자가 그렇게 남자를 보며 생글생글 웃지도 않지.”
“나 참. 죽음의 강에서 돌아와도 하나도 변하신 게 없군요.”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지.”
“교관님은 좀 변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건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냐?”
“그게 아니잖아욧! 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이미 크게 한 번 변했지.’
그는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는 신생조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마침 맹주가 이끌고 온 무인들이 인근에 도착하면서 정찰을 나왔던 조문탁이 사비강과 신생조를 발견한 것이었다.
어차피 대규모 전투가 한 번은 벌어져야 하는 만큼 사비강은 신생조원들을 데리고 정도맹 본단에서 파견된 무인들과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관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마침 저만치 커다란 바위 옆에 한 노파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에 머리가 희끗희끗 샌 노파였는데, 얼굴에 온통 누런 칠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바로 황면인이었다.
그녀의 등에는 기다란 자루가 메여 있었다.
“사부님…”
추량이 경각심을 가지며 바짝 다가오자, 사비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
사비강이 황면인이 서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내게 볼일이 있는 건가?”
사비강의 질문에 황면인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른 입술을 열었다.
“네가… 사비강인가?”
“그렇다.”
다음 순간 황면인의 눈빛에 살기와 분노, 원망과 증오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감정을 다스리겠다는 듯 질끈 눈을 감더니 곧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사비강을 보았다.
그리고…
“……!”
신생조는 물론 사비강도 흠칫 놀랐다.
황면인이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리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