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
귀환 마교관
335화
터벅터벅.
사비강은 질퍽한 길을 걸어갔다.
툭, 투둑. 툭.
치이잇.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따끔한 통증이 일어났다.
사비강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의 색은 녹빛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빗방울 역시 녹빛이다.
독우(毒雨)다.
세상이 종말을 고하려는 것인지 벌써 일 년째 독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중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살아남은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어쩌다가 만나게 되더라도 대부분 타인에 대한 경계심만 가득하여 말 한 마디 나누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만났던 자들은 지금 살아있을까?
아마 죽었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독우가 쏟아져 내리고, 우물은 독수로 채워졌고, 강가에는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서 썩은 내를 풍기며 떠다녔다.
농작물은 물론 생명력이 질긴 잡초들마저 시들시들 힘을 잃다가 이내 바싹 말라 버렸다.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사비강은 지친 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기억나는 건 정확히 일 년 정도 전부터였다.
독우가 쏟아지기 전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기억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속이 후련하겠건만.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마침 저만치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였다.
강물 역시 진녹색을 띄고 있었다.
진득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니 괜히 목이 더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서 수통을 꺼내 입에 물었다.
꿀꺽. 꿀꺽.
단 두 모금만 마시고 다시 수통을 품에 넣어 두었다.
세상이 독에 잠긴 후로 맑은 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지금 수통에 담긴 물도 며칠 전 이름 모를 산의 옹달샘에서 기적처럼 구한 물이었다.
강가에는 집 한 채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사비강은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낡은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독우가 그칠 때까지 잠시 머물 생각이었다.
끼이이익.
낡은 문짝이 듣기 싫은 마찰음을 터뜨리면서 힘겹게 열렸다.
어두컴컴한 실내는 여느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난장판이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 아니겠나?
세상이 종말의 징조를 보인 후로 사람들은 광기에 젖어서 서로를 죽여 댔으니까.
극한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다 같이 살아남는 길보다, 혼자서 살아갈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세상을 잠식시킨 독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꼴이 되었으니까.
사비강은 창가에 마련된 의자에 척 걸터앉았다.
탁자는 부서진 채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가 창밖에 내리는 독우를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콰자자작!
갑자기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어두컴컴한 실내 한쪽에서 누군가 훅 달려들었다.
사비강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면서 상대에게 일장을 뻗었다.
하지만 찰나지간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장력을 거두었다.
와락!
“제, 제발 물 한 모금만 주시오! 제발…!”
사비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남자는 이미 중독 증상이 심각해서 얼굴 여기저기에 물집이 생긴 상태였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절반 이상 빠져서 듬성듬성했고, 눈동자의 흰자는 누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얼마 살지 못할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물에 빠져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사비강의 옷자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제발…! 물을…! 물…!”
“물을 마셔도 당신은 죽는다.”
“아냐! 난 안 죽어! 젠장! 물을 내놓으란 말…!”
퍼억!
결국 사비강은 그의 머리통에 장력을 격발시키고 말았다.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간 사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오랜만에 살아 있는 자를 봤군.’
사비강은 손을 털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우가 그쳤다.
더 이상 이런 곳에 머물 이유는 없다.
‘나는 또 어디로 가는가?’
의미 모를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녹빛으로 물든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가에 다다라 고개를 숙여 보니 수면에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물건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비강은 그것을 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졌다.
쇄골 사이쯤에 파묻혀 있는 해골 펜던트.
크라니온이다.
어딘지 절규하는 듯한 모양의 해골.
뒤틀려 있는 눈, 코, 입이 몹시 기괴하다.
다른 건 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녀석의 명칭만큼은 정확히 기억이 난다.
크라니온.
한데 언제부터 자신의 몸에 이렇게 파묻혀 있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저 일 년 정도 되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쇄골 사이에서 뼈처럼 툭 튀어나온 녀석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어루만져보았다.
이젠 마치 신체의 일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크라니온의 눈이 붉은 빛을 뿜으면서 기묘한 울림을 전했다.
사비강이 미간을 모으고는 한숨을 탁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하군.”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로 돌아서니 풀숲이 흔들리면서 뭔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쓰러져 가던 건물의 문짝이 비스듬히 열리더니 조금 전에 죽었던 남자가 비척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놀랍게도 남자는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간 모습 그대로였다.
범인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기절해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하지만 사비강의 눈동자에는 그저 지친 기색만 비쳤다.
늘 그래왔던 것을 보는 듯.
“네놈들이 하나둘 설쳐대는 걸 보니, 또 그 녀석이 가까이 온 모양이구나.”
가볍게 한숨을 내쉰 사비강이 손을 불쑥 뻗었다.
순간 낡은 건물 안에서 칼자루 하나가 창문을 깨부수며 날아왔다.
척!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사비강이 주변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비척비척.
처벅처벅.
곳곳에서 앙상한 뼈만 남은 시체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비강이 왼손에 마나를 집중해 보았다.
쑤우우웅.
하지만 역시 뭔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나의 흔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쇄골 사이에 박힌 해골의 입에서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흡수되듯 사라졌다.
‘역시…!’
마나를 사용할 수는 없다.
이 저주 걸린 크라니온 때문에 마나가 응집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진 않다.
내공으로 치환해서 사용하면 되니까.
타다다다!
순간 거리를 좁혀 오던 시체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
“크르르르!”
녀석들은 마치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면서 덤벼들었다.
사비강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쉬이이잇! 쉬컥! 서컥! 서걱!
한 줄기 섬광이 터질 때마다 움직이는 시체들이 괴성을 터뜨리며 쓰러져 갔다.
이 움직이는 시체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보통 사람들보다 열 배는 빠르고, 힘이 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사비강은 최대한 내공을 아껴 가면서 움직이는 시체들을 휩쓸어 갔다.
대략 한 식경 정도가 지났을 때, 십여 구의 시체가 완전히 토막이 난 채로 주위에 널브러졌다.
이따금씩 꿈틀거리며 움직였지만, 더 이상 사비강에게 위해를 가하진 못했다.
심호흡을 마친 사비강이 칼을 든 채로 돌아섰다.
강이 제법 넓다.
나무판자라도 하나 구해서 올라타고 건너야 할 듯하다.
그런데 그때,
우우우우웅!
“크읏!”
사비강이 쇄골 사이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크라니온의 눈자위가 온통 핏빛을 발하면서 격렬하게 진동했다.
“제길!”
사비강이 욕지거리를 뱉어내고는 몸을 휙 돌렸다.
언덕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붉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그림자는 얼굴이 완전한 해골 모양이었다.
눈, 코, 입의 위치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는 것이, 사비강이 가진 크라니온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나타스…!”
일 년째 자신을 쫓고 있는 악마.
나타스다.
순간 나타스의 음성이 천지에 격동했다.
- 도망자여, 더 이상 의미 없는 저항은 그만 두어라.
“의미고 나발이고. 그만 좀 따라다니라니까.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군.”
사비강이 비웃음을 머금고는 톡 쏘듯 대꾸했다.
나타스의 눈자위가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저 꼿꼿하게 선 채로 떠오른 것이었기에, 그 모습이 상당히 기이했다.
까악, 까악!
주변으로 까마귀 떼가 날아와 내려앉았다.
까마귀는 저마다 기형적으로 생겼는데, 대부분 몸의 절반은 썩어 문드러져서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저벅저벅저벅…!
마침내 웅장한 울림과 함께 언덕 위로 빼곡하게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모두 죽은 자들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의 향연.
그들의 눈빛이 온통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전신에서는 독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허공으로 떠오른 나타스가 핏빛 망토를 펄럭이며 도도한 음성을 떨쳐 울렸다.
- 지긋지긋했다면,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지.
다음 순간 그가 손을 뻗자, 언덕 위에 빼곡하게 몰려왔던 죽은 자들의 군대가 포효하며 해일처럼 밀려왔다.
사비강이 칼자루를 움켜쥐고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죽여 주마!”
파밧!
그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섬광을 뿌리며 날아갔다.
**
막사로 들어선 류여중은 허무극의 눈치부터 살폈다.
허무극은 류여중을 보고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가 정말로 화가 났을 때만 보이는 반응이었다.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한데 세혼폭멸고의 혈색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홍묘의 몸에 심어 놓은 세혼폭멸고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정도맹주가 아주 건재하군.”
허무극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류여중이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발 빠른 자를 보내 두었습니다. 곧 소식이 올 겁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겠군. 이 정도 되면 일이 잘못됐을 거라는 것 말일세.”
“아직 단언하기에는….”
입을 열던 류여중이 이어질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허무극은 말없이 류여중을 바라보기만 했다.
살기를 전혀 담지 않은 그 눈빛에서 류여중은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마침내 허무극의 침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군사의 자리가 말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말을 아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죄송합니다.”
“마령교는?”
“현재 연합군과 의미 없는 소모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도맹 역시 본련에게 많은 의무를 위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마령교 토벌에 적극적이진 않습니다.”
“신생조는?”
“아무래도 정도맹 본단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허무극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참에 옹기승과 구강룡도 배신자로 낙인찍을 기회가 될 테니.
그리고 이런 때를 대비해 오래전부터 옹기승에게 수를 써 두기도 했다.
류여중이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정도맹 본단에서 소식이 오는 대로 마령교는 본련과 협력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 소식이 너무 늦으면 안 될 걸세. 이런 소모전이 길어지면 정도맹에서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을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류여중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도대체 홍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