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
귀환 마교관
331화
쉬이이잇!
적무린의 검이 서래향의 손끝을 스치며 그대로 가슴으로 짓쳐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노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으읏.
“……!”
적무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라져…?’
어느새 서래향은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한기가 느껴졌다.
“방심하면 곤란해.”
“큿!”
적무린이 재빨리 돌아섰지만, 서래향의 손이 불쑥 뻗어 나오면서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큭!”
“여기서 내가 독공을 쓰면 무린은 죽는 거야.”
“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되죠.”
“뭐?”
쉬이이잇!
적무린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면서 서래향의 손목을 노렸다.
서래향이 깜짝 놀라면서 손을 놓고 물러났다.
그녀가 이맛살을 곱게 구기면서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정말 손목이 날아갈 뻔했잖아?”
“이젠 그 정도는 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호오, 마치 그동안 날 봐줬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건 아니지만 일말의 망설임 정도는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훗, 그럼 이제 더 재미있겠군!”
파밧!
서래향이 다시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려 왔다.
그녀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 거침없이 던졌다.
따다당!
불꽃이 터지면서 적무린이 휘두른 검에 비수들이 튕겨져 날아갔다.
그 중에서 몇 자루는 서래향에게 되돌아갔다.
쒸잇, 쒸에에엣!
서래향이 얼른 허리를 꺾으며 날아드는 비수를 피했다.
피츗!
한 자루의 비수가 그녀의 팔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녀가 몸을 옆으로 회전하며 허공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휘리리릭!
파밧!
적무린 역시 바닥을 차고는 그대로 서래향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망설임 없이 검을 곧장 내질렀다.
하지만 서래향은 찰나지간 손을 뻗어 적무린의 손목을 쳐냈다.
탁!
“큿!”
적무린이 신음을 흘리면서 물러나려는 찰나, 그대로 서래향이 장력을 뻗어 왔다.
퍼퍼펑!
파바밧!
적무린이 얼른 보법을 밟으며 물러났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에 적무린도 더 이상은 검을 부리지 못하고, 왼손을 뻗어 급하게 막아냈다.
파파파파팡!
연이어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어지럽게 손발이 오갔다.
이따금씩 적무린이 검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서래향은 적무린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더욱 거리를 좁혀 왔다.
적무린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서래향이 원래 독공을 주로 사용하는 만큼 무기에 의존하진 않는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독공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싸우고 있다.
만약 그녀가 작정하고 독기를 발산한다면, 이 대련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리라.
처음에는 조금이나마 버티던 적무린이 삼십 합 정도가 넘어가자, 손발이 어지러워지면서 점점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윽고 그가 급하게 왼손을 뻗을 때였다.
휘리릭, 탁!
서래향의 오른손이 마치 뱀처럼 뻗어와 적무린의 왼손목을 감아쥐더니, 단숨에 어깨너머로 넘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엇!”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적무린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바닥에 쿵, 드러누웠다.
“크읏!”
휘리리릭, 팟!
어느새 서래향은 몸을 날려 쓰러진 적무린의 가슴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주저앉았다.
“헉!”
그녀의 엉덩이에 깔린 적무린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서래향의 무릎이 그의 양팔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래향이 가녀린 팔을 뻗으며 적무린의 목 언저리를 꾸욱 눌렀다.
“혈화염비독(血華炎沸毒). 이제 무린은 반 각 이내에 전신에서 붉은 반점이 꽃송이처럼 피어나기 시작할 거야. 전신의 혈액이 끓고 타오르는 감각을 겪게 되겠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그렇게 죽어가는 거야.”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잔혹한 통보였다.
적무린이 몇 차례 저항을 시도하다가 이내 포기하면서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 졌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군요.”
서래향이 피식 웃었다.
물론 그녀가 혈화염비독을 사용했다면, 적무린은 그녀가 말한 대로 독상을 입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진 않았다.
그저 사용했을 경우를 가정해서 말한 것일 뿐이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적무린의 낯빛은 점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팍에 와 닿은 감촉은 무척 낯선 것이었기에.
“저어… 이제 그만 비켜 주시는 게….”
적무린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까스로 말을 뱉어내자, 서래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얼굴이 홍시처럼 발갛게 변했어. 왜 그러지? 설마 나도 모르게 혈화염비독을 쓴 건….”
“아닙니다. 그보다 어서 비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압박하진 않았는걸.”
서래향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얼른 일어났다.
그제야 적무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그의 탄탄한 가슴에 그 낯선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을 살며시 문지르던 적무린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만약 자신의 이런 모습을 사비강이 보았다면, 아마 평생을 두고 놀려 먹었으리라.
‘하긴 그 인간이었다면 오히려 홍묘 님과 비무를 하자고 조를 지도 모르겠군.’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서 적무린이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마침 서래향이 다가오면서 말을 건넸다.
“오늘도 재미있었어. 이긴 기념으로 내가 한 턱 쏠게.”
“졌으니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럼 계속 무린이 사야 할 테니 오늘은 내가 사주지.”
“말로 상처 주는 방법을 잘 아시는군요.”
“호호. 그랬나? 아무튼 내가 맛집을 알고 있으니 따라와.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는 거지?”
“이미 정해두신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맞았어. 가자. 지금쯤이면 저녁 시간이 꽤 지났으니, 줄 서지 않아도 될 거야.”
서래향이 적무린의 팔을 잡아끌며 앞장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정도맹 내원의 문을 지나, 외원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상황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아마도 정사연합 작전이 시작된 만큼 당양으로 충원을 가지 않은 무인들은 모두 객잔이나 다루에 모여서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마령교를 토벌하고 나면 정사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할까?”
서래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적무린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무린은 어떻게 생각하지?”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하지만 그분은 언제까지나 웅크리고 있을 분이 아니야.”
“련주님… 말씀입니까?”
서래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에 대해서 잘 안다.
‘그분의 가슴에 갇혀 있는 야망이 철창을 뚫고 나오는 순간….’
그때였다.
뱃속에서 뭔가 따끔한 감각을 느꼈다.
서래향이 움찔거리고는 걸음을 멈췄다.
나란히 걷던 적무린이 눈썹을 구기며 돌아섰다.
“홍묘…님?”
“…응?”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괜찮아. 잠깐 뭔가… 흐음. 아니야, 아무것도.”
뭐였을까?
조금은 낯선 감각이었는데, 그 후로 느껴지는 것이 없다.
서래향이 얼른 내공을 일주천시켜보았지만, 역시나 걸리는 건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녀가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무린은 뭘 가장 좋아하지?”
적무린이 당황한 듯 서래향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질문이신지.”
“뭐든 말이야. 오리 고기, 돼지고기, 면 요리 등.”
“아… 전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그럼 안 돼. 뭔가 좋아하는 게 한 가지 정도는 있는 게 좋아. 인간은 그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니까.”
“그렇습니까?”
“그렇지. 커다란 행복 하나보다는 작은 행복을 자주 찾는 게 좋은 거지. 가령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먹는다든지.”
“그래서 지금은 뭘 먹으러 가는 겁니까?”
“국수지. 바로 여기야.”
서래향이 발걸음을 멈추고 식당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낡고 허름한 건물.
은근한 기대를 품었던 적무린의 표정이 살짝 실망으로 일그러지자, 서래향이 가볍게 웃으면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일단 날 믿어 봐. 왜 작은 행복인지 알려 줄 테니.”
그녀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
“…홍묘님?”
적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서래향을 불렀다.
그녀는 적무린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돌아서더니 어디론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적무린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서래향이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그곳은 정도맹의 내원 방향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서래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가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홍묘님? 작은 행복 두고 어디 가십니까?”
적무린이 그답지 않은 농을 던지면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래향은 일절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홍묘님? 홍묘님!”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적무린이 소리쳐 부르다가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고는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은 정도맹이다.
괜히 ‘홍묘’라는 단어를 크게 부르짖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서래향의 발걸음은 이제 뛴다고 해도 될 정도로 빨랐다.
얼른 그녀를 앞지른 적무린이 우뚝 멈추고는 물었다.
“홍묘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
홍묘는 가만히 적무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나를 보긴 보는 건가?’
분명 시선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마치 그 너머의 뭔가를 보는 것처럼 생기가 없다.
‘뭐지? 도대체….’
적무린이 미간을 좁히고는 서래향에게 다가갔다.
“뭔가 불편한 게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을….”
휘익! 퍽!
“커억!”
눈 깜빡할 사이였다.
서래향이 귀신같은 보법을 밟으며 다가서더니 그대로 일장을 내질렀다.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려 단전을 보호했지만, 내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적무린이 눈을 부릅뜨고는 울컥 피를 토했다.
“이게 무슨 짓…!”
말을 뱉던 적무린이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서래향은 그런 적무린을 무심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길…! 도대체 이게 뭔…!’
적무린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힘겹게 일어섰다.
그가 얼른 내공을 일주천하면서 내상을 다스리고는 서래향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때쯤 서래향은 벌써 외원을 벗어나 내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대주님! 홍묘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뭣?”
무천의 보고에 당이협이 휙 돌아섰다.
“본가에서 연락은?”
“아직입니다.”
“젠장!”
당이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재 당문에서는 세혼폭멸고를 막을 방도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홍묘의 몸에 기생한 세혼폭멸고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면….
‘이러다 늦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암영대는?”
“현재 사비강 전 국주님에게 약수를 뿌리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맹주전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이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님은 무사하실 것이다.
수많은 무인들이 겹겹이 맹주전을 에워싸고 있으니.
“자칫 그녀를 죽이게 되면 곤란하다. 수많은 희생자가 불가피해질 것이다.”
“궁을 사용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희생이 불가피해지겠지. 적어도 일개 조직은 그녀를 막으며 궁을 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한데 화살이 명중해서 세혼폭멸고가 폭발하면 그 조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뿐만 아니라 본단의 절반 정도는 날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만약 최악의 경우가 되면, 맹주님이 본단을 벗어나실 것이다.”
“그럼…?”
“지근거리에서 그 다음으로 내공이 심후한 자를 찾아가겠지.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목숨 걸고 막아내는 수밖에 없다!”
“존명!”
대답과 함께 무천의 신형이 사라졌다.
당이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드시… 반드시… 막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