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
귀환 마교관
326화
분명 셰이프 스위치 마법으로 우광의 모습을 하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카피 보이스 마법도 사용한 상태다.
그런데… 왜?
마법이 모두 풀려 버렸다.
느닷없는 상황에 사비강이 당황한 사이, 상대가 곧장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놈!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쉬이이잇!
‘젠장!’
넋 놓고 있던 사비강이 내심 욕지거리를 뱉으며 얼른 물러났다.
사내가 재차 소리쳤다.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어디서 온 놈인지 정체를 밝혀라!”
사비강은 가만히 미간을 모았다.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마법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자신의 얼굴은 우광의 얼굴과 절반씩 섞인 상태로 묘하게 이지러져 있으리라.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자 명리각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놀라운 건 그들 모두 사비강이 서 있는 곳을 똑바로 응시하는 게 아닌가?
곧이어 복도 안쪽에서 한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그는 명리각에서 서열 삼위라고 볼 수 있는 암흑대주(暗黑隊主) 인조흠(人釣欽)이었다.
각주와 부각주가 약과 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암흑대주는 명리각 내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인조흠이 무인들을 헤집고 나타나더니 사비강을 보고는 흠칫거렸다.
‘역시… 뭔가 잘못됐군.’
아니나 다를까 인조흠이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더니 곧장 겨누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사비강은 눈썹을 일그러뜨리고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명리각을 다녀간다는 계획은 일단 틀어졌다.
하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다.
우습게도 지금 그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명리각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가 없군.”
사비강이 셰이프 이미지 마법을 풀어 버리고는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복도로 몰려나온 무인들이 입을 딱 벌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지?”
“갑자기 얼굴이 저렇게 바뀌다니. 무슨 무공이지?”
마치 귀신 놀음 같은 현상에 무인들이 술렁거리자, 인조흠이 한 걸음 성큼 나서서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사비강 교관?”
인조흠은 사비강을 바로 알아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적개심이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더욱 큰 경계심을 가진 채 사비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에 왜 나타난 거지?”
“뭐… 어쩌다 보니 들어왔어.”
“그럼, 부각주님은 어떻게 되신 거지?”
사비강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일일이 다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흥! 겁도 없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냐? 뭘 노리고 잠입한 건지 모르겠지만, 멀쩡하게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인조흠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다른 무인들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서는 살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온갖 독향에 진득한 살기까지 더해지니 사비강도 조금은 긴장이 됐다.
‘쳇, 피독주의 효능이 다 했군. 지금부터는 조금씩 중독될 텐데.’
물론, 큐어 포이즌 마법을 사용하면 어지간한 독은 해독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수만 가지의 독이 모여 있었다.
그 독들이 각종 실험과 제조 과정 속에서 융합하고 자욱한 독무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
단 하나의 독을 집중적으로 해독하는 게 아닌 이상, 큐어 포이즌 마법으로 치료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 만큼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사비강이 출입구를 딱 막아서더니 허리춤에서 베르타스를 스르릉 뽑아 들었다.
“뭐, 어차피 한바탕 해야 할 것 같으니, 빨리 시작하자고.”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이라도 빨리 닦아내지 않으면 흔적이 남고 만다.
셰이프 이미지와 카피 보이스 마법이 풀린 것이 좀 찜찜하긴 하지만 일단 수습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인조흠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곧 차갑게 조소했다.
“이제 보니 사 교관은 소문보다 멍청하군. 이곳은 공력을 사용하는 순간….”
“비상종이 울리겠지?”
“그렇다. 그렇게 되면 기관 장치가 저절로 작동하고 외부에서 번을 서는 무인들은 물론, 혈사련의 모든 무인들이 이곳으로 집결하게 될 것이야.”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구오오오…!
그의 검신을 타고 묘한 기운이 파장을 일으키며 점점 커졌다.
검신에 형형한 빛을 뿜으며 맺힌 것은 바로 검강에 해당하는 오러였다.
이를 본 인조흠과 명리각 무인들은 저마다 두 눈을 끔뻑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떻게 검강을 사용하고도…?’
그들 모두 천장을 보며 두리번거렸다.
비상종이 울리지 않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해하는 인조흠을 보며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누가 내공을 쓴다고 했나? 난 다른 걸 쓸 거야. 빨리 끝내자.”
다음 순간,
탓!
쉬이이이잇!
사비강이 살풍을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
천상궁에서 출발한 혈사련 무인들이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한 나절만 더 가면 목적지인 당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저문 지 오래였기에 오늘 밤은 이곳에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급 무인들 몇몇이 신속하게 천막을 치고 련주의 임시 거처를 만들었고, 다른 당주 급 무인들의 임시 숙소도 하나둘 세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신생조를 이끌고 온 추량은 마음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지금쯤… 사부님은 나오셨을까?’
아마 살막은 지금쯤 천상궁에 도착했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들, 명리각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면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으으…!’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그가 엄지손톱을 깨물며 서성거리는데, 옆에서 빽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 정신 좀 차리라니까!”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추량이 돌아보니, 맹가숙이 한숨을 내쉬며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정신이 어디로 간 거요? 당신이 지금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 잊었소?”
“아, 미안하오. 무슨 일이오?”
추량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하자, 맹가숙이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신생조가 쉴 만한 곳을 알아보고 오겠다고 했소. 이왕이면 한적한 장소가 좋을 것 같아서 말이오. 굳이 다른 조직과 섞여서 분쟁거리 만들 일은 없지 않소?”
“아, 알겠소. 너무 멀리 가진 마시오.”
“그러지.”
맹가숙이 대답을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그가 문득 멈춰 서더니 추량을 돌아보았다.
“교관님은 무사할 거요.”
“뭐라고요? 그걸 어찌 아시오?”
추량이 물어보자, 맹가숙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정도 세월을 살다 보면 촉이라는 게 발달하지. 그보다 그렇게 당신 사부를 겪으면서도 아직도 불안하오? 난 전혀 불안하지 않소. 오히려 재미있지.”
“재미있다고?”
“그렇소. 교관님이 이번에는 또 얼마나 멍청한 사건을 만들지 기대도 되고. 킬킬.”
‘허얼. 그래서 더 불안한 거요! 게다가 사부님이 안 계신다고 멍청한 사건이라니! 돌아오시면 다 일러 줄 테다!’
이제야 추량은 자신의 불안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깨달았다.
그래, 사부님은 멀쩡할 것이다.
설마 사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나?
다만 사부님이 저지를 일이 이번엔 또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일지 걱정되는 거다.
그렇게 맹가숙이 떠나고 난 후, 누군가 다가왔다.
추량이 돌아보니, 총군사 류여중이었다.
“사비강 교관께서는 아직인가 봅니다.”
“아… 군사님. 하하. 사부님이 워낙 바쁘셔서 말이지요.”
“뭘 하느라 그리 바쁘답니까?”
“그것이… 아시다시피 사부님이 워낙 ‘나만의 길’을 고집하시는 분이라 저에게도 구체적으로 말씀을 잘 안 해 주십니다.”
류여중이 피식 웃었다.
“혈사련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보면 벌써 도망을 갔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추량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고를 치면 쳤지, 도망갈 분은 아니지.’
류여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몸을 돌렸다.
“모쪼록 늦지 않게 나타나시길 바랍니다.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추량이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내심 이를 갈았다.
‘흥! 네놈들의 속내를 모를 줄 알고? 오히려 나타나지 않는 쪽이 더 고마울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추량은 사비강이 정말 나타나지 않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련주의 막사에 류여중이 들어섰다.
허무극은 간이침상에 걸터앉아서 이제 막 운기행공을 마치는 중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이 스멀거리다가 이내 몸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허무극이 눈을 뜨고는 류여중을 보았다.
“사비강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나?”
“예, 보아하니 추량이라는 자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입니다.”
“흐음. 제자도 모르게 잠적을 했다라… 군사의 짐작은?”
“죄송합니다. 도무지 그자의 심중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류여중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럴 때 괜히 그럴싸한 가능성을 늘어놓는 것은 그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모름지기 군사라면 그 가능성이 육 할은 넘어갈 때 입 밖으로 내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사비강에 대한 생각은 그야말로 백지 상태다.
모든 가능성이 그저 허무맹랑한 망상에 가깝다.
물론, 그 망상들 중 하나가 사실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자칫 이러한 망상들을 대책 없이 늘어놓다 보면 주야장천 돌다리만 두드리는 수가 생긴다.
허무극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자가 워낙 독특하긴 하지.”
“사비강의 행보는 지금까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특이했습니다. 하여, 이번 일도 분위기를 봐 가면서 좀 더 두고 보는 것도….”
“아니.”
허무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자네는 잘 알지 않나? 이번 거사는 내게도 큰 결심이야. 이 굳은 마음이 언제 변할지 알 수 없네. 마음을 먹었을 때 해야지.”
“하지만 혹여라도 사비강이라는 자가 예상치 못한 방해를 해온다면….”
“그럼 정도맹주가 살 가능성이 있나?”
허무극이 눈을 들어 류여중을 보았다.
류여중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뒤늦게 나타나서….”
“그건 문제가 아닐세.”
허무극이 광오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류여중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허무극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실수는 아니지. 군사라면 최악을 가정해야 할 테니. 하나, 아직 내가 건재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만분지 일로 내 힘이 모자란다면 마령교도 있지 않은가? 그들도 방해자를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터.”
“물론입니다. 그럼 당양에 도착하면 칠주야 이내의 적당한 날을 잡아 거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
“후욱, 후욱…”
거친 숨이 토해져 나왔다.
사비강은 고개를 들고 복도를 보았다.
‘제길. 독이 꽤 깊이…’
예상대로 명리각 무인들은 온갖 독공을 쏟아 부었다.
게다가 자체 개발한 이상한 장치를 이용해서 사비강에게 닥치는 대로 독물을 퍼부었다.
좁은 공간에서 싸우다 보니 마땅히 피할 방법은 없었다.
우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마음으로 그대로 맞서 싸웠다.
그 바람에 수만 가지의 독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어써 버렸다.
그럼에도 사비강은 그야말로 야차처럼 싸웠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제길! 이 빌어먹을 크라니온!’
사비강은 이제야 셰이프 이미지와 카피 보이스가 왜 깨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눈, 코, 입이 뒤틀린 크라니온.
그것은 지금 사비강의 쇄골 사이에 절반쯤 파묻혀 있었다.
놀랍게도 크라니온은 사비강이 마나를 쓸 때마다 눈자위가 초록빛으로 물들면서 사이한 기운을 뿜어댔다.
그리고 싸움이 초중반쯤 접어들었을 때, 크라니온은 노골적으로 사비강의 마나를 흡수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비강은 뒤늦게 이 크라니온이 저주받은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크라니온이 몸에서 떼어낼 수도 없을 만큼 쇄골 사이에 깊이 파묻힌 상태였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크라니온은 그의 몸 일부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손가락을 쇄골 사이를 푹 찔러놓고 떼어내려고도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 바람에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힘겨웠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사비강이 복도를 훑어보았다.
온통 피 칠갑이 된 복도.
수십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불에 탄 시신도 있었고, 사지가 절단된 시신도 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직후에는 마법을 이용해서 적들을 수월하게 상대했지만, 크라니온이 본격적으로 마나를 흡수하며 방해했을 때부터는 수 배 이상 힘을 들여야 했다.
시체들을 훑어보던 사비강이 눈을 들어 정면에 선 인조흠을 보았다.
“흐이익…!”
인조흠이 체면불고하고 헛바람을 삼키며 성큼 물러났다.
칼을 쥔 손이 주책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너는… 괴물이냐?”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아직 괴물보다 더한 걸 본 적이 없나보군.”
“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이 가능…! 흐익! 오, 오지 마!”
하지만 사비강은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