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귀환 마교관
318화
적무린은 언덕 위에 버틴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저곳인가…?’
성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문을 중심으로 동과 서를 잇는 장벽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과연 정도맹은 듣던 대로 굉장히 넓군.’
그 규모만 봐도 압도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적무린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상궁을 나선지 대략 보름 만이었다.
오랜만에 궁을 나선 것이었기에 그리 서두르진 않았다.
대신 눈 내린 초겨울의 풍경을 만끽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홍묘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여유를 가지려는 건 그의 오랜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도맹의 본단에 다다른 것이다.
정문에 이르자 날카로운 인상의 무인 두 명이 적무린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멈추시오. 귀하는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과연 명문 정파를 대표하는 곳인 만큼 엄중하면서도 깍듯하게 예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적무린이 포권을 하며 두 사람에게 답했다.
“천상궁에서 온 적무린이라고 하오.”
“천상궁?”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천상궁이라면 혹시 혈사련의 총타?”
“그렇소.”
적무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대번 그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물론 좋은 변화는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의 표정에 멸시와 조소가 서려 있었으니까.
문지기 중 한 명이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혈사련에서 무슨 일로 여길?”
“련주님의 심부름이오. 이곳에 계신 홍묘님을 뵈러 왔소.”
적무린이 무심히 품으로 손을 가져가자, 두 명의 문지기가 대번 무기를 앞세우며 소리쳤다.
“동작 그만!”
“움직이지 마!”
적무린이 멈칫거리고는 두 사람을 보았다.
“련주님의 인장을 보여드리려고 하오만.”
“닥치고 꼼짝 마라.”
이쯤 되자 적무린은 슬쩍 부아가 치밀었다.
원래부터 그는 정도맹의 무인을 매우 싫어해서 사고까지 치고 근신처분을 받던 자였다.
한데 이렇게 먼저 성질을 건드리니 내심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꼼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지?”
적무린이 차갑게 쏘아보자, 문지기 한 명이 코웃음을 치더니 저벅저벅 다가와서 적무린의 품에 손을 넣었다.
“네놈들은 눈만 돌려도 뒤통수를 치는 것들이 아니더냐?”
“…….”
적무린이 치미는 분을 꾹 눌러 참는 동안 문지기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음…? 두 장인데?”
“한 장은 그쪽이 볼 내용이 아니오.”
“그럼 누구에게 전하는 거지?”
“련주께서 홍묘님에게 전하는 거요.”
“한 번 봐야겠군.”
“그쪽이 볼 내용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적무린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하지만 문지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큰소리쳤다.
“네놈들은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것들이니까, 초반부터 확실히 검열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놈들…? 내 분명 련주님을 대신해 왔다는 것을 알렸고, 인장까지 보여주었을 텐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이거 아무래도 주제를 모르는 모양이군. 너희들이 본맹에 패한 사실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바짝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이봐. 좋은 말할 때 내놔.”
적무린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기도가 변하자 문지기들이 흠칫거리고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곳이 곧 정도맹의 본단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턱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노옴! 감히 지금 우리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이냐?”
“한낱 문지기들 주제에 예를 차려 줬더니 너무 설쳐대는군.”
팟!
순간 적무린이 바닥을 차더니 바람처럼 날아가서는 문지기 손에 들린 서신을 낚아챘다.
“엇!”
문지기가 깜짝 놀라며 물러나자, 옆에 있던 자가 창을 고쳐 쥐고는 소리쳤다.
“놈! 역시 무력을 쓰려는 것이냐?”
“무력은 무슨. 당신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을 텐데.”
“우리는 어디까지나 검열을 하려는 것일 뿐이다!”
“련주님의 인장을 보여줬으니, 나머지는 담당자가 확인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한낱 문지기가 볼 내용이 아니다.”
“노옴, 우리를 무시하다니! 건방진!”
파밧!
문지기가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무공이 적무린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이곳은 정도맹의 본단.
미치지 않고서야 혈사련에서 파견 온 자가 자신들을 향해 무력을 행사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함부로 할 만한 신분이 아니라면, 동행하는 무인들이 있었을 터.
하지만 적무린은 혈혈단신으로 찾아오지 않았나?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그저 한낱 별 볼일 없는 심부름꾼 정도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진 않았다.
실제로 적무린은 현재 혈사련에서도 대주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신생각에서 조교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다만, 그가 한 성질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퍽! 퍼퍽!
적무린은 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문지기 두 명의 목과 가슴을 연이어 쳐냈다.
“커억!”
“쿠악!”
한 명은 목이 부어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헛구역질을 해댔고, 다른 한 명은 울컥 피를 토하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제야 그들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왜 말로 하면 들어 처먹질 않는 거냐?”
적무린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쓰러진 두 명의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마침 바깥의 소란을 들은 것인지 안에서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냐? 노옴! 네놈은 누군데 감히 정도맹 본단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거냐!”
텁석부리 사내가 노호성을 터뜨리더니 도를 뽑아 들고는 적무린을 겨눴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수문 무사들이 우르르 나서며 적무린을 완전히 포위했다.
적무린이 텁석부리 사내를 보며 툭 던지듯 물었다.
“그쪽이 수문장인가?”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혈사련에서 왔다. 여기 련주의 인장이다.”
적무린이 서신을 꺼내 수문장에게 던졌다.
수문장이 서신을 낚아채고는 빠르게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 같군. 한데 혈사련이 어째서 본단에 와서 행패를…?”
“행패는 내가 먼저 부린 게 아닐 텐데. 이들이 먼저 내 서신을 멋대로 가져갔다.”
수문장이 문지기들을 보자, 그 중 한 명이 얼른 대답했다.
“수상쩍어 보여서 확인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한데 무슨 음흉한 밀서라도 되는 것인지 보이지 않으려고 하기에….”
수문장의 시선이 다시 적무린에게 향했다.
해명의 기회를 주겠다는 표정.
적무린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정도맹은 절차도 격식도 없는가? 입장을 바꿔서 정도맹주가 쓴 서신을 본련의 문지기가 멋대로 살펴본다면 어떻게 할 텐가?”
대답이 궁해지자 수문장이 헛기침을 내뱉고는 말했다.
“하지만 본맹의 규칙상 서신의 내용을 검열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검열하면 누가 뭐라고 하나? 한낱 문지기가 련주님의 서신을 훑어본다고 하니 나섰을 뿐.”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더 이상 수문장에게는 따지고 들 명분이 없었다.
결국 그가 칼을 거두며 포권했다.
“아무래도 소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우선 따라오시오.”
그러면서도 다른 수문 무사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적무린이 냉소를 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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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죄송해서 어쩌지요?”
서연각주(書聯閣主) 원길(元佶)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홍묘 서래향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각주께서 미안하실 일은 아니죠.”
“허참… 그래도 혹시 모르니 누락된 서신이 없는지 꼼꼼하게 찾아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전 괜찮으니.”
서래향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서둘러 서연각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혹시나 누락된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연각은 정도맹의 외원에 위치한 기관으로, 정도맹 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깥의 사람들과 연통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정도맹의 본단은 보안의 문제로 개인이 전서구를 함부로 날려 보낼 수 없었다.
때문에 맹 내의 모든 무인들은 개인적인 서신을 서연각을 통해서만 주고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몇몇 수뇌 인사들의 경우에는 내원에서 직접 전서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볼모로 잡힌 신세인 서래향은 일반 무인들처럼 서연각을 이용해야만 했다.
얼마 전 서연각을 통해 혈사련주에게 서신을 날렸던 서래향은 혹시나 답신이 왔을까 하는 기대에 이곳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서연각은 각각의 서신을 배달까지 해주진 않기에 직접 틈틈이 찾아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그런데 최근 서래향이 자주 찾아오자 서연각주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가진 것이다.
내원을 향해 걸음을 돌리던 서래향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그래. 사사로운 정을 쌓을 분이 아니지.’
고개를 들자 유달리 시린 바람이 불었다.
코끝이 차가웠다.
그렇게 걸음을 서두르려는데, 마침 저만치 앞에 낯익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적 대주!”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곧 적무린의 표정에도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이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였는데,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녀가 적무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적 대주! 정말 적 대주가 왔군! 여긴 어쩐 일이지?”
서래향이 반색하며 말하자, 적무린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또 딱딱하게 구는군. 편하게 말하라니까.”
“워낙 오랜만이어서… 쉽지 않군요.”
적무린의 대꾸에 서래향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야 어디서든 잘 적응하지. 오히려 너무 편하게 지내서 내 속에 있는 독기가 빠져나간 기분이야. 련주님은 잘 계시지?”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적무린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날 보자마자 련주님의 안위부터 물으시다니….’
어지간히 그리운가보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적무린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서래향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물론, 적 대주도 잘 지냈을 테고?”
“예. 이젠 대주가 아닙니다만.”
“아, 들었어. 사비강을 보조하고 있다지?”
“그렇게 됐습니다.”
“정도맹에 도착해서 마찰은 없었나?”
평소 적무린의 성격을 알기에 서래향이 넘겨짚으며 물어본 것이다.
적무린이 쓴 웃음을 지었다.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다행히 잘 넘어갔습니다.”
“그랬군.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련주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홍묘님을 뵙고 선물을 전하라는.”
적무린이 고급 비단에 쌓인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순간 서래향의 표정이 상기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작은 선물이 불러올 엄청난 파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