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귀환 마교관
309화
허무극이 나타날 즈음 사비강은 구강룡과 정류광에게 사령환을 복용시킨 후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이용해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흑운성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허무극은 그저 사비강이 이제야 흑운성에 도착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사비강에 대한 경계심을 거두진 않았다.
마침내 중단성을 지나 상단성으로 올라온 사비강이 옹기승과 허무극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엇? 기승이 아니냐? 그리고 그쪽은….”
“여기서도 보는군, 사 교관.”
“련주께서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입니까?”
“흑운성이 구강룡에게 장악됐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걸세. 게다가 옹기승이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허무극이 태연히 거짓말을 하자, 사비강이 짐짓 감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이 모든 것이 련주께서 벌인 일입니까? 무슨 화산이라도 터진 줄 알았습니다.”
사비강이 호들갑을 떨자, 련주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본좌가 한 일이 아니다.”
“그럼…?”
“정확한 건 아직 모르네. 어쨌거나 자네는 한 발 늦은 것 같군. 옹기승은 내가 구했으나….”
허무극이 옹기승의 시선을 들여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준 후, 구강룡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사비강이 그의 시선을 쫓아가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구강룡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누굽니까?”
“구강룡일세. 아직까지도 자네 수업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자지.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참여할 수 없….”
“잠시 좀 보겠소.”
사비강이 허무극의 말을 자르고는 구강룡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사비강이 구강룡의 맥을 짚었다.
확실히 사령환의 효력 때문에 구강룡은 시체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비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서 다른 말을 꺼냈다.
“이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살려내겠소.”
“뭐라?”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운이 좋다면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더니 사비강은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구강룡을 들쳐 메는 게 아닌가?
다시 옹기승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사비강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물었다.
“한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모르겠네. 본좌가 왔을 때는 이미 이 지경이었으니.”
사비강이 의심스러운 눈을 하자 허무극이 눈살을 구겼다.
“본좌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련주께서 굳이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단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을 뿐이오.”
“어쨌거나 이번 일은 운이 좋았네. 자칫하면 자네가 담당한 신생조원 두 명이 명을 달리했을 테니. 뭐, 한 녀석은 이미 저승 강을 건넌 것 같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 녀석은 반드시 살려낼 테니까. 그럼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승아, 가자.”
“…….”
하지만 옹기승은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사건의 원흉이 눈앞에 서 있다.
어찌 발길이 떨어지겠나?
옹기승이 눈을 꾹 감은 채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쓰는데, 마침 사비강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들려왔다.
[지금은 아니다.]
짧은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울림은 옹기승을 결국 움직이게 만들었다.
“예… 교관님.”
옹기승이 사비강의 뒤를 따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한편, 사비강의 어깨에 척 늘어진 구강룡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련주…! 내 인생을 가지고 놀았단 말이렷다! 목 씻고 기다리시오! 내 언젠간 련주의 목을 치고 말 거요!’
**
쾅!
허무극이 탁자를 내리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탁자 한쪽이 부서져 나갔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고, 꽉 말아 쥔 주먹에는 강기가 맺혔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숙인 사내는 아무런 말없이 대기했다.
그는 바로 일전에 거지 차림으로 사비강을 몰래 염탐하던 남자였다.
“한심한 것들! 마령교라고 해도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군!”
허무극이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이번에야말로 선천마령지기를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환원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한데 이게 뭔가?
선천마령지기를 가진 녀석은 조작된 기억까지 완전히 되찾았고, 봉인되어야 할 힘은 아직도 녀석의 몸에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닭 쫓다가 지붕 쳐다보는 개 신세가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대체 그날 흑운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현재 흑운성은 보수 공사 중이다.
한데 정말 기이하게도 상단성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르며 나타난 용암 덩어리들이 눈이 녹듯이 점점 사라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 마령교의 기상천외한 대법으로 인해 일어난 일일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창밖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허무극이 마침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명이 가능한가?”
뒤에 두어 걸음 떨어진 사내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또한 그를 질타하는 말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내는 어깨를 움찔 떨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우선… 마령교에서 옹기승에게 사용한 대법이 무엇인지는 알아냈습니다.”
“해서?”
“그들이 사용한 대법은 환옥봉인대법이었습니다. 이는 기억 속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환기시켜 영원히 그 기억 속에 정신을 가둬 두는 대법입니다.”
“옹기승에게 가장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라면 바로 제 아버지를 자신이 죽였던 순간이 되겠군. 그것이 비록 조작된 것일지라도 스스로 자각할 수 없었을 테니.”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환옥봉인대법은 실패했다. 그것도 모자라 기억까지 되찾았지. 흑견(黑犬), 자네는 이걸 어찌 설명할 텐가?”
허무극이 몸을 돌리고는 사내를 보았다.
‘흑견’이라 불린 사내는 다시 한 번 몸을 가늘게 떨었다.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허무극의 시선에서 억눌린 분노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의 분노로 자신이 목숨을 잃는 것은 그야말로 가을바람에 마른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흑견은 일단 침착하게 대꾸했다.
“순서가 다릅니다.”
“무슨 소린가?”
“환옥봉인대법이 실패한 뒤에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닙니다. 기억을 되찾은 뒤에 환옥봉인대법이 깨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면 자네가 직접 조작했던 그 기억이 왜 깨졌다고 생각하나?”
“환옥봉인대법에 영향을 받았을 리는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입을 열던 흑견은 뒷말을 흐렸다.
확신이 없었다.
과연 누가 조작된 기억을 되돌린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환옥봉인대법이 기억 조작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분명 누군가가 기억을 먼저 되돌려놓지 않았다면…!
하지만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설령 누군가 기억을 되돌렸다고 해도 왜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단 말인가?
그런데 허무극의 생각은 또 다른 듯했다.
그가 침음을 흘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그 누군가가… 마령혼이라면?”
흑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는 곧 대법과 자신이 사용한 기억 조작 술법 그리고 마령혼의 관계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역시 그건 아니야. 마령혼이 대법에 봉인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기억 조작을 깨버렸다? 원리 관계를 일일이 설명하기엔 복잡하지만 분명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어떻게든 허무극의 눈치를 잘 살펴서 살아남아야 한다.
자신이 사용한 기억 조작 술법이 다른 인간에게 깨졌다면, 허무극은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령혼의 짓이라고 판단해버리면?
허무극 조차도 그 존재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의 실수나 능력의 한계를 탓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다.
때문에 흑견은 허무극이 틀린 생각을 하더라도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한편, 허무극은 거의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그가 본 흑운성의 참담한 광경을 이해할 수 있기에.
“정녕 선천마령지기를 취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옹기승이 마령혼을 얼마나 잘 제압하고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 얼마 전 암귀들을 동원해 암습을 가했다.
보고에 의하면 그때는 마령혼이 전혀 나서지 않았다.
한데… 대법을 펼치자마자 마령혼이 나타나다니.
‘쉽지 않군.’
허무극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됐다.
만약 이 사실이 혈사련 무인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꽤나 골치 아픈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옹기승을 제거하자니 마령혼을 상대할 방법이 없지 않나?
‘역시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겠군.’
그가 창밖을 응시하자, 뒤에 서 있던 흑견은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단 목숨은 건진 것이다.
그때, 천장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련주님, 구강룡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흑견과 허무극이 동시에 놀랐다.
보고를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련주의 호신위인 흑효(黑梟)였다.
“구강룡이?”
“예, 조금 전 신생각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신생각은 사비강이 머무는 숙소였다.
“놀랍군. 정말로 구강룡을 깨울 줄이야.”
한편, 흑견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련주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그곳에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고 했다. 단,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사비강이 나타났다고 했지. 설마…?’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때문에 그는 감히 넘겨짚은 그 추측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
산야객잔(山野客棧)은 호명산(呼名山) 아래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체로 손님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 호명산을 넘어 북쪽으로 가는 길손들에게는 산야객잔이 중요한 쉼터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라면 호명산을 늦은 시간에 넘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마치 산기슭에 살던 돈 많은 사람이 심심해서 건물을 올리고 객잔을 지어놓은 것만 같은 곳.
그러다 보니 현판은 강한 바람만 불어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기울어져 있었고, 민가라고는 하나 없는 주변 환경 역시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탁!
낡은 벽을 타고 오르던 벌레 한 마리가 신발 바닥에 짓눌리면서 터져 죽었다.
신발을 벗어 벌레를 때려잡은 주인장은 혀를 차고는 사체를 집어 창밖으로 던졌다.
이제 제법 초겨울로 들어서는지 밤바람이 시렸다.
“쳇, 오라는 손님은 안 오고, 벌레만 나오고 지룰이여? 벌레 새끼들은 얼어 뒤지지도 않는감?”
한껏 성질을 낸 주인장이 막 돌아서서 주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콰당!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기가 휘몰아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온몸이 화들짝 떨릴 정도로 놀랐지만, 그는 얼른 안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정성과 사랑으로 대접하는 산야객잔입니다! 최고급 대우를 받으실 수 있….”
말을 꺼내던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가운 바람을 등지고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남자.
얼굴이 온통 붉은 남자는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린 상태였다.
어디 불구덩이 속에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인지, 거친 숨만 헐떡이며 간신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실패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적면인은 그대로 쿵 쓰러지면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
주인장이 얼른 달려가 적면인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슬렁거리던 그의 행동하고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서도 기광이 서렸다.
“죽진 않았군.”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린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적면인을 어깨에 들쳐 멨다.
그는 비교적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이 층 객실로 향했다.
적면인을 침상에 눕혀 둔 그가 재빨리 양손을 뻗어 가슴에 대고는 혈맥을 살폈다.
기력이 상당히 쇠한 상태.
그는 재빨리 혈도 몇 군데를 점한 다음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우선 총타에 알려야겠군.’
이후 그는 곧 삼 층으로 올라가서 새장에 갇힌 비둘기 한 마리를 꺼낸 다음 전서를 써서 날렸다.
푸드덕!
어두운 밤을 가르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