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
귀환 마교관
303화
마침내 주문이 끝났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옹기승의 반응도 이제는 고요하기만 했다.
옹기승은 제자리에 선 채로 숨을 거두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탁, 촤르르르륵!
그의 사지를 구속하고 있던 사슬 갈퀴들이 일제히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며 여덟 명의 흑의 무인들에게 돌아갔다.
“드디어 끝난 건가?”
구강룡이 목석처럼 서 있는 옹기승을 보면서 조용히 뇌까렸다.
흑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제 저자는 영원한 악몽 속에 갇혀서 허우적거리다가….”
쩌르르르르릉!
쿠아아아아앙!
순간 굉음과 함께 천지가 뒤흔들리는 진동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말을 꺼내던 흑면인은 물론, 옆에 서 있던 구강룡까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성주전 안마당에서 대법을 시전했던 흑의인들 중 몇 명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단순히 땅의 진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지에 격동하는 어마어마한 기의 공명 때문이었다.
곧이어 화끈한 열기가 상단성까지 훅 올라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흑면인이 쓰고 있던 인피면구가 흐느적거리면서 녹아내릴 정도였다.
흑면인이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인피면구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언뜻 자신의 얼굴을 뜯어내는 모습이 무척 괴이하게 보였지만, 구강룡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볼 뿐이었다.
웃는 얼굴을 뜯어내자, 온통 검게 칠한 얼굴 위로 냉혹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역시 그쪽이 훨씬 어울리는군.”
구강룡이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흑면인이 콧방귀를 끼고는 대답했다.
“흥, 만약 우리를 속인 거라면….”
“글쎄,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애초에 중단성과 하단성에는 그쪽 수하들로만 채워져 있지 않던가? 내분이라도 일어난 거 아냐?”
구강룡이 유들거리면서 말하자 흑면인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가 사슬 갈퀴를 쥔 여덟 명의 무인들을 둘러보며 명했다.
“선천마령지체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내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존명!”
여덟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달려가 옹기승을 사슬로 옭아매기 시작했다.
어차피 환옥에 봉인된 옹기승이었기에 달아날 염려는 없었지만, 유사시에 간편히 들고 옮기기 위해서였다.
반면 주문을 읊으며 대법을 펼쳤던 열여섯 명의 흑의인들은 상단성 입구로 달려갔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중단성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가르고 치솟아 오른 용암은 이미 현무암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려서 비탈진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계단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런데 잠시 후,
쾅! 콰콰앙!
“크아악!”
“으악!”
요란한 굉음과 함께 흑의인들 몇 명이 솟구치듯이 튕겨 나오더니 상단성 바닥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흑면인이 눈을 부릅뜨고는 상단성 정문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는 시커먼 연기만 자욱하게 토해져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흑면인이 옆을 힐끗 돌아보았다.
‘웃어…?’
아닌 게 아니라, 옆에 선 구강룡이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했던 짐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흑면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정녕 우리를 배신한 거요?”
“무슨 소리야? 배신이라니. 배신이라는 건 언제나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하는 거라고.”
“뭐라…?”
“한 마디로 강한 내가 약한 네놈들을 상대로 배신할 리가 없잖아. 그저 이용하고 버렸을 뿐이지.”
“뭣이!”
“정말 믿었던 거냐? 내가 아무렴 저 녀석을 너희들에게 거저 주려고 했을까?”
“대체 무슨 속셈이냐!”
“사실 골치 아프던 차였거든. 저 녀석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기에. 그러던 차에 네놈들을 알게 됐고,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거지.”
“이용을 하다니….”
“말했잖아. 이용하고 버리는 것일 뿐이라고.”
“감히!”
“알다시피 저 녀석은 선천마령지기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 녀석의 잠재력이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일단 봉인할 수 있는 건 네놈들밖에 없다고 판단한 거지.”
“노옴! 우리가 네놈 생각대로 놀아날 줄 아느냐!”
흑면인이 버럭 소리치더니 몸을 붕 날려 왔다.
구강룡의 입매가 히죽 올라갔다.
“이미 놀아난 주제에 큰 소리를 치는구나! 꼴사납다!”
그가 순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더니 곧장 내질렀다.
“흐읍!”
흑면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양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방호(防護)!”
쑤아아아앙!
쩌까앙!
일순간 나타난 반투명한 막이 깨져 나가면서 구강룡의 검신이 흑면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
구강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호신강기와는 다른…!’
실드를 알아보지 못한 그가 잠깐 주춤거리는 사이, 흑면인이 뒤로 주룩 밀려난 다음에 한 손을 뻗으며 외쳤다.
“결빙구(結氷球)!”
파밧!
슈우우우욱!
순간 흑면인 앞으로 시퍼런 얼음덩어리가 형성되더니 곧장 구강룡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대체 이게 뭔 장난 짓거리냐!”
퍼카앙!
구강룡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날아드는 얼음덩어리를 쳐냈다.
얼음덩어리가 깨져 나가면서 조각조각 파편이 흩어졌다.
한데 그 순간 구강룡의 검신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손끝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손목에 뻣뻣한 힘이 들어가면서 움직임이 둔해졌다.
찰나,
타앗!
“감히 본교를 배신하다니!”
흑면인이 빠르게 쇄도하면서 구강룡의 복부를 향해 검을 내질러 왔다.
“크익!”
구강룡이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츄앗!
이번에는 흑면인의 검이 구강룡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베며 지나쳤다.
핏줄기가 튀어 올랐지만 구강룡으로서는 다행히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까앙!
한기가 풀리고 나자 다시 민첩성을 회복한 구강룡이 얼른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대각선으로 후려쳤다.
쩌엉!
검을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훅 멀어졌다.
아슬아슬한 일검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노려보면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러는 사이,
저벅저벅.
마침 상단성의 입구로 시커먼 그림자가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흑면인이 이맛살을 팍 구기고는 그쪽을 돌아보았고, 구강룡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성문을 힐끗 보았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한참 기다렸습니다.”
“호오, 날 기다린 건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제 시간에 오시지 못할까 봐 내심 마음 졸였… 음…?”
말을 꺼내던 구강룡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간을 팍 구겼다.
대신 그는 시커먼 연기 속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연기를 뚫고 나온 사비강이 완전히 얼굴을 드러냈다.
그가 히죽 입매를 치켜 올리며 물었다.
“날 기다렸다니 의외로군. 그나저나 수업에는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여기서 날 기다리다니. 대체 무슨 심보지?”
“익…!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구강룡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의 반응에 흑면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뭔 상황이야?’
분명 구강룡은 상대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나?
한데 상대를 보고 오히려 놀라고 있다니.
그 말은 곧 구강룡이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이렷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편, 사비강은 이맛살을 푹 찡그리면서 물었다.
“누구냐니? 기다렸다는 놈이 왜 날 몰라?”
“네놈 따위는 기다린 적 없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흐음. 그럼 다른 누군가라도 기다리고 있었나?”
“시끄럽다! 어째서 너 같은 놈이 여기에 나타난 거냐? 대체 무슨…!”
찰나,
스팟!
“엇…?”
소리치던 구강룡은 물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흑면인조차도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성주전 안마당 복판에 있던 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눈 깜빡할 사이에 사비강은 구강룡의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구강룡이 두 눈을 부릅뜨고 멍하니 서 있는데,
“아무래도 네놈 말버릇부터 계도해야겠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읊조리더니 그대로 주먹을 내뻗는 게 아닌가?
콰앙!
“커억!”
슈우우우욱, 콰다앙!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간 구강룡이 성주전 후원의 정자를 부수며 나뒹굴었다.
사비강이 손을 탁탁 털고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움의 자세도 안 된 놈이군. 감히 교관을 몰라보다니. 그런데…”
사비강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면서 흑면인에게 향했다.
“넌… 누구냐?”
“……!”
흑면인은 그 자리에서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는 듯했다.
‘무슨 사람의 눈이…!’
현재 사비강은 살겁을 일으킨 직후였기에 두 눈동자에 살기가 충만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마계에서 활동할 때 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때문에 그의 두 눈은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냉혹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사비강이 흑면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제길…!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유약한 동물이 맹수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극한의 공포에 질린 초식 동물은 그대로 기에 눌려 오줌을 지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금 흑면인의 심정이 딱 그랬다.
사비강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혼백이 탈탈 털릴 정도로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 이건…!’
격의 차이가 나도 너무나 심하게 난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언제던가?
그래, 마령을 처음 마주했을 때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턱.
마침내 사비강의 손이 흑면인의 어깨에 얹혔다.
흑면인이 움찔 떨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단지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집채만 한 맹수가 까슬까슬한 혓바닥으로 벌거벗은 전신을 핥아 올린 것만 같다.
의념을 기로 형상화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리라.
그때였다.
“노옴! 물러나지 못할까!”
“뒈져라앗!”
옹기승의 신변을 챙기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면서 사비강에게 쇄도했다.
찰나, 정신을 퍼뜩 차린 흑면인이 소리쳤다.
“안 돼! 물러…!”
“늦었다. 소닉 바이브레이션.”
양손을 펼치며 싸늘하게 중얼거린 한 마디.
다음 순간,
촤촤촤촤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열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추락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참혹한 죽음이었다.
혈육이 비산하는 광경이 흑면인의 시야에 느릿하게 지나갔다.
사비강이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속의 바람으로 전신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마법이지.”
“히끅.”
흑면인이 체면불고하고 딸꾹질을 했다.
‘이자는… 괴물이다!’
공포로 인해 머릿속이 돌처럼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들어서 흑면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흑면인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덜덜 떨기만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대가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주길 바라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너 이 개새끼! 까불면 죽여 버린다!”
악을 쓰며 날아드는 자가 있었으니.
정자를 부수며 나뒹굴었던 구강룡이 다시 허공을 가르며 도약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