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귀환 마교관
282화
까앙!
금속성과 함께 노회군이 훌쩍 물러났다.
‘끄음.’
그가 침음을 흘리며 사비강을 빤히 노려보았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곧이어 사비강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형편없군.]
‘이익…!’
노회군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비무가 시작된 후로 사비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전음을 보내 왔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하지만 사비강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역시 분타주님의 무공은 대단합니다. 제가 도저히 뚫을 수가 없군요.”
‘큭…!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노회군은 알고 있었다.
지금 사비강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만약 사비강이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자신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데 사비강은 아까부터 겉으로는 감탄을 뱉으면서, 속으로는 노골적인 무시를 보내오지 않나?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무공을 펼쳐서 찍 소리도 못하도록 눌러 주고 싶은데….
‘제길!’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벌써 삼십여 초를 겨뤘지만 도저히 검로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사비강은 여유가 넘쳤다.
더 놀라운 것은 사비강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쯤에서 체면을 챙기고 그만두고 싶은데, 너무 짧다.
적어도 백여 초는 겨루고 나서야 검을 거둬도 체면을 차릴 수 있으리라.
타앗!
“헛!”
이번에는 사비강이 먼저 도약하며 노회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노회군이 얼른 보법을 밟으며 검을 마주쳐 갔다.
까앙!
스가앙!
검과 부딪친 베르타스가 검신을 타고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노회군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제길! 이렇게 간단히…!’
이대로라면 베르타스에 목이 베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물론, 제아무리 사비강이 괴짜라고 할지라도 분타주의 목을 벨만큼 사리분별이 안 될 인간은 아닐 것이다.
다만 목 끝에 검신을 들이밀고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 노회군의 체면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리라.
그런데…
‘음?’
검신을 타고 뻗어 오던 베르타스가 아슬아슬한 차이로 목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노회군이 검을 피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노회군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내가 피한 게 아니다!’
역시 사비강은 자신에게 한 수 접어 주고 있는 거다.
아니, 어쩌면 두 수, 세 수 접어 주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 사비강의 전음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응천 분타주라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실망이 크군.]
‘니미럴…!’
노회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비강이 겉으로는 극진히 예를 다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수하들과 신생조는 비무를 지켜보면서도 그 속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회심의 일격을 피하시다니 과연 놀랍습니다.”
“커흠, 과, 과찬이오.”
[그렇겠지.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테니.]
[이익…!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오!]
[뭐가?]
[겉으로는 예를 다하는 척하면서 어째서 전음으로 내 심기를 어지럽히는 말들을 자꾸 쏟아내는…!]
[아,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난 또 분타주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중한 거였는데. 그렇게 원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잠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지만 이미 사비강의 입이 열리고 있었다.
“응천 분타주는 대체 무공 수준이 왜 이 모양….”
“하하하! 과연 대단하오! 내 사 교관의 무위에 깊이 감탄했소!”
노회군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재빨리 검을 휘둘러 갔다.
쉬이이잇!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검이 그대로 사비강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사비강은 몸을 가볍게 뒤트는 동작만으로 노회군의 검을 피해냈다.
그야말로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동작.
노회군이 눈을 부릅뜨며 휘청거리는 사이, 사비강이 다시 한 번 베르타스를 베어 들어왔다.
이번에야말로 옆구리가 그대로 베일 상황!
‘제길…!’
노회군이 성급했던 점을 뉘우치며 얼른 보법을 밟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순간 베르타스가 옆으로 슬쩍 빠지면서 옷자락만 베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역시 무척이나 자연스러웠기에 노회군은 사비강이 실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스쳐 지나가는 사비강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이익…! 또 봐주고 있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지만 확실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사비강과 노회군의 대련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사비강도 여러 번의 위기를 넘기는 듯했고, 노회군 역시 아슬아슬하게 방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
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전음으로 인해 노회군의 자존심은 오래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내막까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무위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몇몇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적무린과 맹가숙도 있었다.
맹가숙이 나직이 읊조렸다.
“정말… 교관은 무서운 자군.”
“분타주를 아이 다루는 듯 하군.”
적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적무린은 사비강의 태도가 다소 이해되지 않는 듯 말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분타주의 체면을 지켜주려는 거지?”
그러자 맹가숙이 피식 웃었다.
“당신다운 의문이군.”
“무슨 말인가?”
“당신은 지금까지 눈에 거슬리는 자라면 모조리 섬멸해 버리지 않았소? 특히 정도인이라면 더욱 그랬지.”
“부정하진 않겠다.”
“그렇게 생각 없이 검만 휘둘러대니 교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수밖에.”
적무린으로서는 기분 나쁠 만도 한 발언이었지만, 묵묵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는 맹 영감은 알겠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알지. 이 나이가 먹도록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반쯤 구렁이가 되거든.”
“그래서 교관이 저러는 이유는?”
“가진 게 있는 자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보다 다루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오.”
“그렇다는 말은 분타주가 가진 것이….”
“저 빈약한 자존심이지. 교관은 그걸 지켜주고, 대신 그를 마음대로 부리려는 속셈일 거요. 지금쯤이면 분타주 역시 자신이 언제든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
“과연 그렇군. 그나저나 남들은 넋 놓고 보는데 영감은 잘도 간파하고 있었군. 교관이 분타주를 가지고 논다는 걸.”
“흥, 이래봬도 한때는 당신만큼 강했던 몸이었소. 비록 독에 당해서 이 모양이지만. 다행히 내 눈은 썩질 않았지.”
적무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충분하지 않나?”
“뭐가 말이오?”
맹가숙이 미간을 구기고 적무린을 돌아보았다.
적무린은 여전히 사비강과 노회군의 대련을 지켜보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교관이 영감을 조장으로 지목한 이유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히 답이 되는 것 같은데. 나라도 영감을 조장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으니까.”
그제야 적무린이 무심한 듯 맹가숙을 돌아보았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맹가숙이 실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보니 나보다 더한 구렁이가 여기 있었군.’
한편, 그러는 사이 사비강과 노회군의 대련은 슬슬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회군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심호흡을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는 사비강이 일부러 공격을 느슨하게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기회를 주는 거다.
자연스럽게 검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아니나 다를까 사비강이 전음을 흘려 왔다.
[어떤가? 계속 해 볼 건가? 체면을 지키고 싶다면 이쯤에서 기회를 줄 생각인데. 선택하라고.]
사비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그의 눈빛이 말했다.
이 기회를 잡지 않겠다면, 가차 없이 망가뜨려 주겠다는.
결국 노회군은 아직 놓치지 않은 그 자존심을 더욱 세게 움켜쥐기로 했다.
“후우우. 과연 대단하오. 사비강 교관께 한 수 배웠소.”
자연스럽게 검을 거둔 노회군이 포권을 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비강 역시 예를 갖추었다.
“별 말씀을. 노 분타주에게 한 수 배웠소.”
“하하! 겸손하시구려. 그럼 앞으로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내게 말씀해 주시오. 성심껏 협조하도록 하겠소.”
“배려에 감사드리오.”
사비강은 끝까지 노회군의 체면을 챙겨 주었다.
물론, 그 체면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목줄인 셈이었다.
앞으로 노회군은 사비강을 볼 때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굴 것이다.
맹가숙은 반듯하게 예를 갖추는 사비강을 보며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저런 모습을 보면 무서운 자라니까. 마치 수십 년은 살아 온 사람처럼 능글맞지 않은가?’
본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한데 사비강은 실천해야 할 순간이 오면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뀌지 않는가?
결국 맹가숙은 사비강이 숙소 안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저런 자를 말로 이길 수는 없지. 관두자, 관 둬.’
**
우우우웅.
추량의 손바닥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검은 돌덩이로 끊임없이 전달됐다.
누군가 보았다면 아까운 내공을 왜 돌덩이에 쏟아 붓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광경이다.
하지만 추량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확실히 최근 들어서 마나 운용이 좀 수월해지는 것을 느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비강에게 플라탄의 알을 받고 나서부터다.
처음에는 사비강이 준 이 돌덩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비강이 하는 말이 너무 허무맹랑하게만 들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자신을 놀려 먹길 좋아하는 사비강이었기에, 또 괜히 속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 것이다.
그래도 한 번 속는 셈 치는 생각으로 돌덩이에 마나를 주입해 보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다 보니 조금씩 몸에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제일 먼저 효과를 본 것은 지난 번, 하오문을 찾아갔을 때였다.
처음 실전 아닌 실전을 벌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마나 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필살기까지 익히지 않았나?
추량은 그 필살의 기술에 이름을 붙였다.
파기검(破氣劍).
하나의 검으로 형상화 된 마나를 산산조각 깨트려서 폭파시키는 기술이기에 붙인 이름이다.
파기검의 위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때문에 추량은 그날 이후로 틈만 나면 파기검에 대한 수련을 했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 닥쳐서 저절로 발동되었을 때와는 달리, 수련 중에는 뜻대로 잘 되진 않았다.
그러다가 이틀 전부터 제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됐는데, 사비강의 말대로 파기검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 마나 검을 형성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연되곤 했다.
어쨌거나 그나마도 수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나의 운용이 좀 더 자연스러워지고 체내의 마나 량도 그만큼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 녀석 때문이겠지.’
추량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시커먼 돌덩이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그저 알처럼 생긴 돌덩이로 보이는데, 단순히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니.
오히려 마나가 소모되어야 할 상황임에도 마나가 불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플라탄의 알이 너무 일찍 부화할까 봐 걱정이다.
‘이 녀석이 부화해 버리고 나면 더 이상 내 마나 량을 늘리기도 힘들어지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비강의 말이 틀림없다면 언젠간 부화를 할 테니.
‘그나저나 어떤 녀석이 나올까? 용 같은 게 튀어나오려나? 아니면 커다란 매 같은 게 나와도 멋있긴 하겠군.’
그렇게 얼마나 집중을 하며 마나를 퍼부었을까?
“……!”
추량이 움찔거리고는 플라탄의 알을 바라보았다.
‘방금…?’
분명히 뭔가 느껴졌다.
손바닥에서 뿜어진 마나는 그대로 알에 주입되고, 알에서 뿜어지는 마나는 그대로 추량의 가슴으로 들어온다.
보통 타인에게 진기를 주입할 때, 등에 손을 대는 것처럼, 플라탄의 알은 마치 추량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한데 조금 전.
‘뭔가… 파도 같은 것이….’
가슴으로 훅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엇!”
이번에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또 느꼈다.
우우우웅.
때마침 알이 공명하듯 떨렸다.
‘뭐, 뭐야? 부화하려는 건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동시에 혈맥을 따라 휘도는 마나 량이 대폭 늘어난 것을 느꼈다.
마치 체내의 마나가 플라탄의 알과 공명하듯 웅장한 울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야?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야?’
공명하던 알은 다시 잠잠해졌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동조차 없었다.
이리저리 운기 방식을 바꿔 가며 마나를 주입해 보았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휴우.”
이윽고 마나 주입을 그만 둔 추량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손으로 플라탄의 알을 툭툭 쳐보았지만 마찬가지.
“이러다가 갑자기 뭔가 팍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뜻밖에도 요상한 괴수가 튀어나와서 자신을 단숨에 잡아먹어 버리기라도 하면 꽤나 난감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밖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허공에서 음침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주군께서 찾으신다.”
흑귀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제 천신교를 토벌하러 갈 거다.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