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귀환 마교관
277화
내공이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천상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였기에 어딘지 영험한 느낌이 들었다.
추량이 움찔거리고 돌아보자 사비강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돼.”
“알겠습니다.”
추량이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걸음을 성큼 옮겨 갔다.
‘사부님이 함께 있는 한 두려울 건 없다.’
그렇게 돌담길을 따라 가는 동안 다양한 기관 장치가 발동됐다.
어쩔 때는 돌담에서 느닷없이 창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또 어쩔 때는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히기도 했다.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기관진식이었다.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이 함정이 기관장치보다는 진법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암기가 날아오거나, 창이 튀어나오는 것은 기관의 작동이었지만, 벼락이 떨어지거나 갑자기 불이 피어오르는 것은 진법의 작용이었다.
물론 벼락이나 화마(火魔)는 실존하는 것이 아닌, 환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무시했다간 정말로 감전사하거나 화상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함정이 나타날 때마다 추량은 기를 쓰고 막았다.
그동안 플라탄의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성과가 있는 것인지, 확실히 마나 운용 실력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해가 저물고 별이 뜨더니, 어느새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추량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부님.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겠어요.”
“괜찮으니까 계속 가.”
“하지만 그 목소리가 말한 것처럼 평생을 이 진법 안에서 헤매다가 죽으면 어쩝니까?”
“장례는 잘 치러줄 테니 걱정 마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욧!”
추량은 발끈하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결국 그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꾸드드득. 꾸득꾸득.
어디선가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 왔다.
“무슨 소리지?”
추량이 미간을 좁히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돌담길일 뿐이었다.
그런데,
“엇?”
돌담 사이에서 시퍼런 줄기가 자라 나오는 게 아닌가?
꾸드드드득!
“헉! 이게 뭐죠?”
“나도 모르지. 적어도 감상용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알면서 왜 묻냐?”
“헉!”
추량은 더 이상 말다툼을 할 여유가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식물 줄기가 마치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면서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젠장!”
쑤아아아앙!
추량의 오른손에서 마나 검이 형성됐다.
“하앗!”
그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자신에게 날아들던 줄기를 쳐냈다.
서컹!
과연 마나 검은 예리했다.
사실 이는 마나 숙련도에 따라서 그 예기가 달라지는 법인데, 그동안 수련한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수컹! 수커컹!
추량은 연신 몸을 뒤틀며 사방팔방에서 쇄도하는 식물 줄기를 마구 쳐냈다.
꾸드드득! 쉬이이익!
“제길, 지긋지긋하군!”
서컹! 서커컹! 서컹!
잘려 나간 식물 줄기는 마치 연체동물처럼 꿈틀거리다가 한참 후에 저절로 소멸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녀석들이 소멸되면서 진득한 녹진(綠津)을 남겼는데, 그것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치이이이익…!
“큭! 설마 독…?”
“피독주를 복용해라.”
사비강의 지시에 추량이 얼른 피독주를 깨물었다.
쌉싸름한 맛이 입안을 타고 퍼져나갔다.
이는 당이협이 만든 것이었다.
독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가에서 만든 것이니, 어지간한 독은 방어가 될 터였다.
수칵! 서컥!
파짓… 치짓…!
사방에서 날아드는 줄기를 쳐내던 추량은 점점 마나 검이 힘을 잃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검신의 예리함 역시 이전만 못했다.
이제는 줄기를 베어내는 것이 아닌, 쳐내는 기분이 들었다.
뒤따르는 사비강이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댔지만,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집중도 할 수 없었다.
“헉, 헉, 헉…! 사부님…! 아무래도 제가 모든 줄기를 막아내긴… 힘들 것 같습니다…! 몇 개는 놓칠 수도 있으니… 헉, 헉… 사부님도 조심하십….”
말을 꺼내며 사비강을 힐끔 돌아본 추량은 벙 찐 얼굴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막아내고 있는데, 사비강은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로 구경만 하는 게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사비강을 향해 뻗어 가는 줄기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뭐, 뭡니까?”
“뭐가?”
사비강이 능청스럽게 되묻자, 추량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왜 이것들이… 헉, 저만 공격하냐고요?”
“그걸 나한테 따지면 어쩌냐?”
“헉, 헉…! 전 죽을 만큼 힘든데…!”
“힘내라.”
“으익…! 그렇게 놀고 계셨던 거라면 헉, 헉… 절 좀 도와주시면… 좀 좋습니까!”
말을 뱉은 추량이 다리를 휘어감아 올라오는 줄기를 발로 밟아 버리면서 터뜨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음, 이젠 마나와 내공의 운용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 같구나.”
“정말 너무하신다고요!”
추량이 마지막으로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정면에서 날아드는 커다란 줄기를 향해 마나 검을 뻗었다.
그 순간,
쉬이이잇! 퍼카앙!
마나 검이 줄기를 가르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 나더니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슈카카카카카칵!
그 바람에 추량을 향해 쇄도하던 줄기들이 마나 검의 파편에 맞으면서 힘을 잃고는 바닥에 늘어졌다.
“헉, 헉, 헉…?”
추량이 무릎을 쥐고 헛구역질까지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그건 뭐지?’
마나 검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낀 순간, 꼼짝없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그대로 마나 검이 소멸될 줄 알았기에.
한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나 검이 조각조각 깨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게 아닌가?
비록 마나 검은 그렇게 소멸됐지만, 사방에서 달려들던 줄기들을 전부 처리했으니 실보단 득이 컸다.
어차피 소멸될 검이었으니 말이다.
추량은 주변을 겨우 둘러본 후에 그대로 큰 대자로 뻗어 버렸다.
“후우, 후우, 후우! 죽을 뻔 했네.”
“수고했다.”
사비강이 다가와서는 추량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필살기를 익혔구나.”
“필살… 뭐요?”
“마지막 순간에 네가 사용한 것은 일종의 필살기다. 무의식중에 사용한 것 같은데, 그 감각을 잊어버리지 마라. 단, 그 기술을 사용하면 내공이나 마나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마나 검을 형성하는데 시간이 다소 지연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필살기답게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되겠지.”
추량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데, 마침 어제 들었던 목소리가 또 다시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겨우 살아남은 걸로 자만하지 말라. 그대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이제 그쯤 하지?”
사비강이 귀를 후비며 툭 던지듯 말을 뱉었다.
“뭐, 뭐라?”
목소리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사비강이 주변을 휘이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정도 되면 너희들의 진법이 나한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 그건…!”
“이제 슬슬 지겨워져서 말이야. 뭐, 내 제자를 더 수련시켜 주겠다면 굳이 마다하진 않겠지만.”
“…….”
목소리가 침음을 흘렸다.
추량은 지금 사비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몸을 일으키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수련이라니요? 아니, 그보다 진법이 안 먹힌다니요?”
“너도 봤잖아. 아까 그 식물들이 너에게만 달려드는 걸.”
“그, 그건 그렇지만… 그럼 설마 사부님은 지금까지 모든 함정이 사부님에게 통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다만, 기관 장치는 진법과 달리 실재하는 거니 막든, 피하든 해야겠지만.”
“맙소사….”
추량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왠지 억울한 기분이었지만,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사비강의 말로 유추해 보면, 이곳에 들어와서 자신을 앞장서게 한 것은 전부 수련의 일환이었으리라.
‘그럼 설마….’
추량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혹시 사부님은 이 미로를 벗어날 방법을 아시는 겁니까?”
“미로라고 할 것도 없다. 난 저기 두 사람이 바로 보이니까.”
“예? 어디요?”
추량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답답한 돌담이 전부였다.
하지만 사비강의 말에 목소리는 적잖은 동요를 느끼는 듯했다.
“끄음. 설마 진법에 전혀 걸리지 않을 줄이야. 과연 대단하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의 돌담들이 갑자기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말끔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어스름하게 떠오르던 동녘 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큼이나 밝은 대낮이 되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추량이 헛바람을 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앞에는 허름한 집이 있었고, 주변은 싸리 울타리로 둘러져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후로 실제 흐른 시간은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예에?”
추량이 놀라서 소리쳤다.
하루를 다 보내고 밤을 꼬박 지새웠는데, 겨우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고?
사비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보부상이 어째서 그렇게 신출귀몰했는지 이제야 알만하군.”
“초면에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하오. 안으로 들어오시오.”
마침 허름한 집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때처럼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거나, 천상의 목소리처럼 울리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
사비강과 추량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탁자를 두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이 일어나며 포권을 했다.
“어서 오시오. 난 하오문의 총관 정류광(鄭流廣)이라 하오. 여기 계신 분은 하오문주님이시오.”
“하오문주, 왕이(王彝)요.”
보아하니 그 목소리의 주인은 총관인 정류광인 듯했다.
사비강과 추량도 간단히 소개를 마치고는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정류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초면에 결례를 저질렀소.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하오.”
“스스로 결례라고 인정하면서도 그저 이해만 해달라니. 무뢰배와 같은 방식이군.”
사비강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정류광과 왕이는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다소 당황하는 듯했다.
이윽고 왕이도 빈정이 상한 듯 툴툴거리듯 대꾸했다.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소. 정보를 공유할 만한 자인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소이다.”
“언제부터 하오문이 그렇게 도도해졌는지 모르겠군. 정보력 하나 믿고 쥐새끼처럼 숨어만 다니던 문파가 아니었나? 뭐, 어쨌거나 덕분에 내 제자가 수련은 잘 했지만 말이야.”
이쯤 되자 비교적 점잖게 대화를 이어 가려던 정류광도 발끈해서 말했다.
“비록 하오문이 보잘것없는 곳이라고는 하나, 어찌 이리 면전에서…!”
“하나 묻자.”
“……?”
“그 진법을 내게 펼치고자 했을 때는 어떤 기분으로 시험한 거지?”
“그건….”
“당신 말대로 영원히 헤매다가 죽어 갈 것까지 감안했을 터.”
“끄음.”
정류광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사비강의 내공이 이처럼 심후하지 않았더라면, 진법이 그렇게 허무하게 깨지진 않았을 터였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때 너희들이 가진 마음가짐과 똑같은 심정으로 지금 너희들을 보는 거다.”
“무슨 말이오?”
“너희들이 내 무위를 시험했듯이, 나 또한 너희들의 정보력을 시험하고자 한다. 만약 그 정보력이 내 성에 차지 않는다면…”
꿀꺽.
“…않는다면?”
“너희 둘은 여기서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할 거다.”
콰앙!
참다못한 왕이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소화루에 들러 간청했다기에 기껏 도움을 주려고 만나 주었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네놈은 내가 뭐로 보인단 말이냐!”
하지만 다음 순간 왕이는 눈을 부릅뜨고는 마른 침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는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목울대에 와 닿은 베르타스가 있었기에.
놀랍게도 베르타스는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상태였다.
한데 더욱 경악할 일은 베르타스 자체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점이다.
마치 검신이 저 혼자 의지를 가져서 피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도대체 이건… 뭐…?’
왕이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데, 사비강이 싸늘하게 말했다.
“닥치고 앉아. 물어볼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