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귀환 마교관
217화
퉁퉁 부어 오른 눈, 솜뭉치를 입에 문 것처럼 빵빵하게 부푼 뺨, 찢어진 입술과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몸.
산발한 머리카락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그야말로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비참한 모습을 한 진조영이 어눌한 발음으로 겨우 말을 흘렸다.
“살려…주십시오…. 잘못…해씁니다.”
그의 두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종이 상단에는 ‘마음의 소리’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비강이 종이를 가져가서 품에 접어 넣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적은 이 마음의 소리는 잘 접수하겠다. 내일부터는 수업에 꼬박꼬박 참여하도록.”
“명, 명심…하게씀미다….”
겨우 말을 뱉어낸 진조영이 그대로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의 곁으로는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맹가숙 무리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 같이 진조영과 비슷한 꼴이었다.
“쯧쯧. 그러게 두드려 맞기 전에 정신 차리면 얼마나 좋아?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것들이 있다니까.”
사비강이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바위에 엎어져 있는 맹가숙에게 다가가더니 구절창을 쑤욱 뽑아냈다.
스르르륵, 털썩!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쓰러진 맹가숙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출혈 과다로 인해 이미 의식을 잃은 지는 오래였다.
“쯧. 손이 많이 가는 영감이군.”
사비강이 라겔의 주머니에서 힐링 포션 대용량을 꺼내 들었다.
대용량 포션은 단순히 양이 많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 효능도 작은 것에 비하면 훨씬 좋다.
‘이 귀한 걸 이딴 것들에게 쓰다니….’
물론 다 쓰진 않을 거다.
딱 불구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사용한다.
나머지는 스스로 회복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다.
마개를 뽑자 오묘한 향이 퍼져 나왔다.
중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영약이 아닌 만큼 냄새 또한 독특했다.
쪼르르르.
치이익!
붉은 액체를 관통된 부위에 쏟아 붓기 시작하자, 마치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간다.
“끄으윽…!”
맹가숙이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적당히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확인한 사비강이 이번에는 맹가숙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입안으로 액체를 부어 넣었다.
꿀럭. 꿀럭.
맹가숙의 목구멍을 타고 붉은 액체가 계속해서 넘어갔다.
‘잘도 처먹는군.’
사비강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대용량 힐링 포션을 절반이나 비우고 나자, 맹가숙의 혈색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듯했다.
마나 포션을 줘서 공력을 보강해 줄까도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마나를 다룰 줄 모를 테니 복용해 봐야 별 효력도 없을 것이다.
‘뭐, 이만하면 되겠지.’
사비강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
칠주야가 흘렀다.
맹가숙 무리가 사비강에게 제압당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맹가숙 무리는 사비강의 배후에 살막이 있다고 떠들어댔지만,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막이라니… 쪽 팔린다고 아무렇게나 지어대는군.”
“그러게 말이야. 당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니면 어디서 고용한 삼류 무사들이 살막 흉내를 낸 거겠지.”
“그나저나 궁금하긴 하네. 도대체 그 교관이 어떤 자인지.”
덕분에 불참자들 다수가 사비강에 대한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초라했던 연무장과 연무실이 싹 바뀌었다고 하니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결국 불참자 다수가 연무장을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선 완전히 바뀐 연무장의 분위기에 놀랐다.
그야말로 야산의 공터와 같았던 연무장이 지금은 제법 번듯한 정원까지 갖춘 호화 시설로 변해 있었다.
연무장 한쪽에는 연습용 병기구의 거치대도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와 연못도 있었다.
바닥은 잔디로 되어 있는 곳도 있었고, 대리석으로 다듬어져 있는 곳도 있었다.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바꾸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된 거야?’
모두들 같은 생각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연무장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디 그뿐이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교관의 숙소는 천상궁 내의 어떠한 건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것을 전부 자비로 처리했다는 사실!
단 한 푼의 지원금도 없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재력이 아닌가?
어쨌거나 이러한 변화가 생도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연무장에 북적이는 생도들을 보며 적무린은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비강이 사용한 방식이 옳든, 그르든.
그는 분명 생도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겨우 한 명의 생도가 있었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생도가 있긴 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세 명.
그 중 한 명은 살풍단주(殺風團主)를 지내다가 사고를 쳐서 흑기대주(黑氣隊主)로 강등당한 이력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사고를 쳐서 조장 직위로 강등됐는데,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켜 이곳 생도로 배정받은 자였다.
어쨌거나 그를 비롯한 삼 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도들이 연무장에 모인 셈이었다.
칠주야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연무장에 모여 웅성거리던 무인들은 마침 사비강이 연무실 문을 열고 나타나자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별 것 아닌 반응이었지만, 이마저도 적무린은 신선할 지경이었다.
‘이들이 떠드는 것을 멈추게 하다니.’
그것도 단지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이들은 눈앞에서 친지가 죽어 나가도 눈길 한 번 두지 않을 정도로 냉혈한 자들이다.
한데 사비강은 그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저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후우우웅!
때마침 연무장에 바람이 불었다.
직후 찾아온 고요함.
생도들은 호흡도 멈춘 채 사비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제대로 된 첫 수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없게도 신축 건물이 완공되었고, 생도들도 단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여했으니.
적무린이 먼저 사비강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일렀다.
“세 명이 불참했습니다.”
“누구지?”
“설수민(雪水敏), 설서린(雪瑞隣), 구강룡(九强龍)입니다.”
“구강룡이면… 살풍단주였다던 그자인가?”
“그렇습니다. 조장까지 밀려났다가 이곳 생도로 배정받았습니다.”
“흠. 알겠어. 그놈들이 마지막이군.”
“그들은….”
“음?”
적무린이 내심 자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포기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들만은 절대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거라고.
한데…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방각을 수업에 참여시킬 줄 몰랐고, 유송령과 석탄강을 데려올 줄 몰랐다.
거기에 맹가숙 일행에 이어 이렇게 많은 무인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았다.
왠지 앞으로도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강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이제 연무장에서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사비강이다. 너희들을 가르칠 교관이다. 물론 알고 있겠지?”
마침내 사비강이 입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생도들 사이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호기심에 혹은 능력을 인정하여 오긴 했지만, 정파 무인에 대한 순수한 호승심은 감출 수 없었다.
사비강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래, 좋아. 이런 분위기. 나쁘지 않아. 그만큼 분발할 테니까.”
그때 누군가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당신이 그렇게 강한가?”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한 사내였다.
그는 권법을 익힌 권사였는데, 혈기권왕(血氣拳王)이라는 별호를 가진 백공보(柏公保)였다.
사비강이 그를 빤히 보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강하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묵이 깨지면서 술렁거렸다.
아무리 교관이라지만, 이렇게 많은 사파의 무인을 앞에 두고 정파 무인이 저렇게 오만하게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백공보가 오른쪽 어깨를 우두둑 소리 나도록 돌리면서 말했다.
“얼마나 강하지?”
“아주 강하다.”
“흥! 주둥이만 산 건 아닌지 모르겠군.”
“교관에 대한 말버릇이 안 좋구나. 이리 올라와라.”
“기다렸던 바다!”
백공보가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쿵쿵거리며 걸어 나갔다.
무인들 모두 흥미로운 표정으로 백공보를 지켜보았다.
마침 백공보가 단상 위로 오르자 사비강이 그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잘 단련된 몸이군. 하지만 지나치게 외공에 집중되어 있다. 내공 운기에도 좀 더 공을 들이도록.”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누가 언제 당신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했나?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증명해라!”
“어떻게 증명할까?”
“나와 주먹싸움을 하는 게 어때?”
백공보가 오른쪽 어깨를 휙휙 돌렸다.
그럴 때마다 붕붕 소리가 울렸다.
주먹싸움이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서로에게 주먹을 내질러 부딪치게 하는 것이다.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쳐서 어느 한쪽이 주먹을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패배를 시인하면 승패가 가려진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지.”
그러자 장내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뭐야? 온갖 강한 척을 다하더니 결국 쫄아 버린 거 아냐?”
“하긴. 혈기권왕과 주먹싸움이라니. 피할 만도 하지. 보아하니 검을 쓰는 것 같으니.”
“그래도 교관이라면 주먹으로도 이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사실은 실력이 좆도 없는 것 아냐?”
온갖 야유가 쏟아지는 데도 사비강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공보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권법만큼은 내가 우월한 것 같군. 그럼 나도 이제부터 당신의 생도가 아니라 권법 교관이 되겠다.”
“나참, 그게 뭔 헛소리야?”
사비강이 귀를 파며 툭 내뱉자, 백공보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뭔가 착각하나본데 내가 주먹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건 네놈의 그 귀여운 주먹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다.”
“뭐라?”
“안 그러면 네 주먹이 그대로 아작 날 테니까.”
“하! 하하하하! 역시 정파 놈들은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뜬다더니!”
“내 제자 중에 곡보옥이라는 녀석이 있거든? 그 녀석이 너하고 주먹싸움을 해도 네 주먹은 아작 난다.”
“헛소리 작작하고 붙어!”
“정 원한다면 뭐 붙어 주지. 단, 나는 이걸로 싸우마.”
사비강이 검지를 펴서 보여주었다.
“손가락…으로?”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공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자신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감히 권법을 익힌 권사 앞에서 손가락을 들이대?
이거 제대로 미친놈이 아닌가?
“오냐, 네놈이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 싶다면 마음껏 즐겨라! 어디 그 손가락이 부러져 나가도 그 주둥이가 살아서 떠드는지 보자!”
“역시 넌 계도가 필요하군. 좋아, 그럼 시작하지.”
사비강이 백공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 마주섰다.
적어도 덩치 하나는 백공보가 사비강보다 훨씬 컸다.
사비강을 빤히 내려다보던 백공보가 뺨을 씰룩이다가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시작할까?”
“좋다! 후회나 하지 마라!”
백공보가 버럭 외치면서 주먹을 강하게 내질렀다.
사비강은 예의 그 나른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쭈욱 뻗었다.
다음 순간,
쩌어엉!
주먹과 손가락이 부딪쳤다고는 생각되기 힘들만큼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나지간 백공보는 두 눈을 부릅떴다.
‘크읍! 내 주먹이…!’
아니다.
주먹뿐만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부서져 나가는 것만 같다.
마치 ‘쩌저저적!’ 하면서 뼈마디가 조각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슈우우우우우웃! 꽈아앙!
놀랍게도 백공보가 포탄처럼 튕겨 날아가더니 저만치 담벼락에 처박히는 게 아닌가?
푸스스스스…!
담벼락을 무너뜨리며 쓰러진 백공보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