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귀환 마교관
215화
발 아래로 개미가 지나간다고 해서 신경 쓸 사람은 없을 터.
독고진에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인부들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해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데…
천상궁으로 오르는 계단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커다란 통나무를 들고 있거나, 각목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를 짊어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행렬을 본 독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들은 누구냐?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것이냐?”
“여기가 천상궁이라는 건 압니다요.”
“한데 무슨 일로 온 것이냐?”
독고진의 말에 사내가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일하러 온 겁니다. 천상궁에서 부르지 않았습니까?”
“천상궁에서? 누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저희들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자재를 나르고 공사를 시작하려고 할 뿐입니다요.”
“공사라고? 대체 무슨 공사를?”
독고진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반조를 돌아보았다.
반조 역시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다시피 토목공사입니다요. 그러니 빨리 길 좀 비켜 주십시오. 이렇게 앞줄에서 지체하고 있으면 뒷줄은 더 큰 곤욕입니다요.”
“크흠.”
독고진이 마지못해 옆으로 물러났다.
거대한 통나무를 짊어진 일꾼들이 줄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원….’
독고진이 그들을 멍하니 보다가 곧 그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뚝딱뚝딱. 쿵! 쿵!
공사 소리가 숲을 온통 차지했다.
여기저기서 고함지르는 일꾼들도 보였다.
독고진이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등을 때렸다.
“아, 독고 당주님 아니십니까?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돌아보니 사비강이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독고진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지듯 물었다.
“사 교관!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보다시피 공사 중이오만.”
“아니, 그걸 누가 모르고 묻는 거요?”
“아시면서 그럼 왜 묻소?”
“이익…! 내 말은!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이런 공사를 한단 말이오?”
“아, 제가 지낼 숙소와 연무실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재건축을 좀 할까 싶어서 진행했소.”
“도대체 그런…!”
“아, 걱정 마시오. 공사비는 따로 청구하지 않을 생각이니. 혈사련 입장에서도 좋은 일 아니겠소? 훗날 내가 돌아가고 나면 번듯한 건물 한 채 공짜로 생긴 셈이니까. 아, 연무실까지 하면 두 채가 되겠군.”
“그러니까, 누구 맘대로 그런…!”
“하하하! 너무 감사할 필요 없소. 이게 다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사양하지 않아도 되오.”
독고진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사비강을 바라보기만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대화도 어느 정도 통해야 묻고 따질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숙소와 연무실을 이렇게 큰 규모로 짓다니.
정도맹에서 돈을 대주는 건가?
그럴 리가.
정도맹이 미치지 않고서야 혈사련의 천상궁에 건물을 지어 주진 않을 터.
‘설마… 자비로? 이 많은 인부들과 ?’
하면 도대체 사비강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 있단 말이지?
물론 사비강은 아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번 동방세가에서 챙긴 금괴만 해도 평생을 써도 다 소진하기 힘들 만큼 많은 금액이었다.
그러니 이런 재건축 정도는 그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뚝딱. 뚝딱. 쿵쿵쿵!
숲속에서는 연신 공사 소리가 울려댔다.
**
“보셨습니까? 사비강 그 작자가 하는 짓을?”
독고진이 탁자를 짚고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류여중이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총군사!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흐음. 확실히 뜻밖의 상황이군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건물 높이는 흑룡전만큼이나 높습니다! 아니, 지대가 원래 높다 보니 더 높습니다! 이건 천상궁에 대한 도전 행위입니다!”
“하하하. 그렇게까지 해석하는 건 좀 억지가 아니겠습니까?”
“억지라니요! 제가 이런 꼴을 보려고 그 작자에게 그런 숙소를 주자고 제안하신 줄 압니까?”
“그러게 처음부터 제대로 된 숙소를 제공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류여중이 짐짓 따지는 듯 말하자, 독고진도 그제야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애초에 사비강에게 허름한 숙소를 제공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에.
그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승에 계신 악 당주께서 이 사실을 본다면 통곡을 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악천괴는 버젓이 살아 있으며, 이미 사비강의 행동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그로서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류여중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그를 달랬다.
“어차피 자비를 털어서 건물을 짓는 거니까 굳이 말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대로 본련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언젠간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곳에 남지 않게 된다면, 그 건물은 오롯이 우리 몫이 되지 않겠습니까?”
“끄음. 그건 그렇지만….”
“그나저나 사비강 그자도 참 대단하군요.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지금 그의 숙소로 길까지 닦고 있습니다. 가시나무와 잡초만 무성하던 곳이 이제는 반듯한 정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부는 또 어찌나 많은지…. 이대로라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공사가 끝날 것 같습니다.”
“정 신경 쓰이시면 최대한 빨리 그 건물을 우리 것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말을 꺼내던 독고진이 순간 스치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류여중을 빤히 바라보았다.
류여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식으로든 그가 이곳에 남지 않게 된다면….”
독고진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크크크. 역시 군사군.’
암살을 넌지시 부추기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독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하하하. 그렇군. 군사의 말뜻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나쁘게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군요.”
“그렇지요. 어차피 이곳은 혈사련 아닙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하하하하!”
독고진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
“맹가숙 무리가 사고를 쳤습니다.”
적무린이 무뚝뚝하게 보고했다.
사비강이 그를 돌아보았다.
“맹가숙? 그게 누구지?”
“스스로 이곳 생도를 지원한 노인입니다. 구절귀창으로 알려진 자입니다.”
“아… 구절귀창.”
사비강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사고를 쳤다는 거야?”
“마을의 아녀자를 납치했습니다.”
“왜?”
“교관님을 압박할 용도인 것 같습니다.”
적무린이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때 듣고 있던 방각이 불쑥 끼어들었다.
“맹가숙은 우리와 다를 겁니다. 만만하게 보면 교관님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이번엔 정말입니다! 맹가숙 그 노인은 아주 비열하다고요!”
방각이 소리치자,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건가?”
“그, 그럴 리가요! 그저 충고해 주는 거지요.”
“후후. 그래서 그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짐작되는 곳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 됐군. 가서 전해라. 오늘 밤 내가 찾아갈 거라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전해.”
“진심입니까?”
방각은 물론 적무린도 놀란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상대방이 아녀자까지 납치한 건 분명 사비강을 압박하기 위해서다.
거기에 교관을 유인하려는 책략이기도 하다.
한데 그걸 알고도 제 발로 가겠다니.
“방황하는 생도를 계도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교관의 역할이지.”
사비강이 씨익 웃음을 그렸다.
**
“진짜로 올까?”
바위에 걸터앉은 도비천이 비수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면서 중얼거렸다.
그 곁에 앉은 맹가숙이 킬킬거렸다.
“두고 봐야 알 일이지. 하지만 방각을 시켜서 알려 왔다는 건 뜻밖이군.”
“그러게 말이야.”
보통 정파의 무인이라면 자신들의 불의에 분개하면서 당장 달려왔을 것이다.
한데 사비강은 달랐다.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이 방각을 통해 알려 왔다.
아녀자를 납치했다는데도 여유가 넘친다.
“분명 잔뜩 쫄았겠지. 흐흐.”
도비천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비수를 휙 집어던졌다.
팍!
쏜살 같이 날아간 비수가 나무 기둥에 깊숙이 박혔다.
그 나뭇가지에는 자루에 담긴 아녀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여인이 애처롭게 읊조렸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다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여인 역시 훌쩍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이 납치한 여인은 모두 두 명이었다.
“클클. 기다려 보라고. 네년들을 구할 정의의 사도가 나타난다고 했으니.”
맹가숙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때,
“그 정의의 사도가 납셨다.”
불쑥 들려온 목소리.
순간 모여 있던 무리 일곱 명이 고개를 휙 돌리고는 바라보았다.
맹가숙이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 사비강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교관?”
“그래, 내가 너희들을 담당할 교관이다. 여기서 뭐하는 거냐?”
“보다시피 좀 놀고 있수다. 킬킬.”
맹가숙이 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저벅저벅 걸어왔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사파의 개새끼들은 추잡하게 노는군.”
“클클클. 말이 좀 지나치지 않소? 교관.”
“네놈이야말로 교관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먹었군.”
“그래도 나이는 내가 더 많을 것 같은데.”
“처먹은 밥그릇 수가 그리 자랑이더냐? 한데 이걸 어쩌나? 밥그릇으로 따져도 내가 네놈보다는 더 많이 먹었다.”
“클클클. 날마다 과식을 하나보군.”
“잡담은 필요 없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좋수다.”
맹가숙이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구절창을 고쳐 잡았다.
다른 무인들 역시 살기를 피워 올리면서 서서히 자세를 잡아 갔다.
두 명의 무인은 여차하면 여인들을 베어 버리겠다는 듯, 그녀들이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바짝 낮췄다.
맹가숙이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흐. 우선 우리 계획을 말씀드리겠소. 지금부터 우리는 납치한 저 두 년을 죽여 버릴 생각이오. 그런 다음 당신이 죽였다고 뒤집어씌울 작정이오. 저 여자들을 사파의 고수로 착각한 당신이 죽여 버렸다고 소문을 낼 거요. 클클.”
“한심할 정도로 멍청한 계획이군.”
“크크크. 그 멍청한 계획에 당신이 당할 거요. 듣자하니 요상한 술법을 쓴다고 들었소. 갑자기 순간이동을 한다고? 하지만 우린 그걸 감안해서 저 두 년을 서로 떨어진 위치에 매달아 놓았지.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빨라도 한 년을 구하고 나면, 다른 한 년이 저세상으로 갔을 거요.”
“더 떠들어 봐라.”
“좋소. 이 계획을 변경할 방법이 딱 하나 있소. 그 방법대로라면 우린 당신을 따라 천상궁으로 돌아가 수업을 들을 거요. 그게 뭔지 궁금하시겠지?”
“별로 궁금하지 않다만, 떠들고 싶은 것 같으니 계속해 봐.”
“하하하! 역시 듣던 대로 재미있는 교관일세. 좋소. 그 방법은 지금 당신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거요. 그리고 이렇게 부탁하는 거지. ‘제발 제 수업에 참여해 주십시오!’ 하고. 그러면 우린 두말 않고 저 두 여자를 풀어 주고 당신을 따라가겠소. 어떻소? 이만하면 저 두 년을 핑계로 대고 그런 굴욕을 한 번쯤 감수할 만 할 것 같은데. 모름지기 정파의 무인이라면 명분에 목숨도 걸지 않소? 크하하!”
“다 씨불였나?”
“흠… 뭐, 그렇소만.”
“그럼, 이제 내 계획을 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