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귀환 마교관
208화
“쿡쿡.”
추량이 연신 웃음을 흘렸다.
자꾸만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쿡쿡. 쿠쿠쿡!”
이젠 아예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다.
나란히 걷고 있던 반조는 영 심기가 불편했다.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목과 얼굴 한쪽은 화상 자국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몸 여기저기에 붉은 반점이 피었으며, 머리카락 절반은 불에 그슬려 산발이었다.
이런 초라한 행색으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창피해 죽겠는데, 아까부터 자꾸만 옆에서 실실 웃어대니 어찌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결국 참다못한 반조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거참! 아까부터 왜 그렇게 실실 쪼개는 거요?”
“아,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요. 쿡쿡.”
“그러니까 뭐가 그리 웃기냐는 말이오!”
“그게… 그게… 쿠쿡, 으하하하!”
결국 추량은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했다.
반조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추량이 끅끅 거리며 말했다.
“산 사람을 화장하려고 했다는 게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쿠쿠쿡. 아이고, 배야. 다시 생각해도 너무 웃겨서… 푸훗!”
추량은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반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사람이 한순간에 골로 갈 뻔했는데, 그게 웃을 일이오?”
“그러게… 쿡쿡. 왜 거기에서 시체 흉내를 내랍니까? 쿡쿡.”
“내 그날 말하지 않았소! 본련의 교관으로 초빙될 자라면 그 정도의 함정은 파악할 능력이 있어야하기에 시험을 해본 거라고!”
“풋! 그래서 어떻습니까? 쿠쿡. 우리 사부님이 시험에 통과하신 겁니까? 큭큭큭.”
“끄응. 뭐, 그런 셈이긴 하지.”
“그것참, 캄사합니다! 하하하!”
추량이 다시 크게 웃었다.
반조는 가만히 입술을 씹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설마하니 솔방울을 가져와 그 자리에서 화장할 생각을 할 줄이야.
‘제기랄!’
시험을 해본 거라는 어설픈 핑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까운 사령환 하나를 추량에게 내줘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자 마침 높은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끝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바로 혈사련의 총타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추량이 계단의 높이와 웅장함에 놀라 입을 척 벌렸다.
“와아, 혈사련은 혈사련대로 정말 대단하군요. 이렇게 높은 계단은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그제야 체면이 좀 살아난 반조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뭘, 이 정도로 놀라시오. 그래봐야 천 개밖에 되지 않는 것을.”
“천 개요? 정말 산길을 통째로 계단으로 만든 셈이군요.”
“하하하. 본련에게 있어서 그 정도는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오.”
“뭐, 좀 쓸데없는 곳에 돈과 힘을 쓴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뭔가가 있긴 하네요.”
“끄음.”
반조가 불편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 녀석은 꼭 말을 해도 밉게 하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렇게 세 사람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오르자 계단은 절벽을 따라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난간 아래로는 안개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순간 반조가 싸늘한 웃음을 그리며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정도맹에서 떨친 명성은 익히 들었소. 하지만 이곳에서는 쉽지 않을 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교관께서 맡을 반의 무인들은 한 마디로 최악질의 인간들만 모였거든. 크크크.”
하지만 사비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긋 웃었다.
“걱정 마시길. 최악질로 따지면 나도 만만치 않으니까.”
“자신만만하시군.”
“뭐, 내 성격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일 뿐.”
사비강의 대꾸에 반조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정도맹에서 문제아들을 맡았다고는 하지만, 어디 본련의 무인들만 하겠느냐? 그들은 각 조직에서도 다루기가 버거워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자들인 것을.’
그렇게 한참을 오르자 마침내 웅장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량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 입을 딱 벌렸다.
“정말 웅장하군요.”
반조가 가슴을 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천상궁(天上宮)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
혈사련의 총타.
사파의 무인들은 이곳을 천상궁이라 불렀다.
무려 천 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볼 수 있는 궁전.
물론, 그곳의 주인은 ‘흑룡’이라 불리는 련주, 허무극이었다.
높은 단상 위에 앉은 허무극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사비강을 빤히 응시했다.
사비강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선 마주 보았다.
좌우로는 혈사련의 수뇌 인사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 모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사비강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련주전에 나온 것이었다.
사비강이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소. 정도맹의 전 감찰총국주 사비강이오.”
그 순간 련주전 내의 수뇌 인사들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맹랑한지고…!’
감히 련주님께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하오체를 쓰다니!
사방에서 살기가 뻗어 나오니 추량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감이 예민한 그였기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였다.
사비강이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었다.
짧은 순간 이루어진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추량은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찰나지간에 사비강이 그의 몸에 공력을 주입시킨 것이었다.
허무극이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후후. 어서 오게.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사비강을 내려다보는 허무극의 시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서래향 때문이리라.
아닌 척하지만 흑룡은 홍묘를 아낀다.
한데 그 홍묘를 사비강이 정도맹의 볼모로 만들었으니,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흑룡 곁에 선 중년의 사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총군사, 류여중입니다.”
“반갑소.”
“한데 옆에 서 계신 분은…?”
“날 따라다니는 녀석인데 워낙 함께 오고 싶다고 졸라대서 말이오.”
“잘 부탁드립니다! 천상천하절대지존최강무인이신 사부님의 제자, 추량이라고 합니다.”
그의 엉뚱한 소개에 류여중은 물론, 장내의 무인들 모두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사비강이 얼른 전음을 보냈다.
[야, 인마. 오자마자 싸움 붙일 일 있냐?]
[헤헤. 그래도 제게는 사부님이 절대 지존입니다.]
사비강이 내심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확실히 이 녀석은 또라이 기질이 충만하다.
자신도 그쪽으로는 어지간해서는 뒤지지 않는데, 옆에서 더 깐죽거려대니 저절로 점잖게 행동하게 된다.
류여중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하. 사부님을 무척이나 존경하나보군요. 하지만 경솔한 발언은 조심해 주셔야겠습니다. 본련에는 생각보다 거친 자들이 많거든요.”
“흐흐흐. 거칠기로 따지면 우리 사부님도 만만치….”
따악!
사비강이 추량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웃어 보였다.
“뭐, 그건 내가 알아서 주의를 주도록 하겠소. 먼 길을 와서 피곤하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류여중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지난 정사협정 때도 느꼈지만, 이자의 표현은 거침이 없다.
고도의 계략인지 원래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상대하기가 썩 편하지만은 않다.
“후후후! 여정이 꽤나 고되었던 모양이군.”
의외로 허무극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친히 안내자를 보내줘서 즐겁게 올 수 있었소. 무척 재미있는 자였소.”
허무극의 시선이 사비강 곁에 선 반조에게 향했다.
반조가 자라목을 하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암살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놀림거리가 되었으니,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허무극은 피식 웃어 넘겼다.
“그랬다니 다행이군. 류 군사, 저들을 숙소로 안내해 주게.”
“알겠습니다. 아, 그전에 사 교관께서 맡을 반의 구성원 명부입니다.”
그러자 수하 한 명이 사비강에게 명부를 가져다 주었다.
사비강이 빠르게 훑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아는 인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군.’
물론 그들은 자신을 모를 것이다.
미래를 겪지 않았으니.
명부를 덮은 사비강이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이 생도들을 나 혼자 통솔하기는 까다로울 것 같군. 해서 좀 도와 줄 조교가 필요하오.”
“그렇군요. 그럼 적당한 무인을 추려서….”
“아니, 원하는 자가 있소.”
사비강의 말에 류여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하는 자? 그게 누군지요?”
“적무린(翟武潾).”
“적무린…?”
류여중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무린은 원래 무신대(武新隊)를 이끄는 대주였지만, 현재는 직위해제를 당하고 근신 중이었다.
이유는 정파 무인과 벌인 싸움 때문이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싸웠는데, 정파 무인 세 명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정도맹의 지단에서는 그 일을 엄중히 따져 물었고, 결국 혈사련에서는 어느 정도의 피해 보상을 한 후 그에게 중징계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도맹 무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바로 적무린이다.
한데 그를 조교로 붙여 달라니.
혹시 보복이라도 하려고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류여중이 피식 웃고 말았다.
볼모가 보복이라니.
여긴 혈사련 한복판이다.
사비강이 제멋대로 설쳐댈 수 있는 정도맹이 아니란 말이다.
정 그가 적무린을 원한다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오히려 사비강을 감시하기가 수월해질 지도 모를 일.
류여중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자를 알아본 후에 문제가 없다면 바로 조교로 임명하지요.”
“고맙소.”
사비강이 씩 웃었다.
**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추량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한 낡은 건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은 현판이 곧 떨어질 것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창문은 깨져서 아예 떨어져 나가 있었고, 실내 구석구석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이고 거미줄마저 잔뜩 쳐져 있었다.
“이 새끼들! 아무리 볼모 취급이라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추량이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씨근거렸다.
이곳이 앞으로 사비강이 지내야 할 장소였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절벽 가까이에는 마찬가지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생도들을 가르칠 연무실이었다.
이곳을 안내했던 반조는 약 올리듯 이렇게 말했다.
“후후. 그래도 구역은 가장 넓은 곳이오. 자연을 벗 삼아서 지내면 좋지 않겠소?”
하지만 정작 사비강은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제 여긴 내 구역이다. 앞으로 잘 꾸미면 되겠지.”
“헐, 이게 잘 꾸민다고 될 수준입니까?”
“된다.”
“끄응. 사부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추량이 얼른 꼬리를 말았지만,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야 아무렇게나 잠을 자도 상관없다.
다만, 존경하는 사부가 이런 홀대를 받는다는 것이 영 기분 좋지 않았다.
잠시 후.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추량이 얼른 달려가 문을 열자, 한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교적 까무잡잡한 피부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
그가 미간을 슬쩍 좁히더니 말했다.
“사비강 교관입니까?”
“아, 나는 아니고… 이쪽입니다.”
마침 사비강이 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사내를 힐끔 보고는 물었다.
“무린?”
다짜고짜 이름이 불린 적무린은 기분 나쁘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어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