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귀환 마교관
186화
설백은 찻잔을 들었다.
‘가소로운 짓을….’
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벌써 일다경(약 15분)이 지났다.
그의 잔은 두 번째 찻물이 채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사비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세 번이나 미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지만 접객실에는 그 혼자만 덜렁 앉아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장로라지만 자신은 장로회주였다.
이렇게 함부로 대할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연륜이라는 것은 그저 까먹은 세월로 저절로 쌓이는 게 아니다.
인내가 쌓이고 쌓여서 연륜이 되는 법.
이깟 일로 화를 낼 정도로 얕은 세월을 살지 않았다.
‘나를 조급하게 만들 생각인가?’
하지만 무얼 위해서?
사비강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도 모를 텐데.
그게 아니라면 이미 자신이 북명신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한 것일까?
그렇다면 상황이 썩 좋진 않다.
우선은 만나서 알아볼 일.
그가 다시 찻잔을 들려고 할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접객실 문이 열리더니 사비강이 들어섰다.
설백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닐세. 괜히 바쁜 사람을 찾아와서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예, 제가 좀 바쁜 건 사실이지요.”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대꾸를 하자 설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소문대로군.’
예의상 손사래를 칠 법도 하건만, 사비강은 노골적으로 바쁜 척을 하고 있었다.
사비강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요?”
“허허, 이 사람 성격도 급하군. 자네가 감찰총국주가 되고 나서 나와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건 처음이 아닌가? 많이 바쁘겠지만 그리 서둘지 말고….”
“많이 바쁩니다. 아시다시피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을 정도지요.”
사비강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잘랐다.
설백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더 제멋대로군.’
조금은 당황했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껄껄 웃었다.
“과연 소문대로 호탕한 성격이로다.”
“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성격이나 알아보자고 오신 것은 아닐 테고. 용건은 무엇입니까?”
사비강이 끈질기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쯤 되자 아무리 연륜이 쌓인 설백이라도 슬슬 짜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지난 세월 동안 발휘한 특유의 인내심으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바쁜가보군.”
“정말 바쁩니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북명신문주를 만나보고 싶네.”
“이유는 뭡니까?”
설백의 미간이 구겨졌다.
정말이지 답이 없는 놈이군.
원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이었다.
한데 이건 뭐….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대하면 안 되겠군.’
설백이 다소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도 말해야 하나?”
“물론입니다. 죄수에 대한 면회를 신청하셨으면 사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지금 제가 묻는 건 그게 뭐냐는 겁니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맹랑한….’
설백이 사비강을 빤히 노려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감찰총국주가 세간의 화제가 될 만하군. 이렇듯 예외 없이 절차를 지키려고 하니 물샐 틈도 없겠네.”
“과찬이십니다.”
“사실 북명신문주를 만나서 좀 따지고 싶었네. 그동안 그 많은 재산을 부정하게 모으고 은닉했다는 것이 괘씸해서 말일세.”
“북명신문주가 모은 건 아니지요. 그는 동방세가에서 빼앗은 거니까요.”
“아, 그렇군. 어쨌거나 그 두 가문이 작당을 했다니까 장로회주로서 분이 뻗쳐서 말일세. 뭐, 이런 이유로는 접견이 불가하다면 불만 없이 받아들이겠네.”
“흐음.”
사비강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단, 면회 시간은 일각만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그럼 용무가 끝났으니 저는 이만.”
사비강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만난지 아직 반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설백은 다시 접객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정말이지 보통의 무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홀대였다.
복도를 걷는 사비강의 곁으로 매설란이 얼른 다가왔다.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정말 이런 식으로 괜찮아요?”
“뭐가?”
“이렇게 까칠하게 대하면 설백 장로가 의심하지 않겠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욱 이렇게 대해야지.”
“무슨 말이죠?”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자야. 오만할 정도지. 그런 자는 소문을 안 믿어. 오로지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만을 확신할 뿐. 이제 날 봤으니, 지금쯤 내가 앞뒤 꽉 막힌 원칙주의자쯤으로 보일 거야.”
“확실히 그렇겠네요.”
“답답할 정도로 원리원칙만을 따지는 인간이라면 암계 따위는 사용하지 않지. 적어도 그가 무슨 가설을 세웠든, 이제 나는 그 용의선상에서 상당히 희미해졌을 거야.”
매설란이 다시 보았다는 표정으로 사비강을 응시했다.
이럴 때면 또 다른 사람 같지 않은가?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원상 문주가 뜻대로 움직여야 할 텐데요.”
“홍묘가 직접 손을 썼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서래향은 독과 사술에 능한 여인이다.
그녀가 혈사련에 있을 때, 환살단주 요신이 그녀의 아래로 고분고분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환술에 있어서는 적어도 요신보다도 우월한 능력을 지닌 그녀였기에.
“원하는 대로 암시를 걸었어요. 이제 그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믿을 거예요.”
서래향이 원상을 만난 후 사비강에게 전한 말이다.
그처럼 쉽게 사술이 먹혀든 것에는 그녀의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었지만, 공진철에 구속당하고 갖은 고문에 시달리면서 원상의 기력이 몹시 쇄한 상태였다는 것도 한몫했다.
어쨌거나 이걸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설백의 의심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등왕패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질 테고.
하지만 사비강은 방심하지 않았다.
지난 생애에서는 설백의 정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만큼 주도면밀한 자다.
당분간 의심을 피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군요.”
**
맹주의 순방 날짜가 다가왔다.
등왕패를 비롯한 그 측근들은 맹주의 건강 상태가 온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무리하게 일정을 잡은 게 아니냐며 우려를 나타냈지만,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다.
이번 순방은 표면적으로 정도맹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순방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감찰총국주가 함께 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나 불순 세력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돌고 있었다.
물론, 이 소문은 구윤이 퍼트린 것이었다.
등왕패의 조급함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출한 출정식을 가진 끝에 순방이 시작됐다.
한동안은 평온한 여정이 이어졌다.
해질 무렵, 순방조는 어둑한 숲속으로 들어섰다.
호위조를 비롯하여 동행하는 무인들이 저마다 등불을 밝혔다.
마차에 타고 있던 능운파가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즈넉한 하늘에 반달이 떠올라 있었다.
바로 곁에는 사비강이 말을 타고 나란히 이동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부끄럽군. 자네에게 면목이 없네.”
능운파의 자조 섞인 목소리에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고뇌에서 얼핏 자신의 옛 모습이 투영된 것이다.
그래도 맹주는 자신보다 낫다.
적어도 자기 사람들을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까.
그에 비하면….
‘나는 수많은 수하들을 사지로 내몰았지.’
돌이키다보니 한동안 잊었던 분노와 복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비강이 나직이 대꾸했다.
“원래 사람을 다루는 일이 가장 어려운 법 아니겠습니까?”
평소 그 답지 않은 대답에 능운파도 내심 놀랐다.
늘 장난기가 많고 가벼운 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표정과 말투, 눈빛을 보면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을 보는 것만 같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절대적인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사비강은 맹주보다도 훨씬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이 맞다.
마계에서의 시간은 중원보다 두 배 정도로 느리게 흘렀기에.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이동했다.
산새가 우짖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 왔다.
그리고 마침내 삼나무가 빽빽한 곳에 이르렀을 때,
[맹주님, 슬슬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사비강의 전음이 능운파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된 것인가?]
[후후. 예, 이쯤에서 죽어 주셔야겠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섬뜩하군.]
[곧 시작될 겁니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사비강이 웃었다.
[맹주님이야말로 조만간 곧 돌아가실 분이 아닙니까? 고생이라면 맹주님이 더하지요.]
“허허허!”
사비강의 말끝에 능운파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그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혈사련 쪽에서는 괜찮겠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후후. 하지만 그들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겁니다.]
[만약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면?]
[그 부분은 제게 맡겨 두시고 죽을 준비나 하십시오.]
역시나 거침없는 말투.
능운파가 그런 사비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툴툴 웃음을 터뜨렸다.
[군사가 그러더군. 태어나서 스승 외에 가장 믿은 자가 자네라고. 왜 그런지 설명할 순 없지만 알 것도 같네.]
그의 전음이 끝났을 때였다.
휙! 휙!
파팟!
바람 소리에 이어 등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등불이 꺼지자 갑작스러운 어둠과 소란이 찾아들었다.
“엇? 뭐야?”
“다들 맹주님을 보호해라! 주변에 적이 있다!”
찰나,
“헉! 끄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비명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
맹주가 죽었다.
소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퍼졌고 강호는 뒤흔들렸다.
흉수는 혈사련으로 지목됐다.
증인이 었었고, 증거가 있었다.
흑랑대가 순방조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정도맹에서는 비상소집이 이루어졌다.
맹주전의 대회의장에는 현역 수뇌 인사 외에도 장로회가 참석했다.
그리고 대회의장 한 가운데에는 화려한 관 속에 시신 한 구가 천에 덮여 있었다.
시신은 온전하지 않았다.
화골산을 뿌린 것인지 상체는 모두 녹아 없어졌고, 허리 아래쪽만이 찢어진 옷과 함께 남아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바지는 분명 맹주가 입고 있던 것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오? 맹주께서 이리 허무하게 당하시다니!”
“상대는 살막이었습니다. 아무리 맹주님이라지만, 살막은 최고의 살수 조직이지요. 충분히 위험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살막을 쓸어버려야 할 일이 아니겠소!”
“하나 그 살막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건 살막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칼자루에 불과합니다. 그 칼자루를 쥐고 흔든 녀석들은 바로 혈사련이지요.”
“지금이라도 당장 혈사련과 전쟁을 일으켜 사파 새끼들의 씨를 말려 버려야 합니다!”
“찬성이오! 사파의 개잡놈들과 애초에 협정 따위를 맺어서는 안 되는 거였소! 인간적으로 대우를 해줬더니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질러? 옘병할 놈들!”
대회의장이 분노로 끓어올랐다.
이를 지켜보는 등왕패는 가슴속에서 희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저 빈 자리를 얼마나 탐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