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귀환 마교관
185화
설백은 여느 때처럼 무화전 후원의 정자에서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 허공에서 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사가 순방 날짜를 공표했습니다.”
“…….”
“이번 기회에 벽력당주가 움직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 테지.”
희미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뜬 설백.
그는 비록 눈을 떴지만 마치 시야 그 너머의 어딘가를 보는 듯했다.
“아마도 순방 기간에 거사를 치를 것으로 보입니다.”
“…….”
“성공한다면 맹주 자리가 공석이 될 겁니다.”
“…….”
“장로님…?”
무영이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설백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한 채 꿈적도 하지 않았다.
무영은 기다렸다.
이럴 때 그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무려 한 식경이나 지났을 때, 마침내 무겁디무거운 설백의 입이 열렸다.
“역시 이상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아마 벽력당주로서는 이번 순방으로 압박을 받았겠지요. 해서 계획을 좀 더 서두르는 것이….”
“북명신문주 말일세.”
“아….”
그제야 무영은 자신의 주인이 다른 얘기를 꺼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침묵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 금괴가 북명신문에서 발견이 되었을까?”
“…….”
실은 무영도 그 부분이 이상하긴 했다.
부정하게 모은 금괴를 두고 동방세가와 북명신문이 서로 싸웠다는 게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다.
설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북명신문주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물론, 기회주의자에다가 돈을 밝히기는 하지만, 결코 무모한 자가 아니다.
게다가 북명신문에서 발견되었다는 금괴의 양.
그것은 동방세가에서 보유하고 있던 것 중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절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누군가 판을 짜고 있는 느낌인데….’
그 낯선 감각 때문에 묘한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신중해야 한다.
상황이 복잡할수록 확실한 것부터 정해 나가야 한다.
지금 가장 확실한 사실은 금괴가 북명신문에서 발견됐다는 것.
그렇다면 역시 거기부터 실마리를 풀어 나가야 한다.
“흐음.”
설백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우선 북명신문주를 만나봐야겠네.”
“그는 현재 감찰총국의 관리 하에 뇌옥에 갇힌 상태로….”
“감찰총국주에게 기별을 넣게. 내가 한 번 보잔다고.”
“알겠습니다.”
“혹여 재촉은 하지 마시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약속을 잡게나.”
“예, 그러겠습니다.”
**
서래향은 주루에서 술을 마셨다.
물론 정도맹의 외원에 속한 주루였다.
그녀가 외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몹시 까다로운 일이었다.
우선 서류를 접수하고 맹주의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수행 무사가 열 명씩이나 동행해야만 겨우 외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정도맹에 볼모로 잡힌 후로 딱 한 번 외출해본 게 전부였다.
그 후로는 일절 외원 밖으로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련에서도 저 달이 보일 테지.’
취기가 오른 탓인지 감상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일부러 취기를 체외로 배출하지 않았다.
오늘은 취하고 싶었다.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취기를 이용해서라도 잠시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여기 한 병 더!”
잔을 비운 그녀가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힐끔 돌아보았다.
‘흥! 저 경멸어린 눈초리들. 역겨워.’
맹의 외원에 속한 주루인 만큼 이곳의 손님들 다수는 정도맹 소속의 무인이었다.
그들은 아까부터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사파’라는 낙인을 찍고 던지는 경멸과 자신의 외모를 훔쳐보며 군침을 흘려대는 음흉함이 섞여 있었다.
‘가식덩어리들!’
마침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무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혈사련의 서 소저가 아니시오? 난 금수각(金手閣) 소속, 풍신대주(風神隊主) 이주걸(李主傑)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그는 아까부터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던 사내 중 한 명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단칼에 무안을 주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를 상대로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무료함을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반가워요. 호남이시네요.”
“하하하! 과찬이오! 혹시 괜찮다면 내가 술을 한 잔 사드려도 되겠소? 이왕이면 좀 더 분위기 좋은 방으로 옮겨서….”
“좋아요.”
서래향이 더 묻지도 않고 승낙했다.
이주걸은 이렇게 쉽게 일이 진행될 줄 몰랐기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삼 층의 객실로 자리를 옮겼다.
점소이가 술상을 차려 주고 나가자, 이주걸이 먼저 술병을 들었다.
“소저, 내 한 잔 따라드리… 헛!”
순간 그가 헛바람을 삼켰다.
어느새 서래향은 옷을 벗고 하늘거리는 속옷만 걸친 상태가 아닌가?
그야말로 화용월태, 경국지색, 절세미녀였다.
뎅그렁.
그의 손에서 술병이 떨어졌다.
“어머, 술이 쏟아져요.”
서래향이 얼른 다가가며 말하자, 이주걸이 그녀의 손목을 휙 낚아챘다.
“상관없소. 그대라면 내 얼마든지 새 술을 사드리겠소.”
“이 대협….”
“소저….”
“으음. 하아!”
이주걸의 입술이 서래향의 목덜미를 거칠게 탐했다.
그의 손길은 봉긋하고 부드럽게 솟아 오른 가슴을 마구 주물러댔다.
이내 잘록한 허리를 지나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까지 다다랐다.
전희는 짧았다.
당장이라도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분출시키지 못한다면 심장이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주걸이 아랫도리를 벗어던지고는 곧장 몸을 밀착해 갔다.
“아아앙!”
간드러지는 교성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소저! 소저! 헉, 헉, 헉!”
“아아아, 대협…! 아아아!”
“좋소? 좋소?”
“좋아요. 너무 좋아요!”
“나도 좋소! 내 거기가 타들어 가는 듯하오!”
이주걸이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절정으로 치달으려는 때였다.
“좋기는 개뿔. 그게 그리 좋냐?”
싸늘한 남자의 음성.
쾌락의 절정을 향할 때였던 만큼 이주걸은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웬 놈이냐!”
그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치는데,
“그쯤하고 꺼져라. 역겹다.”
“국, 국주님!”
이주걸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얼른 몸을 빼내려고 하는데…
‘안 빠져?’
당황한 그가 자신의 배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 이건 대체…!”
한창 정을 나누던 서래향은 온 데 간 데 없고, 커다란 술병 하나만 거시기에 꽂혀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래향은 여전히 탁자에 앉아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옷을 벗은 채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 방에서 자신뿐이었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그때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
“네, 네년이 내게 사술을…!”
버럭 고함을 지르던 이주걸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더럽게 됐다.
정도맹의 대주가 사파 여인의 사술에 걸려 이런 우스운 꼴을 했다고 스스로 자백하는 게 아닌가?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꺼져라. 오늘 본 건 기억에서 지워 줄 테니.”
“죄, 죄송합니다, 국주님!”
“어서 눈앞에서 사라져.”
“예, 옛!”
이주걸은 그곳에 꽂힌 술병을 얼른 빼내려고 했다.
한데 이것도 사술 때문인지 부풀어 오른 그곳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술병이 빠지지 않자 그는 몹시 당황했다.
“뭐해?”
사비강이 눈을 부라리며 다그치자 이주걸이 안절부절못했다.
“그, 그것이…!”
“썩 안 꺼져!”
“죄, 죄송합니다!”
결국 이주걸이 거시기에 술병을 꽂은 채로 방을 달려 나갔다.
술병을 깨버리면 간단하지만,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못한 탓이다.
그 모습을 본 서래향이 배를 쥐고 깔깔거렸다.
사비강이 맞은편에 앉았다.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었구려.”
“저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호감의 표현이겠지.”
“그 호감도 내가 불쾌하면 시비가 되죠.”
“하긴. 나였다면 밖에서 춤이라도 추게 했을 테니. 후후후.”
서래향이 픽 웃고는 물었다.
“술 사려고요?”
“사지.”
“제일 비싼 걸로요.”
“얼마든지.”
“공짜는 아니겠군요.”
잠시 후 점소이가 가장 비싼 술을 내어 왔다.
사비강이 그녀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서래향이 술 향기를 맡으며 웃었다.
“이게 감찰국 방식의 취조라면 매일 받아도 되겠어요.”
“하지만 내가 좀 바빠서 그건 안 되겠소. 오늘도 장로회주가 만나자는 신청을 해왔는데 약속을 미뤘거든.”
“정말 바쁜 분이시군요.”
“어떻소? 지낼 만 하오?”
“보시다시피. 기회만 된다면 당신도 나랑 같은 처지로 만들어 버리고 싶군요.”
서래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사비강을 빤히 보았다.
“우연히 날 봤다는 말은 안 통해요.”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눈치는 빠르군.”
“무슨 일이죠?”
어느새 서래향은 취기를 체외로 배출한 상태였다.
사비강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왔다.
그렇다면 나름 중요한 일이리라.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쪽이 확실히 내가 내민 줄을 잡은 건지 확인할 때가 된 것 같소.”
“무슨 소리죠?”
“요즘 장기를 두고 있소.”
“장기?”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장기요. 하나는 그럭저럭 다룰만해졌는데, 다른 하나가 좀 예민한 상대요. 그가 최근 대응을 해왔지.”
“미룬 약속과 관련이 있나보군요.”
장로회주를 두고 말한 것이다.
과연 서래향은 눈치가 빨랐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이제 이쪽에서 말을 움직일 차례요. 한데 그 말을 가장 잘 움직여 줄 수 있는 자가….”
“나란 얘기군요?”
“인정해야겠군. 당신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는 걸.”
그래서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각심이 들었다.
“호호. 그래서 이 비싼 술의 대가는 뭐죠?”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한 사람을 좀 만나 줘야겠소.”
“제가 움직일 말이군요.”
“그렇소.”
**
한때 강호에 명성을 떨치던 북명신문주 원상의 몰골은 매우 처참했다.
갖은 고문에 시달린 탓에 피부가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고, 공진철에 구속당해서 온몸이 젖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에 이어 한 그림자가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사비강이었다.
원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후후. 끈질기군.”
“정말… 모르는 일… 어째서 금괴가 그곳에 있었는지….”
사비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섬뜩한지 원상은 전율이 일어났다.
사비강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곧 알게 될 거야.”
“무슨….”
“네가 보고 싶어 할 사람을 불렀다.”
“보고 싶어 할 사람이라니….”
끼이익.
다시 철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바로 서래향이었다.
한데 그녀를 본 원상의 반응이 조금 묘했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여…보!”
눈물까지 흘리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