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귀환 마교관
153화
“혹시 회계 장부를 다른 곳에서 미리 받았던 건 아니냐?”
합리적인 의심이다.
그만큼 담우기의 계산 속도는 빨랐으니까.
하지만 담우기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맹세코 그런 적은 없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크게 뜬 모습이 마치 잔뜩 겁을 먹은 아기 사슴 같다.
사비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담우기를 보면서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확신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펼칠 때하고는 또 다른 모습이군.’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쫄고 있어? 내가 때리냐?”
“하, 하지만 방금 절 의심하신….”
“그냥 확인 차 물어본 거다. 그만큼 네가 계산을 빨리 했으니까.”
“정, 정말이신가요?”
“그렇다니까.”
“후유, 그럼 다행입니다. 전 정말로 절 의심하는 줄 알고.”
담우기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보면 조금 전의 당당한 모습이 마치 거짓말 같다.
‘평소엔 굉장히 소심한데 머리를 굴릴 때만 다른 사람이 되는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던 녀석이….’
하긴 이토록 소심한 성격이라면 학관에서 부적응자로 찍힐 만도 하다.
담우기는 애초에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혀 특목반에 배정된 아이였으니까.
한데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동안 머리를 쓰는 수업을 딱히 한 적이 없다지만,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별로 좋은 교관은 아닌 모양이야.’
만약 이 생각을 염자량이나 연우경이 듣기라도 했더라면, 그걸 이제 알았냐고 고래고래 소리쳤으리라.
사비강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에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누구냐?”
“용, 용의자요? 전 정말 서류더미를 미리 빼돌린 사람이 있는 줄도….”
“아니, 그게 아니라….”
사비강이 잠시 이마를 짚고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지목한 세 군데 중에서 가장 의심스러워 보이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 거다. 정답은 한 곳이니까.”
“아, 그 말씀이셨군요.”
담우기가 애체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또 시작됐군.’
담우기의 버릇인 모양이다.
이럴 때만은 녀석의 눈빛부터 달라진다.
정말 희한한 녀석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 갔다.
조금 전 자라목을 하며 눈치를 살피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이 경우에는 반대로 접근해야 합니다.”
“반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국주님께서는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곳을 말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정답이 한 군데라고 정해져 있는 이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는 것보다는, 가장 유력하지 않은 조직부터 제거해 나가는 방식이 오히려 정답에 접근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즉, 소거법을 이용해야 합니다.”
“흐음… 넌 원래 그러냐?”
“예, 이런 문제라면 역시 소거법을….”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그렇게 표정이며, 말투며, 눈빛이 건방지게 돌변하는 거냐고 묻는 거야.”
“네?”
순간 담우기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천진한 아기 사슴마냥.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바라보며.
“제, 제가 돌변했었나요? 혹, 혹시 제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요? 만약 무례를 저질렀다면….”
“하아, 아니다, 아냐. 잘하고 있어.”
사비강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을 내저었다.
확실하다.
이 녀석은 좀… 아니, 많이 독특하다.
“일단 계속 해 봐. 그래서 네가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켜야 할 곳이 어디냐?”
“만인당입니다.”
역시나 달라진 표정과 말투.
이제 사비강은 그러려니 하고는 물었다.
“어째서지?”
만인당의 주된 역할은 정도맹에 용역을 알선해 주는 일이다.
예를 들어 맹 내에서 큰 공사를 할 겨우 노역을 모집하거나, 상당한 규모의 행사를 치를 때 봉사자를 모집하는 등의 일을 도맡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무인들을 모집해서 정도맹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담우기가 잠깐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만인당의 최근 회계 장부를 보았을 때, 상당 부분의 오차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장부를 조금만 볼 줄 알아도 자금이 새어 나갔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건 그렇지.”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객잔이나 통문각과는 달리 만인당은 장부에 기록된 수치에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 모양새다.
반면, 신화객잔이나 통문각은 수치를 교묘하게 수정했다.
얼핏 계산해 보아서는 그 오차를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치밀하고 교묘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만인당에 부정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습니다. 하나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최근까지 정사대전이 있지 않았습니까? 이때 정도맹에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맹 내에 속한 무인 외에도 별도로 무인들을 모집했을 것이고, 각 지단으로 노역을 파견하여 부서진 건물을 수리해야 했을 겁니다. 병기나 잡기를 관리하는 자들도 늘었을 것이고요.”
“그래서?”
“정사대전이라는 급박하고도 특별한 환경 속에서 맹과 만인당이 정확하고 오차 없는 정산 과정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만인당은 우선 급한 대로 정도맹에 인력을 제공했고, 이때 발생한 비용을 수뇌부에서 즉각 처리하지 않는 대신 추후 삭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호오, 과연.”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한 마디로 정사대전이 한창 발발하던 중에 정도맹이 만인당으로부터 외상을 했다는 말이다.
이후에 만인당이 상납해야 할 금액에서 해당 비용을 삭감했다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
이는 만인당의 역할 특성상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단지 회계 기록만 보고 그 모든 것을 파악해낸 담우기다.
‘이 녀석,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군. 기재를 옆에 두고도 몰랐어.’
사비강이 감탄한 표정을 지우고는 담우기의 어깨를 토닥였다.
“제법이구나. 잘했다. 그럼 만인당은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켜도 되겠군. 뭐, 딱히 조사할 것도 없겠어.”
“아, 그건 안 됩니다.”
뜻밖에도 담우기가 제지하며 나섰다.
그는 지금까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던 표정에서 다시 사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죠. 어디까지나 이건 제 추론일 뿐인데, 어찌 감히 제 생각만 믿고 단정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네 생각은 늘 정확한 것 아니었냐?”
“무슨 그런 말씀을…! 저 그렇게 건방진 놈 아니에요.”
또 다시 순박한 표정이다.
‘이 녀석… 정체가 뭐야?’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말했다.
“좀 전에 다른 생도들 앞에서는 서류를 훑어 볼 필요도 없다고 하지 않았냐? 네 계산은 정확하다고.”
담우기가 애체를 밀어 올렸다.
그가 금세 달라진 눈빛으로 말했다.
“훗. 그건 명백히 자료를 보고 계산한 것이고, 이건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니까 경우가 다르지요. 물론, 제가 추론한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굉장히 높습니다만.”
사비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뭔가… 이 새끼….
“재수 없어.”
“예?”
“잘 알았으니 꺼져라.”
“엇, 제가 무슨 무례라도…?”
“아, 그런 거 없다니까. 어서 나가봐.”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담우기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국주실을 빠져나갔다.
**
맹주전 침소 입구.
구윤은 건장한 체격의 호신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내실을 향해 말했다.
“맹주님, 구윤입니다.”
“들어오게.”
문 안쪽에서 능운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침소로 들어서니 알싸한 약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마침 능운파는 침상에 걸터앉아서 시녀가 건네는 탕약을 마시는 중이었다.
구윤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좀 어떠신지요?”
“후후. 내가 최근 기력이 허하긴 하지만 아직은 건재하다네. 걱정할 것 없네.”
“물론이지요. 맹주님의 강건함이야 누구보다 제가 잘 알지요.”
물론 거짓말이다.
맹주를 안심시키기 위한.
또는 말이 씨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꺼낸.
비록 무인은 아니지만 맹주를 최측근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온 구윤이었다.
때문에 최근 들어 맹주의 기력이 더욱 쇠약해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석에서는 내공을 운용하여 그 기색을 최대한 감추었지만, 이렇듯 단 둘의 만남에서는 맹주 역시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시녀가 빈 그릇을 들고 나가자 맹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사비강 교관… 아니지, 이제는 사비강 국주라고 불러야겠군. 그는 좀 어떤가?”
“의심되는 곳을 두 군데까지 추려낸 것으로 압니다. 외원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곧 시체도 발견할 겁니다.”
“오늘로 벌써 엿새째군. 앞으로 나흘인가…?”
“아마 잘 해낼 겁니다. 전 그들을 믿습니다.”
능운파가 구윤을 돌아보더니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군사의 표정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본 게.”
“아….”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만큼 기분 좋은 일이지.”
능운파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이 어쩐지 더 없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망망대해에 홀로 내던져진 노인을 보는 듯.
구윤이 내심 각오를 굳혔다.
‘이제부턴 제가 믿음직한 군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대해에 홀로 서 계시지 않도록.’
**
열흘이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만큼 외원의 면적이 넓은 탓도 있었다.
게다가 장원 내에 있는 건물들이다 보니 각각 비밀 공간도 많은 까닭에 수색 속도는 더디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용의 조직이 세 군데에서 두 군데로 줄었다는 것.
담우기의 말대로 만인당은 사전 처리, 사후 정산 방식을 이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렇게 된 이상 범행 조직은 신화객잔과 통문각 중 한 곳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역시 시체를 찾아 물증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런데 수색만 하면서 흐른 시간이 벌써 아흐레째.
내일이면 감찰대로서 생도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사비강은 외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천각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저만치 생도들이 외원을 들쑤시며 수색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그의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사뿐 다가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서래향이었다.
홍묘 서래향.
정사회담 이후, 그녀는 현재 정도맹의 볼모로 잡힌 신세였다.
다만, 맹에서는 그녀가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고 있었고, 일부 회의의 성격에 따라 그녀가 맹주전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나를 이곳에 묶어 두고 정작 당신은 내쫓기게 생겼군요.”
“내가 아니라 저 아이들이 내쫓기는 거지.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어디서든 줄을 잘 서야 살아남는 법이죠. 제가 볼 때 당신은 줄을 잘못 선 것 같군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굳이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죠.”
서래향이 차갑게 웃었다.
그때였다.
사비강 뒤로 조문탁이 다가섰다.
“국주님, 시체를 찾아냈습니다!”
“잘 됐군. 안내해.”
“옛!”
조문탁이 얼른 앞서 달려 나갔다.
사비강이 도약하기 전, 서래향을 힐끔 보았다.
“역시 정확히 재보기 전에는 모르는 줄도 있는 거야. 가끔씩 늘어나는 줄이 있거든.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