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귀환 마교관
131화
쉬리리릿.
강가에 한 인영이 날렵하게 내려섰다.
그는 갈대가 어우러진 강변을 한차례 훑어본 후 차갑게 얼어붙은 강물로 시선을 던졌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초겨울에 얼어붙은 강물이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후우웅!
순간 그의 주변으로 강한 기풍이 불어 나갔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기감을 활짝 펼쳐 주변에서 감지되는 모든 기척을 확인했다.
하지만 짐승들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반응을 찾지 못했다.
사내가 천천히 눈을 뜨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얼음은 녹는 중이었지만 아직 단단했다.
툭, 툭.
사내가 발끝으로 얼음을 가볍게 차며 사뿐사뿐 날아올랐다.
마침 얼음 복판에 멈춘 사내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두터운 얼음벽 아래 갇힌 시체 한 구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가슴팍에는 살막을 뜻하는 ‘살(殺)’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십삼살(十三殺)!’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얼음 아래를 살폈다.
‘칠살(七殺)!’
그 후로도 얼음에 갇힌 채 눈을 부릅뜨고 죽은 시체는 계속 나타났다.
모두 다섯 구.
놀랍게도 이들 중 가장 강한 이살(二殺) 역시 얼음에 갇힌 채 죽음을 면치 못했다.
끝내 찾지 못한 것은 구살(九殺)의 시체였다.
사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보가 잘못됐군.’
잠시 후, 그가 바닥을 차고는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갔다.
**
사비강이 낭떠러지 아래를 가리켰다.
“자, 이런 지형을 뭐라고 하는지 너희들도 알겠지?”
“협곡이요.”
생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맞다. 협곡이지. 특히 이처럼 길목이 좁고 깊은 협곡은 전투 시에 여러모로 이용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그러자 곡보옥이 손을 들고 대꾸했다.
“적이 협곡을 지나갈 경우에 이런 곳에 매복해 있다가 급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렇다면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서는 급습하기 전에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
“진퇴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연우경이 대답했다.
너무 단순한 질문이었기에 놀라울 것도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가르치고 있는지 참 똑똑하구나. 그 말대로 진퇴로를 먼저 차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위나 돌 더미 같은 것을 떨어뜨리는 것이 효과적이겠지. 때론 화공을 이용하기도 한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 지형을 살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 아니! 이럴 수가! 하필이면 저기에 바위 더미가 잔뜩 쌓여 있구나! 이거야말로 마치 너희들의 공부를 위해 누군가 준비해 온 것처럼 말이야! 세상에 이런 좋은 기회가!”
누가 봐도 과도한 반응.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어색한 연기였다.
자연히 생도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변태 교관이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지? 누가 봐도 저기에 바위 더미가 있는 게 이상하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말을 이어 갔다.
“자,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디까지나 예를 드는 것뿐이다. 알겠지?”
“무슨 예입니까?”
“자, 아군의 포로를 이송하는 적들이 만약 이곳을 지나간다면 어찌해야 할까?”
곡보옥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바위 더미를 밀어서 떨어뜨리고, 진퇴로를 차단합니다. 그리고 화살을 쏴서 고립된 적을 섬멸하면 되겠죠.”
“훌륭한 대답이다. 하지만 상대가 포로를 이송하고 있다면, 자칫 아군이 화살에 맞을 수도 있어. 그러니 진퇴로를 차단한 후에는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서 근접전으로 기습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럼, 난투전이 되겠는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기습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지.”
사비강은 그 후로도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더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였다.
한참 설명을 이어 가던 사비강이 멈칫거리고는 동쪽 땅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아직 땅거미가 닿지도 않은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이동해 오고 있었다.
‘때가 됐군.’
사비강이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생도들을 향해 돌아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엇? 자암까안! 저기 뭔가 다가오고 있잖아? 설마 혈사련은 아니겠지?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거야! 그치?”
이번에도 역시나 어색한 반응.
때문에 곡보옥을 비롯한 많은 생도들은 사비강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곡보옥이 피식 웃었다.
“그만하세요, 교관님. 괜히 우리를 겁줄 생각인 거라면….”
“진짜 뭔가 오고 있어.”
불쑥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단리정이었다.
곡보옥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어차피 어디 표국이거나 상단이 이동하는 거겠지. 이 넓은 땅에서 하필 혈사련과 마주칠 일은….”
“혈사련 깃발이야!”
단리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못을 박았다.
그 말에 곡보옥은 물론 다른 생도들 역시 해쓱해진 표정으로 단리정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야? 진짜 혈사련 깃발이야?”
“맞아. 틀림없어. 게다가….”
단리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엔 사비강이 얼른 다가와 단리정을 붙잡고 물었다.
“게다가 뭐냐? 설마 뭐 포로를 이송하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일 테니까. 그치? 그럴 리는 없을 거야. 하필 우리가 여기서 포로를 이송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수업하고 있었는데, 하아필! 이곳으로 혈사련이 포로를 이송한다면… 그건 정말… 정말…!”
사비강이 단리정의 어깨를 콱 움켜쥐더니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정말… 내가 천재 교관이라는 방증이 아니겠냐?”
“예?”
이쯤 되자 단리정은 사비강의 저의가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교관님은 이걸 위해 일부러 이곳으로 우릴 데려오신 건가?’
하지만 혈사련이 여길 지나갈 거라는 걸 어찌 알고?
게다가 그들이 포로를 데리고 있다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억측이겠지.’
단리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교관님 말씀대로 포로가 있습니다. 철창에 갇힌 자들이 여러 명입니다. 복색을 보아서는 정도맹 무인들이 아닐까 싶어요.”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생도들이 연신 술렁거렸다.
“뭐야? 정말로 혈사련이 포로를 데리고 여길 지나간다는 거야?”
“맙소사. 방금 전까지 우리가 수업한 내용대로 흘러가고 있잖아? 이게 무슨 일이야?”
“하지만 그 포로가 정말 정도맹 무인인지 알 방법이 없잖아?”
그러자 단리정이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 아이를 착용한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시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의 시력만큼은 특목반 생도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로 중에 아는 얼굴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천랑단주 석지평입니다.”
이제 생도들의 표정은 아예 사색이 됐다.
‘맙소사. 진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천랑단은 주로 정도맹의 핵심 요인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곳에 잡힌 포로들 중에는 석지평보다 더 높은 위치의 수뇌 인사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당이협과 매설란이 얼른 사비강에게 다가왔다.
“주군,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습니다. 우선 생도들과 함께 이곳을 뜨는 게 좋겠습니다.”
“맞아요. 정도맹 수뇌부가 포로로 잡힌 사실을 알았으니, 최대한 빨리 맹에 이 사실을 알리고 우린 학관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사비강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에 있다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에 있다간 자칫하면 발각되어… 잠깐. 설마…?”
매설란이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데, 사비강이 활짝 웃으며 생도들을 보았다.
“하필 이곳으로 혈사련 무인들이 포로를 이끌고 지나가다니! 너희들은 아무래도 천운을 타고난 것 같구나!”
“천운… 이라뇨?”
생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봐라!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실전을 펼칠 기회가 딱 주어지지 않았냐? 마침 여기 너희들이 사용하기 좋도록 바위 더미도 잔뜩 준비되어 있잖아? 세상에 이런 완벽한 천운이 어디에 있겠냐?”
“설마 지금 우리보고 혈사련을 습격하라는 겁니까?”
“바로 그거다! 만약 너희들이 포로들을 구출해낸다면 단숨에 강호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거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무리예요. 정도맹 수뇌부조차 포로가 된 마당에 우리가 무슨 수로 저들을 상대합니까?”
조문탁이었다.
곧 목단화가 그 말에 공감했다.
“맞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에요.”
“하긴. 지형을 이용해 기습한다고 해도 기량 차이가 너무 크면….”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연우경 조차도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이렇게 되자, 다른 생도들 역시 자신감을 잃은 표정으로 사비강의 눈길을 피했다.
사비강이 생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곡보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보옥이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비강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곡보옥만큼은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딱 사비강의 생각대로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포로들을 구해야 합니다! 이건 교관님 말씀대로 기횝니다!”
“역시 그렇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냐. 자칫하면 여기서 다 죽는 수가 있어.”
연우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불쑥 끼어들었다.
곡보옥은 잠깐 움찔거렸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워서 사파 무리의 패악질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면, 그건 이미 죽은 삶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난 그런 겁쟁이로 살지 않겠어!”
그러자 연우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눈치만 살피던 곡보옥이 저런 식으로 나오니 심기가 영 불편해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내용으로만 보면 다른 생도들은 물론, 자신도 겁쟁이 취급하는 게 아닌가?
반면 사비강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호전적으로 나서는 곡보옥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속내를 숨기고는 짐짓 근엄한 척 말했다.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보옥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
“하지만 교관님, 우리가 저들을 구해야 합니다!”
“물론 그럼 좋겠지만, 다른 생도들의 도움 없이 너 혼자서는 힘들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아군이 처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아무리 내가 교관이라지만 겁을 먹고 숨고자 하는 생도들에게 무리한 임무를 강요할 수는 없단다.”
사비강이 한껏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목단화가 발끈해서 나섰다.
“이 경우는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신중한 거라고요.”
“아, 그렇군. 보옥아, 너는 동료들의 신중함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됐으니 감사하게 여겨라.”
“하지만 교관님…!”
“뭐, 포로들을 구할 수는 없게 됐지만 별일이야 있겠냐? 기껏 해봐야 총타로 끌려가서 고문 좀 당하는 정도겠지. 가령, 생니를 뽑는다거나 입을 찢고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정도? 뭐, 재수 없으면 혀를 뽑거나 피부를 벗기고 소금을 칠 수도 있겠지. 아, 산 채로 해부하거나 불에 지지기도 한다더군. 눈알은 특수 용액에 넣어서 보관하고. 크흡. 우리를 대신해 눈알을 제공한 아군 포로에게 감사하도록 하자꾸나.”
생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침내 염자량이 희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어… 교관님….”
“응? 아아,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우리가 당할 일도 아닌데. 야, 솔직히 다른 사람의 눈알이 뽑히든, 살가죽이 벗겨지든 알 게 뭐냐? 안 그래? 나만 아니면 되지. 의협심이 밥 먹여 준다냐?”
“전… 하겠습니다.”
“음? 뭘?”
“구출 작전에 동참하겠습니다. 한다고요.”
그러자 조문탁도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저도 할게요.”
“저도… 하겠습니다.”
이윽고 생도들이 하나둘 동참하더니, 맨 마지막으로 목단화가 나서며 냉랭한 투로 물었다.
“하나만 여쭤 보죠. 우리가 기습하면 승산은 얼마나 되죠?”
“그야 무조건 이기지.”
“네?”
“내가 구경만 하진 않을 테니까.”
사비강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