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귀환 마교관
117화
“사비강?”
서래향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요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가 틀림없습니다.”
“사비강이라니. 그가 누구죠?”
“왜 있지 않습니까? 일전에 비밀 분타를 궤멸시키고 탈출했던. 사환당주님도 그때 돌아가셨지요.”
“아…!”
서래향이 입을 딱 벌리고는 용모파기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용모파기를 집어 들고는 요신의 얼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확실해요? 잘 봐요. 그가 확실하냐고요.”
“음… 일단 이 용모파기가 틀림없다면….”
“용모파기는 틀림없어요. 내가 직접 보고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확실합니다. 한데 왜 그의 용모파기를….”
“이럴 수가!”
서래향이 용모파기를 팍 구기며 입술을 질끈 씹었다.
이렇게 쉽게 찾아낼 줄이야.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더니….”
지금껏 밖으로만 용모파기를 돌려대며 찾으려고 했다.
한데 이렇게 가까이에 답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하긴.
‘가득삼’이라는 정체를 혈사련 내에서 알고 있는 인물이 있을 줄은 누구라도 상상 못했을 테지.
“그럼, 이자가 그 용천관의 교관이라는?”
“그렇습니다. 용천관의 교관인데, 당시엔 그의 기이한 행보에 관내에서도 고운 시선이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최근 그에 대한 정보는?”
“제가 아는 건 그 정도입니다. 한동안 그를 주시하는 분위기였지만, 곧 정사대전으로 번지지 않았습니까? 사비강 역시 용천관에서 근신 처분을 받고 한동안 잠적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의 활약이 없다 보니 혈사련에서도 그를 추적하는 건 그만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틀렸어….”
“예?”
요신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서래향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손톱을 살짝 물었다.
‘활약이 없었던 게 아냐. 그는 누구보다도 많이 활동했어. 그리고 혈사련에 치명타를 안겼지. 나에게도!’
서래향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생각에 잠겼다.
배후가 누굴까?
한낱 교관 따위가 이렇게 강호를 휘젓고 다닐 리가 없다.
용천관에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적어도 배후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정도맹?
그렇다면, 정도맹의 어느 파벌에 속할까?
일단, 이 사실을 만통각에 알려?
만통각주 류여중이라면 분명 빠른 시일 내에 사비강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확실하게 사비강을 제거하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내 입지가 여전히 좁아져.’
그것이야말로 다 찾은 보석을 스스로 류여중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아닌가?
요신이 넌지시 물었다.
“한데 이자를 찾으시고 계셨던 겁니까? 왜?”
“몇 달 전, 호투장이 궤멸된 사건을 알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하면 그 가득삼이라는 청년이…?”
“맞아요. 바로 그 ‘사비강’이라는 남자죠.”
“그런…!”
요신 역시 놀란 표정으로 구겨진 용모파기를 보았다.
“하면 빨리 만통각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좋을까요?”
“예? 하면….”
“당신이나 나나… 권력의 중심에서부터 밀려나고 있다는 걸 느낄 거예요.”
“그건….”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었다.
서래향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사환당주와 적사, 흑호를 죽이고, 호투장을 운영하던 흑천회를 궤멸시켰죠. 그는 이미 정사대전의 핵심인물이에요. 그런 그를 우리 선에서 처리하게 된다면?”
“흑룡의 신뢰를 한 몸에 얻게 되겠군요.”
검은 천 사이로 드러난 요신의 눈동자가 빛을 품었다.
서래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예요.”
“홍묘 님의 깊은 뜻을 이제 알겠습니다.”
요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비강의 용모파기를 바라보는 서래향의 눈빛도 깊어졌다.
**
용천관의 특목각 후원.
“하압!”
조문탁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허리띠에서 우우웅, 소리가 일어나며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힘을 주던 조문탁이 이내 힘을 풀고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우, 진짜! 힘들어 죽겠네.”
조문탁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허리에 두른 벨트를 보았다.
검은 벌집.
이번에 사비강으로부터 받은 신병이기였다.
적하성에서 사비강이 검은 벌집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감격에 겨웠다.
그가 자신에게 전음을 보냈기에 저 화려하고 무지막지한 기물이 바로 자신의 것이 되리란 걸 짐작했다.
한데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음에도 조문탁에게 검은 벌집은 여전히 서역에서 건너온 허리띠에 불과했다.
“검은 벌집은 어둠 고리와 달리 마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물론 서클은 상관없다. 그저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검은 벌집의 최고 장점이지.”
자신에게 검은 벌집을 건네주며 사비강이 말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검은 벌집은 뜻한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젠장, 왜 안 되는 거지? 나도 교관님처럼 멋지게 벌떼를 부려 보고 싶은데.’
조문탁이 이맛살을 잔뜩 구기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하성에서 사비강이 검은 벌집을 사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시커먼 벌떼로 변한 돌기들이 사정없이 적들을 휩쓸 때는 엄청난 희열마저 느꼈다.
검은 벌집이야 말로 은신과 암기를 주특기로 다루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신병이기였다.
한데….
“이래서야 돼지 목에 걸린 진주일 뿐이잖아.”
한숨을 내쉬던 조문탁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동기들이 부러워하는 선물이다.
이 신병이기가 언제까지나 자신의 것이 되리란 보장도 없다.
어떻게든 사용법을 터득해야 한다.
조문탁은 다시 기마자세를 취한 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흐아아압!”
온몸에 힘을 주며 음양환유마나심법을 운기했다.
그러자 단전에 결집해 있던 내공이 서서히 혈맥을 따라 심장 쪽으로 모여 갔다.
중단전 가까이에 이른 내공은 음양환유마나심법에 의해 자연스럽게 마나의 기운으로 변환됐다.
‘좋아!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조문탁은 심장에 응집된 마나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의지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허리띠의 떨림이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조금만 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팔과 어깨, 다리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흐으으읍!”
우우우웅!
벨트의 돌기가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살짝 떠올랐다.
벨트의 면에서 한 촌(寸) 정도나 될까?
그야말로 손가락 한 마디 수준.
‘좀 더 내 의지를!’
“흐아아아아압!”
전에 없던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그러다 똥 싸겠다. 그만해라.”
불쑥 들린 목소리.
그 바람에 허리띠에서 한 촌 정도 떠올랐던 돌기들이 일제히 허리띠에 다시 부착되고 말았다.
의식이 흐트러진 조문탁이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사비강을 원망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아, 교관님! 이제 조금만 하면….”
“똥을 쌌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그럼, 지렸나?”
“교관님!”
“넌 애초에 방법이 틀렸어. 아니 이해를 못하고 있어.”
사비강의 진지한 지적에 조문탁의 표정도 어느새 진중해졌다.
“마나를 다스리는 일은 물속에서 유영하는 것과 비슷해. 어떤 면에서 보자면 내공보다 훨씬 다루기가 쉽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다만, 여기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게 뭐죠?”
“공기 중에도 마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곳 중원에는 ‘마나’라는 것이 공기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면…?”
“그와 비슷한 ‘정기(精氣)’라는 것이 존재하지.”
“정기….”
“그래, 다소 결이 다르지만 그 정기를 느끼고 마나와 비슷하게 인식하면 된다.”
‘쳇, 말이 쉽지….’
조문탁이 내심 투덜거리는데,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더니 몸을 휙 돌렸다.
“따라와.”
“헉. 갑, 갑자기 왜요?”
조문탁이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가? 독심술?’
왠지 사비강은 그런 걸 할 줄 알아도 놀랍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데 사비강이 조문탁을 데리고 간 곳은 바로 개울가였다.
몇 달 전, 사비강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빙어를 잡던 그곳.
“교관님, 여긴 왜…? 엇!”
멍하니 묻던 조문탁을 사비강이 툭 떠미는 것이 아닌가?
풍덩!
“우왁! 어푸푸!”
얼른 수면 위로 솟아오른 조문탁이 울상을 지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기억 나냐? 거기서 빙어를 잡을 때.”
“뭐… 네. 기억은 합니다만.”
“그 빙어를 잡는 기분으로 음양환유마나심법을 운공하고 마나를 느껴 보아라.”
“아…!”
조문탁이 뭔가를 깨달은 듯 얼른 물속에서 기마자세를 취했다.
단전의 내공을 느끼고, 그 내공을 중단전 가까이 끌어올린 다음 음양환유마나심법의 구결대로 운기한다.
심장에 쌓인 마나를 느끼면서 의지력을 불어넣고….
‘아…!’
마나가 몸속을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듯하다.
마치 몸이 물과 하나가 된 듯하고, 몸속에 흐르는 마나는 여러 마리의 물고기가 된 듯하다.
뿐만 아니라 몸이 물속에 잠겨 있으니, 물고기는 몸 밖으로도 자연스럽게 헤엄쳐 나오게 된다.
우우우웅!
허리띠가 진동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문탁도 그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그의 의식은 물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있었기에.
촤아아아아.
검은 벌집에 돋아난 돌기들이 물속에서 일제히 흩어지며 뻗어 나갔다.
그 흐름을 느끼며 조문탁은 돌기들을 부드럽게 유영시켰다.
쏴아아아아!
마치 빙어 떼처럼 변한 검은 돌기들이 물속을 이리저리 빠르게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비강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피었다.
‘후후. 제법이군.’
어느 순간 물속을 유영하던 빙어 떼들이 물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잠영을 하곤 했다.
촤아아아아!
촤라라라락!
그렇게 몇 번을 수면 위로 솟구쳤다가 가라앉길 반복하던 어느 순간,
촤아아아아아!
빙어 떼는 이제 벌떼로 변하면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더 이상 물속에 머물지 않아도 조문탁은 정기 속에서 마나의 흐름을 감지해낸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이 날아다니는 듯 홀가분한 마음.
그렇게 얼마나 허공을 휘저었을까?
어느 순간, 벌떼들이 급속히 물속으로 가라앉더니 벨트로 돌아와 제자리에 박혔다.
흥분에 겨워 너무 오랫동안 벌떼를 부리느라 마나를 모두 소진해 버린 탓이었다.
내공과 마나를 모두 소진한 상태였기에 내내 물속에 있었던 조문탁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고… 어지러워라. 헤헤.”
뒤통수를 긁적이던 조문탁이 그만 풍덩 물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몸을 가눌 기운조차 없었던 것.
마나 소모량이 이처럼 극심하다는 것은 역시 검은 벌집의 최대 단점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개울가에서 팔짱을 낀 채 혀를 차는 사비강을 보았다.
‘저 인간… 나 구해 주긴 하겠지?’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조문탁은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
용천관.
정문에 큼직하게 새겨진 글자를 올려다보던 천세명은 새삼 감회에 젖어들었다.
사비강의 이의 제기로 인해 그간 근신 처분을 받았던 천세명.
이 얼마 만에 다시 밟아 보는 학관의 땅이란 말인가?
역시 자신은 생도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학관이 딱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다.
관내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바람결에 굴러가는 늦가을 낙엽조차도 정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을 붙일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사비강… 이놈 내 반드시…!’
천세명이 이를 뿌득 갈았다.
마침 등부형이 그를 마중 나왔다.
“천 부장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잘 오셨습니다. 복직을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이오. 등 교관. 그간 무탈하셨소?”
“덕분에요. 다만, 부장님이 부재 중이시다 보니 처리해야 할 많은 사안들이 좀 밀려 있습니다.”
“그건 내 몫이겠지. 어서 갑시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사비강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피어오르는 살심.
하지만 천세명은 내심을 잘 다스리고는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사 교관.”
“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천 부장님 아니십니까?”
“허허.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졌소. 나 자신에 대해서 반성도 많이 했소.”
“하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요. 뭐, 사실 믿기 어렵지만요.”
“뭐요?”
천세명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하여튼 이 작자는 도대체가…!’
사비강이 얼른 말을 둘러댔다.
“사실 저도 근신 몇 개월 받았지만, 좀처럼 제 인성이 바뀌진 않더군요. 그래서 깨달았지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그가 수십 년의 생을 살아 보면서 인간에 대해 깨달은 것은 그것 하나였다.
인간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천세명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그거야 그 사람의 인품에 따라 다른 것 아니겠소?”
“그러길 바랍니다.”
사비강이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