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귀환 마교관
95화
매설란은 눈을 번쩍 떴다.
‘방금…!’
비명 소리.
그렇다.
분명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심장이 뛰었다.
사방이 어둑한 가운데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더라?’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계속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어지럽다.
‘그래, 사비강 교관과 산길을 걷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낯선 집에서 잠을 청했다.
선남선녀 부부가 살던 외딴 집.
여긴 바로 그 집이다.
팍!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
머리가 핑 돌았다.
침상에서 내려서려는데 중심을 쉽게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내 몸이 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사, 사 교관님! 사비강 교관님!”
그녀가 얼른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사비강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 없잖아?’
그녀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악착같이 걸음을 옮겨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가는데….
“끼야아아아악!”
다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매설란은 흐릿한 정신을 붙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터지면서 턱을 따라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안마당에 베르타스를 쥔 사비강이 서 있었다.
검 끝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한 남자가 가슴에 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심장이 뚫린 것으로 보아서는 즉사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사비강의 다른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는데, 그 손 역시 핏물로 젖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그 아리따운 여인은 남자를 품에 안고 절규했다.
“으아아아아아아!”
한참이나 울부짖던 여인이 고개를 휙 돌리고 사비강을 쏘아보았다.
“이 나쁜 자식!”
“미안하게 됐다.”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내 남편을 죽였어!”
“어쩔 수 없어. 너희들은….”
“닥쳐! 내가 반드시 널 죽이고 말 테다!”
찰나 여인이 붕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비강에게 다가서는 게 아닌가?
‘무공을 쓸 줄 알아?’
뜻밖의 상황에 매설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론 사비강이 재빨리 몸을 뒤트는 바람에 그녀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죽어 버렷!”
여인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연이어 공격을 가해 왔다.
순간, 사비강이 금나술을 펼치며 여인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곧 일장을 뻗었다.
퍼엉!
강기를 얻어맞은 여인의 앞섶이 터져 나갔다.
“커억!”
피를 토하며 날아간 여인이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드러난 가슴을 온전하게 가릴 수는 없었다.
보고만 있던 매설란이 얼른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사 교관님!”
“빠져 있어.”
“하지만 어째서 저들하고…!”
그러자 여인이 매설란을 돌아보며 외쳤다.
“저 새끼가 내 남편을 죽이고, 이제는 나까지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왜…?”
“반지 때문에! 남편이 끼고 있던 반지를 탐내서죠!”
여인의 손가락이 사비강의 왼손을 가리켰다.
핏물에 젖어 있던 손이었다.
매설란이 가만히 보니 과연 그 손에 들린 뭔가가 반짝였다.
“설마… 정말 그 반지를 빼앗으려고 죽인 건가요?”
“뭐… 그렇지.”
사비강은 부정하지 않았다.
매설란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고작 그딴 장신구를….”
소리치던 그녀가 흠칫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설마?
얼마 전부터 사비강이 말했던 장신구.
그게 지금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양이다.
이런 식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준다니.
그게 제아무리 금은보배라도 절대 사양이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전…!”
“내가 말했잖아. 별일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라고.”
“대체 무슨…”
“매 소저는 끼어들지 마.”
“그럴 순 없어요. 당신 정말 사파 녀석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마침내 매설란이 아예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요. 납득이 될 만한 이유를 말해 주세요.”
“보다시피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잖아?”
“그래도 뭐라고 설명을…!”
“정말 어쩔 수가 없군.”
사비강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다음 순간.
화르르르륵!
매설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비강의 손에 시뻘건 불덩이가 맺히는 게 아닌가?
찰나.
쑤아아아앙!
불덩이가 그대로 매설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꺄악!”
매설란이 얼른 몸을 숙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덩이가 노린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불덩이가 그대로 등 뒤에서 터졌다.
퍼엉! 화르르륵!
“캬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고막을 때렸다.
매설란이 얼른 돌아보자 온몸에 불이 붙은 여인이 마구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안 돼!”
매설란이 달려가려는데.
“그냥, 두고 봐.”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사비강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뭐라고 하려는데.
“뒤에서 설란을 공격하려고 한 녀석이야. 지금은 날 믿어.”
“하지만 당신 손에 들린 그건…!”
“그러니까 일단 두고 보라고.”
사비강은 시종 담담한 표정이었다.
결국 매설란도 더 이상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에 타는 여인을 말없이 지켜보는 것 역시 힘든 일이기에 아예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그때.
“자, 지금부터야. 똑똑히 봐 둬.”
매설란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헛!”
그녀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캬아아아아아!”
연신 몸부림을 치던 여인의 몸이 점점 꿈틀거리며 변하더니 커다란 구렁이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뭐, 뭐예요? 저게? 어떻게 된…?”
“저기도.”
사비강이 가리킨 곳은 남자가 쓰러진 곳이었다.
그곳에도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음양쌍환사(陰陽雙幻蛇).”
“……!”
“들어는 봤겠지. 음기와 양기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영물이지. 두 마리가 항상 붙어 다니는 것도 특징이고.”
“그럼… 저 부부는 처음부터….”
“그래, 인간이 아닌 음양쌍환사야.”
“설마 이 집도 그럼… 앗!”
말을 꺼내던 매설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번듯하게 세워져 있던 건물이 순식간에 기암괴석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그녀가 누웠던 침상은 어느새 평평한 바위로 변해 있었다.
취르르르르!
상처를 입은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바위 옆을 스르르 미끄러졌다.
하지만 깊은 상처 때문인지 녀석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사비강이 구렁이 곁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이 녀석은 음환사. 암컷이지.”
취리릿!
음환사가 사비강을 경계라도 하듯 몸을 세우고는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이미 힘을 잃은 녀석은 사비강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사비강이 그래비티 마법을 펼치자, 녀석의 머리가 땅바닥에 달라붙을 듯 내려앉았다.
콰직!
베르타스가 녀석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매설란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오랜만에 뱀탕으로 몸보신을 좀 해야겠군.”
“혹시… 찾는다는 보물이 음양쌍환사였나요?”
“아니, 이거.”
사비강이 말을 마치고는 축 늘어진 음환사를 쥐고 일어섰다.
다음 순간, 그가 단도를 꺼내 음환사의 배를 길게 가르는 것이 아닌가?
마침 갈라진 배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귀고리?’
분명 음환사가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 귀에 차고 있던 것들이었다.
“애초에 이계에서 온 물건이지. 아마 결계 안에 들어 있었을 거야. 그런데 이놈들이 먹어치운 거야.”
“그게… 뭔데요?”
“반지는 차고만 있어도 내력을 조금씩 회복시켜 주는 물건. 그리고 귀고리는 착용하는 순간 마나의 양을 오 할 증가시켜 주는 물건이지.”
“마나를…?”
“그래. 마나를 내공으로 치환할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내공이 기존의 절반가량 상승한다는 거군요.”
“맞았어.”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자, 선물이야.”
“이걸… 저한테?”
“객잔에서 말했잖아. 청혼할지도 모른다고.”
“청, 청혼이라니! 그걸 지금 이런 곳에서….”
“호오. 이런 곳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뜻인가? 크크.”
“그,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후후후. 농이야. 그냥 주는 선물이야. 매 소저는 앞으로 날 많이 도와줄 사람이니까.”
“하, 하나도 재미없다고요.”
매설란이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어딘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귀한 물건인데….’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 챈 것인지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받아 둬. 앞으로 나와 함께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니까.”
“뭐… 정 그렇다면야.”
“하여튼 춘대래라니깐.”
“이상하다고요. 그런 별호.”
매설란이 고개를 휙 돌리면서 쏘아붙였다.
하지만 내심은 싫지 않은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여행을 갔다고?”
“네, 매설란 부교관과 함께 여행 중으로 보입니다.”
“이런 시기에 여행이라….”
구윤이 섭선을 살랑살랑 흔들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비령의 보고가 이어졌다.
“직접 본 바로는 굉장히 가벼운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무거운 부조리를 깼지.”
“정말 그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비령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그만큼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질문이었다.
구윤도 쉽게 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에게 의사를 물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보통 이런 경우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침내 구윤의 입이 열렸다.
“기존의 보고를 훑어봤지. 그 사비강이라는 자, 재미있더군. 용천관에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했어.”
“하지만….”
“만약 그가 정도맹에서도 그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학관과 정도맹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하하하! 비령도 이제 날 가르치는구나.”
“죄송합니다!”
비령이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하지만 구윤은 개의치 않는 듯 섭선을 내저었다.
“다그치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일어나.”
“주제넘었습니다.”
“네 말대로 맹과 학관은 다르지. 하지만… ‘부패’라는 녀석의 성질은 어디에서나 같은 법. 그렇다면 그자가 여기서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용천관에서 행한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어쩌면 여기서도….”
“혜성각에서 검토를 해보심이 어떤지요?”
혜성각은 천안각에서 올라온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기관이었다.
군사의 직속 기관으로 구윤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수하들이기도 했다.
해서, 구윤은 혜성각 내에서도 ‘밀사대(密事隊)’라는 조직을 구성해 별도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들은 등왕패에게 달라붙은 천안각이 고의적으로 누락한 정보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곤 했다.
구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군사 일을 맡으면서 분석과 이론만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때론, 그 분석을 뛰어넘는 감각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것도. 지금이 딱 그래. ‘사비강’이라는 자를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이해가 안 되는 것투성이야. 아니, 오히려 분석 자료만 취합하면 이자는 명명백백하게 마인(魔人)이야. 하지만 택마인주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어. 결국 지금은 분석보다는 감이 필요해. 그리고 내 감은 그를 이용하라고 소리치고 있어.”
“…….”
비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은 본 적이 없었다.
구윤이 천천히 일어났다.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움직여 봐야겠어. 그를 만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