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귀환 마교관
91화
“정, 정말 약속 지킬 거지?”
“그렇다니까. 크크.”
마수괴는 사비강에게 부지런히 음식을 떠먹였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사비강과 백토 중에서 자신의 구원자를.
지금 이 순간, 사비강은 백토로부터 자신을 구해 줄 유일한 인물이었다.
만약 백토에게 달려가서,
“사비강이라는 자가 화로를 전부 얼려 버리고, 갑자기 불덩이도 만들어내어서 절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도저히 고문을 못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치면 뭐라고 할까?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일장에 자신을 때려죽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사비강과 손을 잡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마수괴는 아이처럼 단순했다.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식을 갖다 주고 몇 가지 심부름만 하면 사비강은 자신이 백토에게 혼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조했다.
지금은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심부름도 제대로 했겠지?”
“해, 했다. 네, 네가 한 말. 그, 그대로 전해 주었다.”
사비강이 시킨 심부름은 간단했다.
붉은 천을 들고 장외로 가면 접근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 했다.
바로 귀영부 조직원이지만, 마수괴가 그 정체까지 알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 조직원에게,
“최대한 아이들의 경험 위주로.”
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마수괴로서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사비강이 흡족한 듯 웃었다.
“잘했네. 쩝쩝.”
“그런데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알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말한 건?”
“그것도 여기.”
마수괴가 품에 든 붉은색 약병을 보여주었다.
원래 사비강의 소지품이었던 힐링 포션이었다.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잘했다.”
사비강은 우적우적 잘도 받아먹었다.
마침내 그릇까지 삭삭 긁어서 먹여준 후에야 사비강이 꺼억, 소리를 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잘 먹었다.”
“하, 하지만 내가 너한테 이렇게 했다는 건….”
“알아, 알아. 비밀로 하자고.”
“그, 그래. 그럼 이제 저것도….”
마수괴의 손가락이 한쪽에 얼어붙은 화로를 가리켰다.
“알았다.”
사비강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파이어 에로우(Fire arrow).”
그가 읊조리자 거짓말처럼 그의 손바닥에 불덩이 화살이 맺혔다.
슈슈슉! 슈우욱!
화르르륵!
일곱 개의 화로에 저마다 불화살이 날아가더니 금세 뜨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마수괴는 그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조만간 날 구하러 사람들이 올 거다. 그때 네놈은 꼭 살려 주마.”
“고, 고마워.”
“고맙긴. 약속은 지켜야지.”
**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특목각 후원에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염자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은밀히 진행해야 해.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
그 말에 생도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경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저지른 짓은 들키게 될 거다. 만약 사비강 교관님을 구출한다고 해도 학관에서는 우리를 징계할 수도 있어.”
“난 이미 각오가 되어 있어.”
곡보옥이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비강 교관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조문탁이었다.
그러자 단리정과 능소소를 비롯한 생도들이 저마다 나서며 다짐을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비강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생도들이 이제는 그를 구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이제 생도들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남은 목단화에게 향했다.
마침내 그녀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내가 빠지면 아무래도 전력이 약해질 테니까 어쩔 수 없지. 같이… 갈게.”
마지못한 듯 꺼낸 말에 생도들이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염자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하자.”
생도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특목각을 막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엇?”
염자량이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눈앞에 당이협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닌가?
염자량 뿐만 아니라 생도들 모두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제길, 하필 출발하기도 전에…!’
염자량이 입술을 질끈 씹고는 말했다.
“막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교관님을 구출하러 갈….”
“이대로 가면 너희들은 전부 죽을 거다.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침묵하라고 한 적 없다.”
“하지만 저희들을 막으면….”
“막은 적도 없어.”
“… 네?”
염자량을 비롯한 생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침 그들 뒤로 한 여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그 정도 기세로 사비강 교관님을 구할 수 있겠니? 앞을 막는 자가 나타나면 일단 들이박고 봐야지.”
“교관님들….”
“지금부터 관외 수업이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와.”
생도들의 표정에 희색이 돌았다.
“알겠습니다!”
**
“관외 수업을?”
은기륭이 뒤를 돌아보았다.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젯밤에 갑자기 신청했습니다. 당 교관이 직접 찾아와서.”
“흐음. 관외 수업이라….”
관외 수업이란, 학관을 벗어나서 수업을 한다는 뜻이다.
다만, 연무기행처럼 오랜 시간 여행을 하는 게 아닌,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열흘 정도의 외출을 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물론, 특목반에서 갑자기 관외 수업을 신청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남달랐다.
“우선은 허락했습니다.”
주유천의 말에 은기륭의 눈매가 좁혀졌다.
“주 학장께서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 압니다.”
“허어, 그런데도 허락을 하셨소?”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런 뜻은 아니오. 그저… 주 학장께서도 많이 변한 듯하여. 허허허.”
주유천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확실히 자신은 변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관칙에 위배되는 것은 일절 봐주지 않았다.
물론, 특목반이 아직까지는 관칙을 위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관칙을 어기리라.
그걸 알고도 허락해 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물러졌단 말인가?
그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은기륭이 부드럽게 일렀다.
“휘는 칼은 부러지지 않소.”
“하나, 휘는 칼이 더 다루기 어렵지요.”
“잘만 다룬다면 더 훌륭한 무기가 될 수도 있소.”
“새겨듣겠습니다.”
은기륭이 푸근한 미소를 지은 후 창가로 걸어갔다.
“일단은 알겠소. 별 일이나 없으면 좋겠구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주유천은 그리 생각하며 가만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산중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장원.
바로 백토가 머물고 있는 혈사련의 비밀 분타였다.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는 한 인영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단리정이었다.
그의 곁으로 한 남자가 훌쩍 날아올랐다.
“어떤가?”
당이협이 물었다.
“장원 정문을 지키는 자들이 다섯, 벽을 따라 일장의 간격을 두고 한 명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사비강 교관님이 갇혀 있을 만한 곳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됐다.”
당이협의 말에 단리정이 돌아보았다.
당이협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장원 지도가 대략이나마 표시된 종이였다.
“장원 북쪽으로 가면 암벽이 있다. 그곳에 동혈이 하나 있는데, 교관님과 생도들이 그곳에 갇힌 듯하다.”
“그렇군요.”
“얼마나 제거할 수 있겠느냐?”
“운 좋으면 두 명. 한 명은 확실합니다.”
“운은 계획이 될 수 없다. 무조건 두 명이다.”
단리정이 흠칫거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아, 믿는다.”
당이협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무 아래에는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당이협의 표정에 걱정이 서렸다.
귀양부의 서신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생도들을 작전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그의 생각 같아서는 최대한 이들을 배제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사비강은 그 반대를 주문했다.
철저히 생도들 중심으로 구성하라고 했다.
해서, 정문을 뚫는 건 생도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물론, 여차하면 자신의 수하들이 나설 것이다.
“문탁과 단화가 선공을 맡는다. 신호는 단리정의 화살이다.”
“알겠습니다.”
검은 무복을 착용한 조문탁과 단화가 즉각 대답했다.
두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소소가 그 뒤를 받치기로 했다.
아직도 실감이 되진 않지만, 그녀가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이후 습격이 무난하게 진행되면 귀야채 무인들도 투입될 거다.
지금 고적산이 귀야채 무인들을 이끌고 언제든 투입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
그렇게 두 생도가 걸어가는 모습을 수풀 한쪽 구석에서 쥐 한 마리가 지켜보았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쥐의 두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혀 있다는 것이었다.
쥐가 두 사람을 쫓아 달렸다.
**
사비강의 눈동자는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어느 순간 사비강이 발작처럼 소리쳤다.
“야이, 씨! 거기서 그렇게 휘두르면 어떡해? 아우, 그걸 아직도 헤매고 있어? 그렇지! 옆으로 피해야지! 그래, 그거지! 아니지! 이런 젠장! 저 비겁한 새끼들! 뒤통수를 치려고 해? 뭐하고 있냐? 당장 그놈부터 죽여 버려야지!”
눈이 뒤집힌 채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비강의 모습은 마치 잠꼬대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든 채 지켜보던 마수괴가 마음을 졸이며 눈치를 살폈다.
“뭐, 뭐야? 너 왜 그래?”
“이런 썅! 저 개새끼, 당장 죽여! 어서! 놓치면 안 된다!”
“누, 누굴? 그 개새끼가 누군데?”
마수괴가 화들짝 놀라면서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사비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따금씩 소리치곤 했다.
사실 그는 옵저버 마법을 이용해서 생도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집중을 하면서 혼잣말을 떠들게 된 것이다.
마침내 허옇게 뒤집혔던 사비강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사비강이 씨익 미소를 그렸다.
“때가 됐다.”
“때가 됐다니? 무슨 때?”
“날 풀어라.”
“뭐?”
“한바탕 설쳐 볼 때가 됐거든. 이제 날 풀어.”
“하, 하지만 그건…!”
마수괴가 안절부절 못하며 더듬거렸다.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어도 그것만은 어렵다는 듯.
사비강이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어차피 이깟 고철더미 녹여 버리면 그만이야. 어서 풀어라. 내가 직접 녹이지 않는 건 힘을 아끼기 위해서야.”
“그, 그래도… 그것만은….”
“잘 들어. 내가 풀면 넌 뒈진다.”
“뭐라고? 약속했잖아! 날 살려 주기로!”
“그랬지. 어디까지나 내 말을 잘 듣는다면.”
“정, 정말 널 풀어 주면 내가 살 수 있어?”
“그래. 내가 그 하얀 토끼를 잡아먹으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알, 알았어.”
마수괴가 주섬주섬 허리춤에 찬 열쇠를 꺼내 들었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그로서는 이 공진철을 끊어 낼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화염 마법을 사용해서 녹여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공진철이 내공을 억누르긴 하지만, 마나까지 억누르진 못했으므로.
한데 뜻밖에도 공진철의 내구성이 강해 화염 마법에도 쉽게 녹질 않았다.
그래서 사비강은 고문관을 구워 삶기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철컥!
마침내 사비강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 풀렸다.
우두둑. 뚜둑.
목을 이리저리 꺾은 사비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아, 그럼 어디 놀아 볼까?”
**
“흐음.”
하얀 토끼 가면을 썼던 환영야차 함가조.
그는 언벽과 함께 베르타스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확실히 예사 물건은 아닌 듯한데….”
세공 솜씨로 보아서는 저자거리의 흔한 칼자루가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장점을 찾기도 힘들다.
다만….
‘처음 쥐었을 때의 그 느낌은 우연이었던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질감.
마치 검이 살아 있다는 착각마저 드는.
그런데 그때뿐이었다.
그 이후로 베르타스는 그저 잘 만들어진 검에 불과했다.
곁에 있던 언벽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운진 교관이 이 칼에 대해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소.”
“어떤 의심을?”
“이 칼을 쥐었던 생도가 제 동료를 죽일 뻔한 적이 있었소.”
“하나 이렇게 봐선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아무래도 사비강을 찾아가 물어봐야겠소.”
대략 열흘 정도가 흘렀으니 그놈도 이제 입을 열 때가 되었으리라.
마수괴는 함가조가 가장 믿는 고문관 중 하나였다.
역겹게 생긴 변태였지만, 고문 기술 하나는 확실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그가 베르타스를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때였다.
문득 밖에서 기의 동요가 느껴졌다.
‘침입자?’
마침 기척을 감지한 언벽도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침입자들이 있는 모양이오! 이곳은 비밀 분타인데 어째서…!”
그때였다.
갑자기 베르타스가 우우웅 떨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함가조가 깜짝 놀라서 베르타스를 콱 움켜쥐었다.
‘크읏! 이게 갑자기 왜 난리를…!’
우우우우웅!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헛!”
이제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투둑. 툭.
그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이상한 낌새를 챈 언벽이 그를 불렀다.
“괜찮으시오? 함 당주.”
“크읏…! 저리… 가시…!”
“갑자기 왜….”
찰나.
“크아앗!”
슈아아아악!
함가조의 손에 들린 베르타스가 그대로 뻗어 가더니 언벽의 심장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언벽의 동공이 팽창했다.
“커억! 당… 주…?”
“제기랄!”
가까스로 베르타스를 손에서 놓은 함가조가 눈을 부릅뜨고는 물러났다.
언벽의 가슴에 꽂힌 베르타스는 그렇게 꿀꺽꿀꺽 피를 머금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