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89화 (89/670)

# 89

귀환 마교관

89화

“실수라? 어째서인가?”

백토가 이채를 띠며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죽음을 앞당겼으니 실수지. 하지만 적어도 나처럼 위대한 자에게 죽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지.”

“후후후. 정말이지 적사에게 들었던 대로 어디로 튈지 모를 녀석이로구나. 좋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당연히 알지. 하얀 토끼.”

“훗. 네가 이 백토를 알고 있었다고?”

“물론이다. 뭐,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이름만은 들어봤다.”

“호오, 내 이름이 밖으로 새어나가진 않았을 텐데, 어디서 들었다는 거냐?”

“너희들이 망할 때 한 번. 그리고 네가 죽을 때 한 번.”

“뭐라?”

백토가 이맛살을 구겼다.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사실, 나는 미래에서 왔거든.”

“…….”

“…….”

“하하하하!”

백토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뒤에서 눈치를 살피던 고문관이 그제야 히죽거리며 웃었다.

백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비강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아주 재미있는 친구로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크. 그런가? 너는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네.”

“허허. 미래라…. 그래, 미래에서 자네는 무얼 보았나? 내 손에 죽어 가는 자네를 보았나?”

“크크크. 그럴 리가. 혈사련이 망하는 걸 보았다니까.”

“혈사련을 안다는 거군.”

백토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비강이 조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혈사련이 망하고 너는 잠적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도륙당해서 죽게 되지.”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그렇다. 사지가 찢어져서 죽는다.”

사실이었다.

백토는 혈사련이 망하는 순간 잠적한다.

하지만 추후 마계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이름 모를 마수의 손에 사지가 찢어져 죽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백토로서는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제 보니 망상 증세가 심각한 환자를 데려왔군.”

“하지만 걱정 마라. 내가 여기까지 온 이상, 너의 미래는 변하게 될 테니까.”

“어떻게 변한다는 건가?”

“적어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죽진 않지. 곧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백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특이한 교관 하나가 있다고 들었다.

그 녀석이 이번 거사를 망친 주범이었다.

게다가 흑살대주를 죽이고, 적사와 흑호를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펼친 자.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어떤 놈인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사환당 소속의 환살단을 모두 총타로 돌려보내고도 자신이 이곳에 남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사비강을 생도들과 함께 생포했으니 정도맹에서도 비상이 걸렸으리라.

적어도 후기지수들을 처리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한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마치 정도맹은 이 사비강이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나?

그래서 직접 고문실까지 찾아왔다.

대화나 나눠 보려고.

그런데 이게 뭔가?

그냥 미친놈이 아닌가?

아니면 이것도 설정에 지나지 않는 걸까?

백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꺼냈다.

“적사가 말하더군. 네놈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렇게 강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혹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그랬다면 최근 그 실력을 드러낸 이유가 뭔가? 그도 아니면 갑자기 무공이 깊어진 기연이라도 얻은 거냐?”

“흐음. 사실대로 말해 주길 바라나?”

“그래야만 할 걸세.”

“사실… 네 말대로 난 나약했지. 아주 형편없을 정도로.”

“한데?”

백토가 눈을 빛냈다.

원래 나약했던 인간이 갑자기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면 엄청난 기연을 얻었을 터.

백토가 얼른 다그쳐 물었다.

“말해 보게. 무슨 일이 있었나?”

“미래에서 돌아온 후로 난 아주 강해졌지.”

“…….”

백토가 주먹을 콱 말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뒤에 서 있던 고문관이 안절부절 못하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저 미친….”

그때, 사비강이 불쑥 백토를 불렀다.

“이봐, 하얀 토끼. 아니지, 환영야차(幻影夜叉) 함가조(咸歌鳥). 사실을 말해도 왜 믿질 못하나?”

순간 백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놈은 정말로 날 아는구나. 도대체 어디서 입수한 정보냐!”

“글쎄, 미래에서 왔으니까….”

“닥쳐라!”

짜악!

백토가 손을 휘둘러 사비강의 뺨을 후려쳤다.

무인이 뺨을 얻어맞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치욕이었다.

그럼에도 사비강은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백토가 부들부들 떨다가 몸을 휙 돌렸다.

“놈의 주둥이가 제 역할을 할 때까지 사정을 두지 마라!”

“예, 알, 알겠습니다요.”

고문관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런데 고문실을 나가려던 백토가 멈칫거리고는 눈길을 돌렸다.

‘저 검은…?’

거치대에 걸려 있는 것은 베르타스였다.

어차피 사비강은 현재 내공을 운용할 수 없도록 공진철(功鎭鐵)로 구속된 상태.

즉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검을 끌어들이거나, 이기어검 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흐음.”

백토가 베르타스 앞으로 걸어가서 침음을 흘렸다.

원래는 사비강에게 이 검에 대한 것도 물어 볼 생각으로 이곳에 둔 것이다.

하지만 저 상태로 보아서는 쉽사리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았다.

“이건 내가 가져가마.”

“알, 알겠습니다. 살, 살펴 가십시오.”

고문관이 고개를 조아리자, 백토가 베르타스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흐읍!”

그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이한 기운이 그의 손을 비롯해 전신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이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르타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백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역시 예사로운 검이 아니다.’

겉모양으로만 봐서는 마치 서역에서 건너온 것 같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베르타스를 들고는 고문실을 빠져 나갔다.

고문관이 화로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꺼내 들었다.

“흐흐. 흐헤헤. 미, 미리 말했지만… 비, 비명은 참지 마. 나, 난 그 소리를 좋아하거든.”

“크크. 이봐.”

“왜, 왜?”

“배고파. 고기 좀 줘. 토끼를 봤더니 토끼 구이가 먹고 싶어졌어.”

“흐히히히힉! 여, 역시 넌 대, 대단해. 마, 마음에 들어. 먼, 먼저 네 살부터 구워 보자. 흐히힉!”

고문관이 사비강의 가슴에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들이댔다.

치이이이익!

**

흑룡 탈을 쓴 남자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 단상 아래로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역시나 짐승의 탈을 쓰고 있었다.

흰 호랑이 탈을 쓴 백호(白虎), 붉은 봉황 탈을 쓴 주작(朱雀), 검은 뱀거북이를 형상화한 현무(玄武), 그리고 붉은 고양이 탈을 쓴 홍묘(紅猫)였다.

그 중에서도 홍묘는 치마가 길게 찢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희끗 드러나는 새하얀 다리는 숨이 멎을 정도로 매혹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백호와 주작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흑룡 다음으로 권력이 막강한 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최근 의견이 맞지 않아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백호가 먼저 나섰다.

“련주님. 이번 거사는 결국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작의 무리수로 오히려 혈사련에 위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쯤에서 멈추고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흥! 나약해빠진 소리! 거사는 절반의 성공이오! 련주님. 애초에 목표한 바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 일을 방해한 교관 둘과 몇몇 생도들을 납치했습니다. 게다가 백리세가와 태천문의 생도를 죽였으니, 정파 녀석들도 동요할 것입니다.”

“동요는 무슨! 어설프게 자극을 시켜서 정도맹이 정신만 차리게 만들지 않았소?”

“시끄럽소! 그럼 백호는 그동안 뭘 하셨소? 언제까지 우리가 정파 놈들 눈치만 보면서 쉬쉬하며 살아갈 거요? 이젠 우리도 충분한 힘이 생겼소.”

“그래봐야 강호의 삼 할을 겨우 넘겼소.”

“그렇지! 이 할도 되지 않았던 사파의 무리를 연합시켜 삼 할을 넘겼으니, 더 이상은 숨어 지낼 필요가 없소!”

“그래도 더 신중하게…!”

“그만.”

흑룡이 입을 열자, 백호와 주작이 얼른 말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짤막한 한 마디였지만, 그 육중한 음성에 심후한 공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환당주는?”

“현재 비밀 분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곳에 교관 둘과 생도들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다만, 환살단은 총타로 귀환했습니다.”

주작이 얼른 대꾸했다.

흑룡은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더니 곧 천천히 탈을 벗었다.

이내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혈사련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짙은 눈매와 얇게 다물어진 입술.

어떠한 감정도 스며들 틈이 없을 것처럼 단단한 표정이다.

백호의 표정에는 암담함이, 주작의 표정에는 희열이 차올랐다.

면구를 벗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오늘부로 혈사련은 정식으로 출범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홍묘는 남고, 모두 물러가라.”

이에 세 사람이 몸을 물렸다.

홀로 남은 홍묘가 매혹적인 미소를 그리며 흐느적흐느적 다가왔다.

“감축드립니다, 련주님.”

“저 둘의 골이 더 깊어지지나 않을지 모르겠군.”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태사의 곁으로 다가선 홍묘는 익숙한 듯 어깨에 걸친 옷자락을 내렸다.

사라라락.

얇은 옷자락이 흘러내리자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말없이 가면을 벗고 태사의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허무극의 다리를 더듬어 갔다.

마침내 허무극의 남근을 움켜쥔 그녀가 탄탄한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으음.”

허무극의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

천랑각.

본래 용천관의 지객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은 이제 ‘천랑각’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그 현판을 볼 때마다 교관들이 혀를 끌끌 찼다.

“천랑단이 아주 용천관 주인 행세를 하려는군.”

“어쩌겠나? 정도맹주를 대신해 오셨다는데 알아서 모실 수밖에.”

“쳇, 석지평 녀석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 교관으로 있었으면서 어찌 저리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단 말인가?”

날이 갈수록 교관들의 불만은 쌓여갔지만, 누구 하나 떳떳하게 나서서 말하진 못했다.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리는 태도와는 달리 석지평 앞에서는 양손을 비비기 일쑤였다.

혹시라도 정도맹에서 요직을 얻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에.

저만치 보이는 현판을 보며 수군거리던 교관들이 마침 나타난 당이협을 보고는 얼른 먼 산을 보았다.

당이협은 그런 교관들 사이를 지나쳐 곧장 천랑각으로 향했다.

‘한심한 자들. 사내가 되고선 앞에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계집처럼 뒤돌아서 떠들기나 하다니.’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얼른 천랑각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때 무인 둘이 막아섰다.

“무슨 일이오?”

당이협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주께 전할 말이 있어서 왔소.”

“당주님께서는 현재 업무 중이라 바쁘오. 다음에 다시 오시오.”

“시급한 사안이오.”

“글쎄, 당주님은 지금 바쁘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엇? 이봐!”

당이협이 다짜고짜 들어가려고 하자, 무인 하나가 얼른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휘릭, 퍽!

얼른 팔을 휘돌린 당이협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장을 내질러 상대를 밀어냈다.

“큭!”

공력을 거의 싣지 않았기에 맞은 자가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일.

“당신! 우리가 정도맹에서 온 걸 알고도 이딴 식으로…!”

“그래서?”

“뭣?”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정도맹은 기본적인 예법도 모르는가?”

“예법을 모르는 건 네놈이 아니더냐! 지금 당주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닥쳐라! 더 이상 날 화나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놈!”

이번에는 다른 무인이 다시 당이협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파밧, 팍!

“우왁!”

콰당탕탕!

순식간에 제압당한 무인은 당이협의 발길질을 얻어맞고 문을 부수며 천랑각 안으로 들어가 나뒹굴었다.

사정이 이리되자 떨어져서 구경만 하던 교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목을 빼며 바라보았다.

당이협은 신경 쓰지 않고 건물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마침 석지평이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척 보아도 낮잠을 자다가 깬 행색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당신은 당이협 교관…?”

당이협이 눈살을 구겼다.

당이협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바쁜 업무 중에 죄송하게 됐소. 하나 시급한 사안이라 찾아왔소.”

“시급한 사안이라는 게 뭐요?”

“사비강 교관이 납치된 장소를 알아냈소.”

당이협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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