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귀환 마교관
88화
상대를 확인한 교관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곳에는 초절정의 주유천을 비롯한 절정을 넘어선 고수가 몇몇 있었다.
그들은 이년생과 삼년생을 가르치는 교관들이었다.
한데도 그의 존재를 자각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상대가 은신술에 특화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덮은 남자는 눈앞에 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그 존재감이 굉장히 희미했다.
주유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네는 누군가?”
“귀영부의 홍염이오.”
홍염의 대꾸에 교관들이 흠칫거리고는 경계했다.
“귀영부!”
귀영부가 어떤 곳인가?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조직이 아니던가?
사파 중에서도 사파다.
그런 자가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무얼 원하는가?”
“원하는 건 없소.”
“하면?”
“사비강 교관이 어디로 납치되어 있는지 알고 있을 뿐이오.”
“그게 어디지?”
“아직은 이동 중일 거요. 거처가 정해지는 대로 정보를 알려 줄 수는 있소.”
그러자 교관 하나가 버럭 소리치며 나섰다.
“흥! 우리가 사파 놈들의 말을 어찌 믿겠느냐?”
“그렇다! 네놈들이 우리 용천관을 습격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아무래도 저놈이 개수작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당장 놈을 잡아서 문초를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에서 목청이 높아졌다.
홍염은 시종 차가운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응했다.
주유천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후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자네를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소.”
“뭣이?”
“하나 내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거요. 왜냐하면… 당신들이 이렇게 나올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나 또한 짐작했을 것이므로.”
“한데도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사비강 교관에게 빚진 게 있어서요.”
“빚을 져?”
“그렇소. 그분께 진 빚을 갚으려는 것뿐이외다.”
물론, 대충 둘러댄 말이다.
사실 사비강의 강압을 못 이겨 나서는 것이다.
사비강이 그들에게 납치되기 직전, 홍염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는 지금부터 이들에게 납치를 당할 것이다. 귀영부의 모든 조직을 풀어 내가 납치된 장소를 알아낸 후 용천관에 알리도록.]
홍염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늘 다시 한 번 사비강의 무위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더 큰 두려움을 느꼈기에.
‘사비강 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영부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사실 사비강은 일부러 정도맹을 들먹이며 자신들을 겁박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귀영부에게 큰 부담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연유로 홍염은 주유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온 것이다.
괜히 사비강을 주군으로 모시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다간, 사파에 몸을 담고 있는 상황에서 오해만 커질 수 있었기에.
여기에 당이협이 가세했다.
“이자에 대해서는 사비강 교관님께 들은 바가 있습니다. 믿어도 좋을 듯합니다.”
당이협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거세게 몰아치던 목소리가 차츰 잠잠해졌다.
그의 출신인 사천당문은 그래도 아직까지 건재한 명문 정파였기에.
주유천이 다시 물었다.
“하면 그대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보았는가?”
“대충은 보았소.”
“말해 보겠나?”
홍염이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주었다.
물론,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말은 알아서 걸러냈다.
갑자기 화염구를 날리고, 얼음 덩어리를 다뤘다는 말은 일절 꺼내지도 않았다.
대략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교관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사비강 교관이 그 두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싸웠단 말인가?”
“그렇소. 사비강 교관은 절정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소섭랑 뿐이었다.
당이협과 매설란은 그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고, 대다수의 교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마침 교관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군. 절정 이상의 실력?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마 상필지 교관님이 그 두 사람의 힘을 잔뜩 빼놓았으니 그 정도로 상대할 수 있었겠지!”
“과연 그 말이 맞을 것 같군.”
교관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때였다.
마침 반대편 수풀이 있는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교관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
“누구냐!”
“부상자를 데려왔소.”
그들은 사비강을 따르는 귀야채 무인들이었다.
고적산의 등에 부상을 입고 기절한 천세명이 업혀 있었다.
“천 부장이…!”
교관들이 얼른 달려가 그를 받아들었다.
“그대들은….”
주유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적산을 바라보았다.
고적산이 얼른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사비강 교관님을 따르는 고적산입니다. 주 학장님을 뵙습니다.”
“주 학장님을 뵙습니다.”
귀야채 무인 전원이 포권을 취하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들의 절도 있는 행동에 교관들도 다소 어리둥절했다.
다만 주유천은 이미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바였다.
등부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일로 사비강과 잠깐 대화도 나누었다.
때문에 그는 이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개과천선하여 사비강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자들이니 더 따져서 무엇 하랴.
물론, 교관들 중 몇몇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자도 있었지만.
주유천이 교관들을 둘러보았다.
“우선 사파 무리가 돌아간 것 같으니, 용자림 곳곳을 살펴 부상자가 없는지 살펴봅시다. 아마 내일 오전 중으로 정도맹에서 사람이 올 듯하니, 그전까지 모든 정리를 끝내 놓는 것이 좋겠소.”
“알겠습니다, 학장님.”
교관들이 대답과 동시에 조를 이뤄 흩어졌다.
주유천이 생도들의 시체를 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시끄럽겠구나.’
아니, 차라리 시끄러운 정도면 다행이리라.
어쩌면 강호에 때 아닌 피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었다.
**
다음날 주유천의 예견대로 정도맹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모두 세 사람이었는데 정도맹의 총관인 수일랑(首一郞)과 천안각주(天眼閣主) 이사흠(李査欽), 그리고 천랑단주(天狼團主) 석지평(石地坪)이었다.
그들은 태사전에서 은기륭과 주유천을 만나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전해 들었다.
수일랑이 그늘진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랬군요. 백리세가와 태천문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요. 그들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겠습니다.”
“노부가 못나서 일어난 일이니, 내 직접 그분들에게 사죄를 드리겠소.”
“흐음. 사죄를 드린다고 해도 잘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수일랑의 말에 듣고만 있던 주유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수일랑의 태도는 위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마치 문책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거기에 천안각주 이사흠이 한 술 더 떴다.
“최근 사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는 받으셨을 터인데, 대비가 소홀했다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죄송하게 됐소.”
“저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 피해는 생도들이 받았으니까요.”
이쯤 되자 주유천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애초에 천안각에서 좀 더 확실하게 조사했더라면 용천관에서도 대비가 수월했을 텐데 아쉬웠소.”
“서운하신 점은 알겠으나, 천안각은 정도맹의 정보기관입니다. 용천관의 보호자가 아니지요.”
“그건 마치 용천관은 정도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소리처럼 들리오만.”
“하하하. 그럴 리가요. 주 학장님께서 생각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주유천이 이에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은기륭이 슬쩍 눈짓으로 제지했다.
‘끄음!’
주유천이 가만히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런 음모가 있다는 걸 밝혀내고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천안각의 역할이 아니던가?
과거 정마대전이 한창이었다면 천안각주를 불러 경을 칠 일이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던가?
평화에 찌든 천안각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게다가 이런 중차대한 일에 고작 천랑단주를 데려오다니!
천랑단은 정도맹에 속한 단(團)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조직이었다.
사실 천랑단주는 얼마 전까지 용천관의 삼년생 교관부장 직을 맡다가 정도맹으로 들어간 자였다.
학관의 분위기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자여서 데려왔다고는 할 수 있으나, 급이 낮아도 너무 낮은 게 문제다.
사파가 결속하고 처음으로 정도맹을 건드린 이 대사건에 고작 천랑단?
‘헛! 참!’
생각할수록 그답지 않게 열불이 뻗쳤다.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더니….’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수일랑이 얼른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일단 상황은 대충 파악해 두었으니 맹에 가서 자세히 보고해 두겠습니다.”
‘흥, 대충 파악하고 자세히 보고한다는 건 무슨 재주냐?’
주유천이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부신각을 공격하던 자들 중 자줏빛 쥐 탈을 쓴 자는 초절정에 이른 고수였소. 그리고 관주님을 직접 공격한 자도 초절정 고수였고. 그들의 신분은 파악이 됐소?”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적어도 관주님을 공격한 자는 머지않아 가닥이 잡힐 겁니다.”
이사흠이 조곤조곤 대답하자, 주유천이 싸늘하게 웃어 넘겼다.
수일랑과 이사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천랑단주 석지평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주유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수일랑이 얼른 말을 붙였다.
“아, 천랑단주께서는 이곳에 남아 후속 대책을 세우실 겁니다. 부디 용천관에서는 최대한 천랑단주께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후속 대책이라는 게 무엇이오?”
주유천의 날선 질문에 수일랑이 빙그레 웃었다.
“그야 납치된 실종자 수색과 보복 조치 등에 대한 문제지요. 정도맹에서는 이번 일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해서, 정도맹의 주요 조직 중 하나인 천랑단을 이곳에 배치해 모든 진행을 도맡도록 결정했습니다. 오로지 용천관을 위해서지요.”
주유천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말만 번지르르한 생색내기가 아닌가?
달리 말하면, 천랑단 이외의 조직은 이번 용천관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이사흠이 말을 덧붙였다.
“정도맹에서는 이보다 더 시급한 사항을 여러모로 조사하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지요.”
주유천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정도맹의 배려는 고마우나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보도록 하겠소. 천랑단주께서는 돌아가셔도 좋소.”
“그건 곤란합니다. 이미 한 차례 습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받은 바, 천랑단주께서 여러분을 적극 도울 것입니다.”
완곡한 거절이다.
하지만 분명한 거절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천랑단은 용천관보다도 낮은 급에 속하지만, 이 경우 정도맹의 대리라고 볼 수 있기에 천랑단이 더 큰 권한을 가진다.
주유천이 발끈해서 따지려고 했지만, 은기륭이 가만히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도맹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은기륭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자, 다른 세 사람도 포권을 받았다.
잠시 후, 수일랑과 이사흠이 정도맹으로 돌아갔다.
물론, 석지평은 따로 숙소를 배정받고 용천관에 남았다.
**
어두컴컴한 공간에 횃불이 연신 일렁거렸다.
사지가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사비강.
맞은편에는 베르타스가 거치대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화로 안에는 인두가 시뻘건 빛을 내며 달궈지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투실투실 살이 찐 사내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따금씩 사비강을 힐끔거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 비명을 지르고 싶, 싶으면 마음껏 질러. 하, 하지만 욕은 하지 마. 욕, 욕 들으면 내가 상처를 잘, 잘 받거든. 헤헤.”
앞니가 빠진 그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때.
끼이이익.
맞은편 철문이 열리면서 한 사내가 들어섰다.
하얀 토끼 가면을 쓴 자였다.
“호오, 준비가 잘 되어 가는 모양이군.”
“어, 어서 오십시오. 배, 백토 님. 히히.”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그, 그럼.”
고문관이 나가자 백토가 사비강에게 다가왔다.
“자네를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다네. 그래서 난 총타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 비밀 분타에 남았지.”
“크크크. 그렇다면 아주 큰 실수를 하신 거야.”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