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귀환 마교관
45화
따닥. 딱.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
매설란은 너른 공동 한쪽에 쪼그려 앉아서 익어 가는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 모으고 앉은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너른 공동 한쪽에는 물이 고여 있었는데 수심이 꽤 깊었다.
미로처럼 얽힌 동혈을 헤맨 지 며칠이 지나서야 매설란은 이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마실 물이 있었고, 배를 채울 물고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벽면을 뚫고 튀어나온 나무뿌리들을 잘라서 땔감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자른 지 하루만 지나면 뿌리가 금세 원래의 크기만큼 자라난다는 것이었다.
사실 결계 안쪽에 자리 잡은 나무뿌리들은 마력의 영향으로 금방 자라나는 것이었지만, 매설란이 이런 사유를 알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빠져나갈 수도 없는 동혈에서 이곳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여기서 죽어 가는 걸까?”
매설란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곤 물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 상으로는 벌써 여러 달이 지난 것만 같다.
그녀는 알몸인 상태였지만 아무렇게나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물고기만 뜯어먹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넋을 놓았으리라.
하지만 그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때문에 매설란은 몸가짐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번은 출구를 찾기 위해 이곳을 떠난 적이 있었다.
닷새 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자칫 되돌아오지도 못한 채 영영 미로 속에 갇힐 뻔했다.
그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온갖 기관 장치들이 작동하면서 옷가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당했다.
게다가 도중에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격한 지진까지 일어났다.
그 후로 매설란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자칫 물도 찾지 못한 채 미로 속을 헤매다가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물고기를 대충 뜯어먹은 매설란은 한쪽 구석에 가시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아름답게 굴곡진 몸매가 불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물가로 사뿐사뿐 걸어가더니 이내 풍덩 뛰어들었다.
한 마리의 인어처럼 물속을 유영하던 그녀가 몸에 힘을 빼고 수면 위에 드러누웠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제 다 끝났어. 나는 여기서 늙어 죽을 거야. 죽기 전에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한숨을 길게 내쉬자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한참 후에 수면 위로 솟아오른 매설란이 물가로 걸어 나왔다.
그쪽 벽면에는 그녀가 연검으로 새겨 놓은 조각상이 있었다.
그녀보다 조금 키가 큰 조각상이었는데, 그 얼굴이 어딘지 사비강과 닮아 있었다.
매설란이 조각상 앞에 꼿꼿하게 서서는 노려보았다.
“봐요. 나, 당신을 유혹하기 위해 왔었다고요. 알고는 있나요?”
물론 조각상이 대꾸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매설란은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번번이 날 헷갈리게 했죠. 하지만 난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어요. 똑똑히 보라고요. 나 어때요?”
매설란이 살짝 몸을 비틀며 풍만한 가슴과 미끈한 다리를 부각시켰다.
그녀가 가녀린 손으로 탄력 있게 솟아오른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때요? 만지고 싶지 않나요?”
매설란의 손길이 점점 더 음란하게 움직였다.
가슴을 매만지던 손길은 아랫배를 지나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갔다.
“으음… 이래도 넘어오지 않을래요? 당신이 손만 뻗으면… 나는… 아아….”
매설란의 몸이 아찔한 굴곡을 그리며 휘어 갔다.
하지만 조각상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내 매설란도 살짝 김이 샌 표정을 짓더니 조각상의 뺨을 어루만졌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 그렇게 무표정하게 보고 있으면 당신 생각을 알 수가 없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쁜… 사람.”
마침내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매설란이 고개를 들어 조각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길이 조각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당신…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요?”
이제 그녀의 손길은 조각상의 손을 향했다.
“보고 싶어요. 당신… 나, 만지지 않을래요?”
매설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 달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고, 사람의 눈길이 그리웠으며, 사람의 감촉이 그리웠다.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유일하게 조각상을 향해 한풀이와 원망을 하고, 신세 한탄을 늘어놓다 보니 묘한 감정까지 생겼나 보다.
‘이렇게 조금씩 미쳐 가는 건지도….’
매설란이 조각상에 알몸을 비볐다.
“아음… 좋아요, 거기. 당신… 좀 더….”
그때였다.
“매 소저?”
귀에 익은 목소리.
매설란이 흠칫거리고 돌아보았다.
공동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사비강.
매설란이 피식 웃었다.
“이번엔 거기인가요?”
“무슨 소리요? 그보다… 어째서 알몸으로 이런 곳에….”
“또 나타났군요. 지긋지긋한 환상. 이왕 그렇게 됐으니 즐겨나 볼까?”
매설란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사실 처음이 아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났었고, 또 어느 때는 자신이 죽여 버린 사파의 무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비강은 단골로 나타나는 환영 중 한 명이었다.
“환상이라니? 무슨 소리요? 난 사비강인데.”
사비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매설란이 나체인 상태로 사박사박 걸어왔다.
“정말… 너무 진짜 같네.”
그녀는 홀린 사람 마냥 미소 짓더니 사비강에게 훌쩍 다가섰다.
“그럼, 나랑 입이나 맞춰요.”
“입을 맞추자니 그게 무슨 말이오?”
사비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휙!
매설란이 얼른 몸을 던져 왔다.
순간.
“매 소… 읍!”
“음…!”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혀가 서로를 탐한다.
‘아…! 진짜 같은…?’
찰나, 매설란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화들짝 놀란 그녀가 뒤로 후다닥 물러나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 당, 당신…!”
“아, 정신이 들었소? 미리 말하지만 이건 내가 먼저 한 짓이 결코 아니….”
“당신! 진짜, 진짜! 사비강이에요?”
“뭐, 그렇소만.”
“말도… 안 돼.”
“흠… 그나저나 여기에서 얼마나 있었던 거요? 꼴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사비강이라니… 진짜 당신이… 진짜 사비강?”
“거참, 그렇대도. 매 소저 괜찮소? 아무래도 심각….”
“사비강…!”
순간 매설란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 나쁜 사람!”
한 달음에 날아든 매설란이 마구 손을 휘두르며 사비강을 때리기 시작했다.
“엇, 매 소저 잠깐…!”
하지만 사비강은 매설란의 표정을 보고 단념하고 말았다.
‘소용없으려나?’
아마도 자신을 쫓아왔다가 이곳에 갇힌 것이리라.
‘어지간히 무섭긴 했겠군.’
사비강은 묵묵히 맞아 주었다.
한참 동안 때리던 매설란이 무너지듯 주저앉으려는데, 사비강이 얼른 안아 주었다.
“매 소저. 괜찮소?”
“너무… 흑, 흑,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
소리치며 올려다보는 매설란.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뺨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아이처럼 우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매 소저….”
“아아, 몰라요! 정말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고독, 소외, 외로움에서 오는 공포는 제아무리 절정고수라고 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매설란은 정말 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이거 야단났군.’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지은 채 매설란의 허리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매 소저. 이런 순간에 어울릴 말은 아니지만….”
“뭐예요?”
“당신, 지금 엄청 사랑스럽소.”
매설란이 흠칫거리고는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사비강이 더욱 강하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매 소저!”
“왜 이러… 흡!”
순간이었다.
사비강이 매설란의 입술을 덮었다.
잠깐 저항하듯 밀어내던 매설란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사비강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춰 갔다.
“아음…!”
매설란의 몸이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사비강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부드러운 피부에 맞닿았다.
사비강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봉긋한 가슴을 지나 잘록한 허리로 향했다.
‘아아… 당신…!’
매설란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순간.
‘아, 안 돼! 나랑 하면… 나를 만지면…!’
그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비강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그만, 그만해요.”
“왜 그러시오?”
매설란이 그윽하게 바라보는 사비강의 눈빛을 외면했다.
‘나에게 욕정을 품고 만지면… 당신은….’
모든 공력을 빼앗긴 후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다.
사비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와 이러는 것이 싫소? 그렇다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강하게 부정하던 그녀가 스스로 외친 소리에 흠칫거렸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사비강이 미소를 지었다.
“하면 왜 그러시오?”
‘아아, 나쁜 사람. 그런 얼굴로 바라보면 반칙이잖아….’
매설란은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실을 고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사비강은 내내 일관된 표정이었다.
“… 이제 아시겠어요? 당신… 나랑 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그대와 보낸 하룻밤의 대가가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감수할 만하겠소.”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요?”
“만약… 안 죽는다면?”
“뭐라고요?”
“걱정 마시오. 난 쉽게 죽지 않으니까.”
사비강이 다시 매설란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덮쳤다.
“읍…! 무슨 소리예요? 정말 죽고 싶어서…!”
“믿으시오. 난 괜찮으니까.”
“바보… 흡…!”
매설란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하지만 믿고 싶다.
아니, 이미 마음속 어딘가에서 믿고 있다.
그래, 이 사람은 어쩌면….
언제나 상식을 깼던 사람이니까.
매설란은 점점 몸에 힘을 빼고 사비강에게 모든 걸 내맡기기 시작했다.
때론 부드럽고 잔잔하게.
때론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다 물결이 전신을 덮쳐 왔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옥문을 열어 갔다.
그 사이로 사비강이 열락을 몰고 들어왔다.
**
공동 한쪽 구석에 나신인 상태로 나란히 누운 두 사람.
사비강의 웃음소리가 공동에 낭랑하게 울렸다.
“하하하하!”
“뭐가 웃겨요? 웃지 마세요.”
매설란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눈을 흘겼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사비강이 매설란을 보았다.
“그래서 여기에 그런 차림으로 있었던 거요? 후후.”
“…….”
“그런데 이젠 나에게 그런 걸 다 말해 주는 이유가 뭐요?”
“뭘요? 내가 당신을 유혹하려고 접근했다는 거요?”
“그렇소.”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도, 나도 이제 이 요상한 동혈에 갇혀 버렸으니, 앞으로 평생을 함께 의지하며 지낼 수밖에요.”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매설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사비강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그럼, 여기서 평생을 보낼 생각이오?”
“어쩔 수 없잖아요? 나갈 방법이 있어야죠. 그럴 수만 있다면야….”
말을 잇던 매설란이 흠칫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설마… 여기서 나갈 방법을 아는 거예요?”
“뭐, 그렇긴 한데… 생각해 보니 매 소저의 말대로 여기서 좀 더 머무는 것도 좋을….”
“무슨 소리예요! 지금? 정말 나갈 방법을 안다고요? 이 동혈에서 나갈 수 있다고요? 세상 밖으로?”
“그렇소만.”
“맙소사! 그런데 왜 당신은 여기에 있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는 길이었소.”
“나가는 길? 여태 뭐하다가?”
“뭐, 좀 사정이 있었소.”
“무슨 사정이요! 아니, 그보다 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예요? 나갈 방법을 안다면 당장 나가야죠!”
“쩝… 왠지 이대로 나가기엔 아쉬운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지금!”
결국 참다못한 매설란이 고함을 빽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