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귀환 마교관
17화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모두 주유천과 사비강의 대화에만 귀를 기울였다.
주유천이 물었다.
“그래서 조건이 무엇인가?”
“모두 세 가지입니다.”
“일단 말해 보게.”
“우선 학장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저를 모함하고 모욕감을 안겨 준 상대를 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제가 마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나온다면, 저를 모함한 여운진 교관의 자격을 박탈시켜 주시고, 대신 저를 생도부장으로 임명해주십시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몇몇은 사비강의 요구가 꽤 세다고 생각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요구가 나름 정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곤 하지만 암습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인’이라는 오명을 씌우려고 했으니, 사생결단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리라.
문제는 학장의 성품상 그것이 관칙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학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만약 자네가 마공을 익힌 게 아니라면, 여운진 교관의 자격을 박탈하겠네. 관칙상 관내에서 상당한 소란을 일으켰을 때는 그 정도에 따라 교관의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으니. 또한 생도부장의 임명권은 내게도 있으니 불가능하진 않네.”
“하, 하지만 학잔님! 저능 그저 저 놈이 마인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
얼른 나서는 여운진을 향해 주유천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자네는 억울할 게 없지 않나? 그리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무모한 짓을 했을 테지. 반대로 사 교관이 마인이라는 게 확정되면 당연히 그가 교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될 것이네. 물론, 그 이상의 처벌도 피할 수는 없을 걸세.”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여운진은 더 이상 따질 수도 없었다.
‘그래, 어차피 상관없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놈은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 했지만, 진짜 거짓말을 하는 건 저놈이지 않은가?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저놈이 아는 사실! 내가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제길, 그런데 왜 내가 불안한 거지?’
여운진은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기감이 그를 천천히 옭아매고 있었다.
“두 번째 조건은 뭔가?”
“앞으로 특목반에 대한 교육은 전적으로 제 임의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같은 오해가 생긴 것도 다른 교관들께서 제 교육 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마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제 교육 방식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말아 주십시오. 명백한 부정이 아닌 한, 제 방식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관칙을 살펴봐야….”
“관칙에 위배되는 건 없습니다. 제17조 2항 ‘교관의 계도’라는 항목을 살펴보면, 이렇게 나와 있지요. ‘담임 교관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상부의 동의를 얻어 교육 방식을 자유로이 변경할 수 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승인해 주시면 되리라 봅니다.”
“끄음.”
잠시 침음을 흘린 주유천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수용하도록 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진은 왠지 모를 초조감에 숨통이 막히는 듯했다.
‘내가 초조할 필요가 없어. 내가…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
그러다가 문득 사비강과 시선이 딱 마주친 순간,
“……!”
여운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비강의 시선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아니다.
말 그대로 눈빛. 설명하기 애매한 육감과 같은 것.
‘그래! 내가 불안한 건 저놈 때문이다! 저놈이… 저놈에게 뭔가가 있다! 저놈이 저렇게 당당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째서 저놈은 아무렇지 않은 거지?’
여운진은 심호흡을 하며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쩌면 사비강의 허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러는 사이 사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마지막 조건을 말씀드리지요.”
“말하게.”
“여운진 교관의 자격이 박탈되면 정교관 자리가 하나 부족해지니, 제가 추천한 사람을 선발해 주십시오. 병과는 제 임의대로 정하겠습니다.”
이건 뜻밖의 조건이다.
주유천 뿐만 아니라 모여 있던 사람들 다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군거렸다.
“추천을 한다고?”
“누구를 추천한다는 거지? 병과도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 권법 교관이 아닌 건가?”
“뭐, 권법 교관이 한 명만 있는 건 아니니 상관은 없잖아?”
잠시 후 주유천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건 불가하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관칙에 위배되기 때문일세. 지금까지 자네 요구는 관칙에 크게 위배되지 않았지. 하지만 추천 받은 자를 무조건적으로 고용하는 것은 관칙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일세.”
“좋습니다. 그럼 제가 추천하는 자를 면접 보신 후에 결정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흐음. 그 정도라면 받아들이겠네.”
“학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비강이 포권을 취했다.
드디어 모든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긴장한 표정으로 사비강과 주유천을 번갈아 보았다.
주유천이 택마인주를 들고 사비강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럼, 이제 시험해 보아도 되겠는가?”
“좋습니다.”
“모두의 수긍을 위해서 내 직접 자네 이마에 찍을 생각이네만.”
“괜찮습니다.”
사비강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주유천이 택마인주를 검지에 묻힌 다음 천천히 사비강 이마에 찍었다.
여운진의 말에 의하면 사비강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공을 사용했다.
즉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택마인주를 찍게 되면 틀림없이 붉은 반점이 나타나야만 한다.
‘이제 넌 끝이다!’
여운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사비강의 이마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사비강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주유천 역시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선 다음 이마를 응시했다.
실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듯한 분위기.
만약 붉은 반점이 나타나면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도검을 뽑아 들고 일시에 사비강을 겨누리라.
때문에 주유천 역시 여차하면 공력을 끌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타나라! 어서! 나타나! 빨리!’
여운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꽉 말아 쥔 주먹에는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사비강 이마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기랄! 왜 이렇게 효과가 늦는 거야? 어서 나타나란 말이야!’
여운진은 초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천세명 일당도 마찬가지.
그들 모두 촌각이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힘겨운 반각의 시간이 흘렀을 때.
“커험!”
주유천이 헛기침을 하자, 장내의 사람들이 저마다 움찔 떨었다.
그만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비강 이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
“만약 일각이 지나도 반응이 없으면 사 교관은 마인이 아니라고 판단하겠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각도 꽤 시간을 많이 준 것이라 생각했다.
여운진의 말이 틀림없다면, 택마인주를 찍자마자 붉은 반점이 나타났어야 했다.
한데 사비강의 이마는 변화가 없다.
본인이 직접 찍은 게 아니라, 학장이 나서서 찍었으니 어떠한 속임수도 없으리라.
누구보다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여운진이었다.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렸다.
‘이,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내가 보았던 그 무공들은 절대로 정공이 아니었어! 저놈은 필시 마공을 익힌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머릿속이 혼란해진 여운진은 결국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조바심에 쫓기던 그가 벌떡 일어나서는 주유천을 향해 소리쳤다.
“학잔님! 아무래도 이상함니다! 저는 틀림없이… 쿨럭, 보았씀니다! 정말… 학잔님께서는 저 녀석 이마에 탱마인주를 찍으셨습니까?”
주유천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지금 나까지 의심하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녀석은 분명히 마곰을 사용했씀니다! 한데 어째서… 어째서…! 이럴 쑤는 없씀니다! 아니면 탱마인주가 잘못 되었거나….”
“지금까지 기록으로 보면 택마인주가 사실과 다른 결과를 보여준 적은 없었네.”
“하, 하지만… 분명히 저놈은…! 제, 제가 찍어 보겠습니다! 놈 이마에 제가 직쩝!”
“불가하네!”
주유천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공력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리자, 몇몇은 주춤거리며 비틀거렸다.
여운진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하, 하지만 어째서… 제가 찡는다면 분명히….”
“결국 자네는 나 또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그게 아니라… 저는 확실한….”
“지금 자네는 완전히 눈이 뒤집혔어! 그런 자네에게 택마인주를 찍게 했다간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법. 또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내 직접 사 교관에게 무례한 행위를 했음에도, 그대가 이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털썩.
여운진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는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눈알을 뽑아서라도 직접 보았던 것을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린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주유천이 선고했다.
“일각이 지났군. 모두가 지켜보았던 바, 보다시피 사 교관의 이마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지 않았소. 이로써 사 교관은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었소. 사 교관, 내 무례를 용서하시게.”
“아닙니다. 학장님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합니다. 저는 그저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절 모함하려고 한 여 교관이 서운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주유천이 냉랭한 시선으로 여운진을 쏘아보았다.
‘아, 아냐! 저 새끼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진짜야! 이 새끼들아!’
여운진은 속으로 그렇게 소리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에 힐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심지어 천세명과 그의 측근들까지.
주유천이 차갑게 일갈했다.
“자네는 돌이킬 수 없는 무례를 저질렀네! 근거 없이 동료 교관을 의심하고 비열한 습격까지 저질렀으며, 많은 생도들 앞에서 혼란을 야기한 점! 게다가 거짓말까지 일삼고 정당히 나온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점까지! 그 어떤 것 하나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일세!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서 자네의 교관 자격을 박탈하겠네!”
“학, 학장님! 이건 아닙니다! 뭔가 잘못됐씀니다! 저는 분명히…!”
“닥쳐라!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쯤 되자 여운진은 정신이 붕괴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가 뭐라고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주유천이 호통을 쳤다.
“뭐하는가? 정도인으로서 최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자네가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 사 교관에게 사과해야할 것이 아니냐!”
여운진은 멍한 시선을 돌려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모두 저놈의 비웃음이 안 보인단 말인가? 저놈이 아예 마공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홀려 버린 건가? 저 사악한 웃음이 정녕 안 보인단 말인가!’
그러는 와중에도 주유천이 뭐라고 호통을 치고 있었지만, 그저 귓가에 왕왕 울릴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천천히 다가오는 사비강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왜 다가오는 거지?’
이윽고 사비강이 코앞에 다다랐을 때.
“여 교관님. 저에 대해 거짓 증언까지 하신 건 몹시 서운하지만, 더 이상은 제가 따지지 않겠습니다. 아, 여 교관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심하게 대한 점 역시 사과드립니다.”
“뭐… 뭐…!”
여운진은 차마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장내의 사람들은 오히려 사비강이 넓은 아량을 가졌다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자신은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도 하지 않는 최악의 인간이 되어 버린 셈.
게다가 오히려 사과를 받았으니….
사비강이 여운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니, 머릿속에 울렸다는 것이 더 옳았다.
[그러게 적당히 해야지.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순간 여운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비강은 싱긋 웃어 보인 후 걸어가고 있었다.
‘저, 저놈이 분명 지금 나에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여운진만 들었다.
사실 이는 마계의 4서클 마법 중 ‘카브(Carve)’라는 것이었는데, 접촉한 대상의 뇌에 언어를 곧바로 새기는 것이나 마찬가지.
때문에 아무리 기감이 뛰어난 자가 옆에 있어도, 사비강이 전한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자 여운진은 정말이지 주화입마에 빠져 버릴 지경이었다.
넋이 나간 여운진에게 주유천이 차갑게 일렀다.
“자네는 앞으로 십 년간, 본관에 머물며 봉사활동을 하게! 이 또한 자네에게 내리는 벌칙일세!”
말이 좋아 봉사활동이지, 실제로 허드렛일을 하는 시종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과거 사비강이 부교관 자리에서 쫓겨난 후 하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