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귀환 마교관
12화
“허억!”
염자량이 저도 모르게 손을 놓고는 후다닥 물러나며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교, 교관…!”
“말이 짧다.”
사비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염자량은 그저 넋을 놓은 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 어떻게 교관이… 여기에?”
“설마 정말로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 어설픈 실력으로?”
사비강이 코웃음을 치고는 베르타스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초저녁부터 알짱거리는데 신경 쓰여서 잠을 잘 수 있어야지. 결국 잠자는 척을 했더니 날름 가져가더군. 후후.”
“그, 그럼 처음부터 전부 다 알고….”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있나?”
염자량이 입을 딱 벌렸다.
사비강이 입꼬리를 치켜 올리고는 한쪽에 쓰러진 조문탁을 힐끔 보았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처음부터 다아 봤지. 전부 다아. 아아아주 자세히.”
그제야 염자량의 시선도 한쪽에 쓰러진 조문탁에게 향했다.
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아, 아니라고요! 저, 저건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어엉? 분명히 나는 네가 찌르는 걸 봤는데? 이젠 위증까지 하다니.”
“아… 물, 물론 내가 찔렀지만…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어! 나는 정말 아냐! 내가 아니라고!”
염자량이 머리를 감싸 쥐고는 잔뜩 팽창한 동공으로 울부짖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참.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거지만 내가 한 게 아냐!’라니, 무슨 그런 멍청한 소리가 다 있어?”
사비강이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빈정거리자, 염자량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진짜라니까!”
“너, 계속 말이 짧다?”
“진, 진짜라고…요. 크흑! 믿어 주세요! 그 순간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사비강은 중얼거리는 염자량을 두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더니 조문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피를 제법 흘렸군. 우선은 간단히 지혈부터 해야겠어.”
그가 빠르게 손을 놀려 혈도를 짚었다.
마침 정신이 퍼뜩 돌아온 염자량이 문득 사비강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잠, 잠깐! 그럼, 교관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쫓아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사비강이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검집을 주워 들었다.
염자량이 조문탁과 사비강을 번갈아 보다가 재차 소리쳤다.
“그, 그런데 어째서 말리지 않았습니까?”
“뭘?”
“다 봤다면서요! 내가 저 녀석을 찌르는 것까지! 그런데 왜 말리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러고도 정말 교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시면 교관 자격 박탈이라고요! 저 녀석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교관께선 뭐하고 있었던 겁니까!”
염자량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적어도 교관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나서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도가 실수를 하면 나서서 제지하고,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달려와서 위험으로부터 구해 줘야 하는 게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말을 뱉는 사비강의 표정이 어느새 서늘하게 식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차가운지 염자량은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곧 이를 뿌득 갈고는 맞섰다.
“그,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그게 맞아. 하지만 네놈은 그런 말을 해선 안 돼. 교관 알기를 발바닥의 때만도 못하게 보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갑자기 교관의 의무를 들먹여? 장난하냐? 난 너희들을 계도하는 교관이지, 어리광 받아 주는 보모가 아니란 말이다!”
“헙.”
염자량이 이번에는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사비강과 눈을 마주친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를 떠미는 것만 같았기에.
사비강이 검집에 베르타스를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나에게 도전해서 실패했을 땐 그만한 대가를 각오하라고. 저 녀석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른 거다. 비록 너한테 당한 거지만.”
“크윽. 그런…!”
“왜? 배신감이라도 느끼냐? 그럼 안 되지. 배신감이라는 건 적어도 믿었던 존재한테서 느끼는 거다. 네놈은 나를 교관으로 믿지도 않았잖아. 넌 그저 변명하고 합리화할 뿐이야.”
사비강이 염자량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으으… 뭐, 뭡니까?”
이번에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고, 발바닥은 땅에 척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사비강이 코앞까지 다다랐을 때.
“뭐긴? 벌써 잊었어? 너도 대가를 치러야지. 이제부터.”
“뭐, 뭘 어떻게 하려고….”
“계도를 시작해야지.”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염자량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거야!’
사실 염자량은 사비강이 걸어 놓은 홀드(Hold) 마법에 의해 결박된 상태였다.
홀드 마법은 대게 일시적인 효과지만, 현재 4서클에 이른 사비강은 대략 큰 숨을 서너 번 정도 쉴 수 있을 만큼의 시간 동안 상대를 묶어 둘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염자량으로서는 극도의 공포에 질릴 수밖에.
그리고 사비강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는 순간.
우두두둑!
“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으드드득! 꽈드드득!
“커헉! 으아아악! 제, 제발… 그만…! 아아악!”
사비강의 손길이 뻗어 올 때마다 염자량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사비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좀 조용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겠어.”
“크어억! 차라리 죽여엇!”
“쯧쯧. 안 되지. 앞날이 창창한데 왜 벌써 죽으려고 하나? 아득바득 살아가야지.”
꾸드드득!
“크아아악!”
“너무 시끄러워서 아혈(啞穴)을 점하도록 하마. 이해해라.”
“큭!”
사비강이 다시 재빠르게 혈도를 점하자 염자량은 이제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이런 우라질! 이런 고문 방법은 어디서 익힌 거야! 크아아악!’
염자량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비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왜 지켜보고 있었냐고 물었지? 교관으로서 생도를 관찰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거든. 뭐, 지켜본 결과 생각보다 실망이 컸다만. 그래서 내가 이런 짓까지 하는 거고.”
‘닥쳐! 이 악마새끼야!’
정말이지 피를 토하지만 않을 뿐,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야말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염자량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더니 축 늘어졌다.
“음, 기절한 건가? 쯧. 생각보단 오래 버티긴 했군.”
사비강이 염자량을 바닥에 쓰러뜨려 두고는 다시 조문탁에게 걸어갔다.
조문탁 역시 의식이 없는 상태.
다행이라면 제 때 지혈을 해 둔 바람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비강이 품에서 투명한 병을 꺼내들었다.
붉은 액체가 담긴 병.
힐링 포션이다.
어떠한 상처도 거짓말처럼 낫게 만드는 마계의 영약.
사비강이 조문탁의 상체를 안아 들고 입에 힐링 포션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치료를 한답시고 힐링 포션을 상처 부위에 부었다가는 낭패다.
어디까지나 음복했을 때만 효과를 나타내는 약이기에.
츠츠츠츳.
희미한 소리와 함께 상처 부위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다.
힐링 포션을 복용하면 표면의 상처부터 치료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내상이 치유되는 시간은 조금 더 걸리기 마련.
그래봐야 내일 오전쯤이면 조문탁도 완치될 것이다.
그렇게 힐링 포션 한 병을 모두 비운 사비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북서쪽을 돌아보았다.
“오고 있는 자는 둘인가? 이 새벽에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손에 들린 베르타스가 ‘우웅’ 우는 소리를 냈다.
순간 사비강의 표정이 전에 없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만 울어대라.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벌였다간 확 부셔 버릴 테니까. 못 믿겠으면 어디 시험해 보든지.”
지금 이 순간 사비강의 표정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야차와 같았다.
구슬려서 다스려지지 않으면 힘으로 누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의 분노를 읽기라도 한 걸까?
가늘게 떨던 베르타스가 이내 잠잠해지더니 다시는 떨지 않았다.
그때.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숲 한쪽에서 들려왔다.
등부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쓰러진 두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여운진 역시 황망한 표정으로 사비강과 생도들을 번갈아 보았다.
“사 교관!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여운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비강에게 따지듯 물었다.
‘딴지가 시작되겠군. 뭐, 그러라고 일부러 기다린 거지만. 흐흐.’
**
머리에 뿔이 두 개나 달린 악마가 온몸을 마구 비틀어댔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비명조차 터지지 않았다.
차라리 시원스레 소리라도 내지르면 좋으련만.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까지 뒤집던 염자량이 마침내 온힘을 다해 고함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그만하라고! 이 개새끼야!”
눈을 번쩍 뜬 염자량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헐떡였다.
“헉, 헉, 헉… 헉.”
여긴…?
침상이다.
돌아보니 의생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가 꿈이며,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깨닫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커험!”
문득 헛기침 소리에 돌아보니 부신각주 진백이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부신각주…?”
“각주?”
“…님?”
“허 참, 이놈이나 저놈이나 말끝이 왜 이리 짧은지. 말세로군. 말세야. 진맥 좀 하려는데 개새끼 소리를 들어야 하질 않나.”
‘헉!’
그제야 염자량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꾸, 꿈을 꾸는 바람에….”
“그놈의 꿈 두 번 꿨다간 쥐새끼 되는 건 순식간이겠구나.”
“죄, 죄송….”
“허허허! 각주님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여운진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부신각주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오셨소?”
“예, 일년생 생도부장인 만큼 이 녀석들을 챙기는 게 제 소임 아니겠습니까? 잠시 이 아이와 얘기를 좀….”
“알겠소.”
부신각주 진백이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을 나가고 나자, 여운진이 형식적인 미소를 가득 지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
염자량이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 낌새를 채고는 여운진이 얼른 재촉하듯 물었다.
“어디 불편한가?”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흐음, 그래?”
마치 뭔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린 여운진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흘 전의 일을 기억하겠는가?”
“예에? 사흘 전이요?”
“그래. 사흘 전, 밤에 있었던 사건 말일세. 뭐, 대충의 이야기는 사 교관에게 들었네. 사 교관은 별 일 아니었다고 하네만. 자네에게도 자세히 듣고 싶어서 말일세. 자네, 사 교관의 검을 가져가려고 했다지?”
염자량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벌써 사흘이나 지났단 말이야?’
그러다가 퍼뜩 드는 생각.
“문탁! 조문탁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사합니까?”
여운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 아이는 왜 찾는가?”
“문탁이 위독해요! 제가 찔렀습니다!”
“찔러? 자네가?”
“예, 제가 찔렀습니다! 그 녀석의 배를 제가…!”
염자량이 제 손을 내려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던 조문탁을 보던 순간.
그 상황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여운진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확실한가? 자네가 정말 조문탁 생도를 찔렀나? 어디를?”
“배를 찔렀습니다. 그래서 피가… 아주 많이….”
“혹시 다른 짐승을 찌르거나….”
“아니에요! 확실해요! 문탁이 어떻게 됐습니까? 네?”
“흐음.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네.”
“예?”
“배에 상처가 희미하게 있긴 하네만, 살짝 스친 정도랄까? 어쨌든 아주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네.”
“그, 그럴 리가….”
“우리가 처음 봤을 때도 그 아이가 몹시 위독해 보였지. 피가 주변에 많이 보였으니까. 그런데 정작 상처는 매우 적더군. 그래서 그 피가 다른 짐승의 피가 아닌지 의심했다네.”
“짐승이라니. 분명히….”
“자네가 그 아이를 찔렀단 말이지? 물론 그 말을 믿어. 죽은 짐승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럼, 저는….”
“일단 다친 사람이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되네. 다만 지금부터가 중요한 질문일세.”
“뭡니까?”
“왜 그 아이를 찔렀나?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게 있나?”
“그건….”
염자량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가 이내 대답했다.
“그 검 때문입니다.”
“검?”
순간 여운진의 표정에 비릿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