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귀환 마교관
11화
조용한 실내.
은은한 차향이 어둠을 더듬으며 퍼져 나갔다.
연우경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염자량은 말씀하신 대로 단순한 녀석이더군요.”
“후후. 그가 자라 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지.”
마주앉은 등부형은 나직이 웃으며 대꾸했다.
연우경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불은 지펴 두었습니다. 아마 곧 행동에 나설 것 같습니다.”
“허허, 자네도 참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군.”
“교관님이야말로 무서운 분이시군요. 일부러 자하낙인도까지 희생하면서 그런 실험을 하다니요. 저희들이야 그 대련을 보았으니 그게 보통 검이 아니겠구나 하지만.”
등부형은 내심 뜨끔했지만 짐짓 태연하게 대꾸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요사스러운 물건이다 싶었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래, 춘부장(椿府丈)께서는 잘 계시는가?”
등부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연우경이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아버지는 잘 지내십니다. 다만 이번에 제가 특목반으로 배정된 것에 대해서는 좀 언짢아하십니다.”
은근한 압박.
정말로 패검연가의 가주(家主)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등부형으로서는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등부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생도들을 배정하는 것은 내 권한이 아니라네. 여운진 교관의 영역이니 내가 딱히 손을 쓸 방도가….”
“뭐,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드는 걸요.”
“그, 그런가?”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우경이 찻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게. 혹여 학관 생활을 하다가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게나.”
“감사합니다.”
연우경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등부형은 연우경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어딘가 까다로운 녀석이라니까.’
사실 연우경의 행보와 달리 패검연가는 강직하기로 소문난 가문이다.
만약 그의 친형인 연천기(延天器) 같았으면 이런 밀담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
‘모든 가문의 둘째 놈들은 삐딱하게 자란다는 공식이라도 있는 걸까?’
등부형은 피식 웃고는 다시 찻잔을 채웠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비스듬히 열린 창문 밖으로 새 한 마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새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더니 이내 곧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
수풀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 둘.
하나는 염자량이었고, 다른 한 명은 조문탁이었다.
두 사람이 뚫어지도록 노려보는 곳은 바로 사비강의 숙소.
사비강의 숙소는 다른 교관들과 달리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학관에서는 정교관이 된 그에게 새로운 숙소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으나, 사비강이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한기를 느낀 조문탁이 팔뚝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뭐가 문제야? 들키더라도 며칠 근신하면 돼.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조문탁이 짐짓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염자량이 눈을 부라렸다.
“뭐야? 이제 와서 발을 빼려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확실히 해. 미적거리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까.”
“아, 알았어.”
조문탁이 염자량의 기세에 눌려 간신히 대답했다.
염자량은 다시 시선을 돌려 사비강의 숙소를 바라보았다.
‘후후. 어서 잠이나 자라고. 내가 그 코를 납작하게 짓뭉개 줄 테니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뭐? 언제든 암살을 시도하라고?
물론 교관을 상대로 정말 암살을 시도할 수야 없겠지만, 검을 훔치는 것쯤이야.
사비강이 가진 검은 진짜가 틀림없었다.
용천지부장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해 둔 바였다.
자하낙인도를 일격에 깨트려 버린 검.
그 정도면 가격을 쉬이 측정하기도 힘들 만큼 대단한 물건이라고 했다.
‘이번 일을 성공하면, 아버지가 날 인정해 주실 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언제나 형만 추켜세웠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은 늘 쓸모없는 아들이었다.
무공도 변변찮고, 계산도 빠르지 않으며, 실리도 따질 줄 모르는.
구제불능에다가 애물단지.
아버지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딱 그랬다.
게다가 이번에 특목반에 배정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대놓고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셨을 정도니….
‘두고 보라고.’
상단주인 아버지는 천하의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이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가져간다면 버선발로 뛰쳐나올 분이다.
‘나를 다시 보게 만들겠어.’
때마침 숙소를 밝히던 불이 꺼졌다.
“자려나 봐.”
“쉿!”
조문탁에게 주의를 주며 염자량은 가만히 숙소를 응시했다.
등불이 꺼졌지만 곧바로 잠에 빠져들진 않을 테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싸늘한 밤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염자량은 천천히 수풀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문탁이 염자량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려고?”
“응.”
염자량이 입매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경공술 하나 만큼은 자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고를 치면, 늘 경공술을 이용해서 재빨리 달아나곤 했으니까.
그렇게 주로 사고뭉치로 자라다 보니 경공술과 은신술이 염자량의 특기 아닌 특기가 되어 버렸다.
“내가 잠입해서 검을 빼올 테니까, 너는 밖에서 망을 보도록 해.”
“알, 알겠어. 조심해.”
“걱정 마. 전에도 권법 부교관 숙소에 몰래 잠입해서 만두를 훔쳐오기도 했잖아.”
“뭐, 그야 그렇지만.”
‘만두하고 검은 다르니까’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는 조문탁이 조심스럽게 염자량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입구에 다다른 염자량은 굼벵이처럼 느린 속도로 문을 잡아당겼다.
끽.
미약한 소리에 두 사람이 얼음처럼 굳었다가 다시 숨을 내쉬었다.
‘쫄 것 없어. 상대는 겨우 이류 창법 교관이야.’
마침내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이 생겼을 때, 염자량은 그 사이로 연기처럼 스며들어 갔다.
가장(家場)에서 지낼 때, 자신의 호신위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은신술이었다.
실내로 들어선 염자량은 얼른 주변을 훑어보았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
‘역시 자고 있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침상 쪽으로 다가가니, 마침 바로 곁에 비스듬히 세워 둔 뭔가가 보였다.
검갑(劍匣)?
검집 채로 벽에 걸어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상자 안에 보관할 만큼 귀하다는 건가? 흐흐.’
다른 곳을 둘러봐도 검은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검갑 안에 들어 있을 터.
‘그럼 검갑 채로 들고 날라야겠군.’
다행히 크기가 부담되진 않다.
여기서 덮개를 열고 검을 꺼내다간 소리가 날 수도 있으니, 통째로 훔치는 게 안전하리라.
마음을 굳힌 염자량이 호신위로부터 전수받은 묘도보법(猫道步法)을 시전하며 침상 곁으로 다가섰다.
그야말로 고양이처럼 날렵하면서도 가벼운 움직임.
마침내 검갑을 집어 들자.
우우웅.
상자가 한 차례 떨었다.
하지만 검갑 안에 든 물건을 천으로 한 번 싸 놓은 것인지 귀로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손을 타고 그 진동이 느껴졌다.
검명(劍鳴)!
염자량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검신이 떨려서 울리는 검명은 그야말로 명검 중에서도 명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닌가?
‘이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물건일 지도!’
문득 지난 수업 중에 사비강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천화상단 용천지부장으로부터 사비강의 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다.
“교관님, 그 검은 어디에서 구하신 건가요?”
“오다 주웠다.”
당시엔 무척 불성실한 대답에 발끈했지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으랴?
‘그래, 주운 물건에 임자가 어디 있어? 흐흐.’
염자량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가 문틈으로 나오자, 바짝 얼어붙은 조문탁이 눈짓을 보내 왔다.
‘성공했어?’
‘그래, 달려!’
염자량이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경공술을 펼치며 최대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헉, 헉, 헉. 이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제법 깊은 숲속.
조문탁이 무릎을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염자량도 걸음을 멈추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제법 찬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흐음. 완전히 성공한 건가?’
돌아보니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군가 뒤쫓는 느낌도 없었다.
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최대한 멀리 달아났다.
“쳇, 별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했군.”
맥이 탁 풀렸다.
겨우 창법 부교관이 아니었던가?
요 근래의 행보가 특이하긴 하지만, 어찌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겠나?
학관에서 무슨 착오가 있었거나, 사비강이 뒤로 손을 썼거나 했으리라.
그런 게 흔한 요즘 세상이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바로 이놈이지.’
염자량은 안아들고 온 검갑을 바닥에 털썩 내려 두었다.
조문탁이 숨을 몰아쉬면서도 궁금한지 가까이 다가왔다.
“검갑에 보관하는 걸 보니 정말 명검인가 보네.”
“흐흐. 말했던 대로 이번 일로 이득이 생기면 너에게 이 할을 챙겨 줄게.”
“헤헤. 나야 고맙지.”
어찌 보면 배당이 적은 편이지만, 조문탁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실제로 자신이 한 것이라곤 계획에 동참하고 망을 봐 준 것밖에 없었기에.
게다가 이 검은….
“울고 있어.”
“그래. 대박이라는 증거지.”
염자량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히죽 웃었다.
“검명이라니. 처음 봤어. 어서 열어보자.”
“기다려 봐.”
염자량이 천천히 검갑 덮개를 열었다.
악마의 형상이 새겨진 손잡이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예상과 달리 천에 쌓여 있진 않았지만, 대신 상자 안쪽 부분이 전부 푹신한 천으로 되어 있었다.
역시 검명 때문이리라.
지금도 검은 ‘우우웅’ 떠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흐흐!”
“후후후!”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팟!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뭐하는 짓이야?”
손잡이를 잡은 염자량이 눈을 부라리며 조문탁을 노려보았다.
조문탁은 검집을 잡은 채 광기 서린 표정으로 마주보더니 홀린 것처럼 대꾸했다.
“왜 그래? 같이 훔친 물건이잖아? 내게도 지분이 있다고.”
“일단, 내가 먼저 보고.”
“그건 아니지. 서로 공평하게 기회를 나눠 가져야지. 안 그래?”
“너, 미쳤냐?”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 나쁘지. 이게 네 것도 아니잖아?”
어느새 조문탁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염자량은 그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역시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으면서도.
“너, 이 새끼. 좋은 말 할 때 그 손 놔라.”
“흐흐흐. 네가 먼저 놔. 난 보기만 한다니까.”
“이 미친놈이!”
순간 염자량이 기를 끌어 모으고는 일장을 내질렀다.
하지만 조문탁이 얼른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염자량을 노려보았다.
“흐흐흐. 지금 날 죽이려고 했어?”
“너 같은 새끼는 죽어야지.”
“너부터 죽어!”
순간 염자량이 뒤로 껑충 물러났다.
그 바람에 베르타스가 검집에서 스릉 뽑혀 나왔다.
달빛을 받은 베르타스는 시리도록 눈부셨다.
“이 개새끼! 어디 죽어 봐라!”
“닥쳐! 누가 죽는지는 두고 봐야 알지!”
조문탁은 검집을, 염자량은 검을 들고 서로 부딪쳐 갔다.
쩌엉!
고막을 찢어발길 듯 큰 소리가 울리자, 주변의 나무들이 후드드 몸을 떨었다.
곧이어 염자량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곧장 검을 내찔렀다.
푸욱!
“커억!”
검봉이 조문탁의 복부를 깊숙이 찌르며 처박혔다.
“하악, 하악! 흐흐흐! 꼴좋다!”
“너… 나를….”
피를 왈칵 쏟아낸 조문탁이 손을 뻗으며 염자량을 가리켰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마침내 베르타스가 복부에서 쑤욱 뽑혀 나오자, 조문탁이 그 자리에 피를 쏟으며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염자량이 움찔거리고는 자신의 손과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역시 원래대로 돌아온 상황.
붉게 변한 검신은 조문탁의 피를 꿀꺽거리며 흡수했다.
그제야 바닥에 쓰러진 조문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어…? 이, 이건…!”
그 순간 다시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갔다.
“하아아악!”
아직은 부족하다.
더 많은 피를 마시고 싶다.
피를 보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열망이 염자량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크으으…! 싫어…!”
본능적으로 저항하면서도 그의 몸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침내 염자량은 베르타스를 거꾸로 쥐고 두 손을 치켜들었다.
마치 할복이라도 할 사람처럼.
“아니… 야…! 이건…! 이건…!”
마침내 염자량은 들고 있던 베르타스를 힘껏 내리쳤다.
검봉이 그대로 염자량의 배를 뚫으려는 순간.
탁.
“헉!”
누군가의 손이 베르타스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 순간 염자량을 사로잡던 열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교관…?”
고개를 들어 보니, 사비강이 냉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놔라. 이건 애들 장난감이 아니다.”
사비강의 얼굴에 북풍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