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귀환 마교관
8화
생도들이 나직이 술렁거렸다.
“설마, 지금 저 교관. 겁먹은 건 아니겠지?”
“긴장은 되겠지. 지면 개망신이고, 이기면 본전이니까.”
“그러게 창술이나 가르칠 것이지. 왜 담임까지 맡아서는….”
그때였다.
“이 녀석들! 교관님께 무슨 무례한 언사이더냐?”
생도들이 시선이 돌아갔다.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며 등부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비강이 슬쩍 돌아보자, 등부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잠시 참관하러 왔소. 아무래도 사 교관께서 첫 수업이기도 하고, 저렇듯 무례한 녀석들이 있을 지는 않을까 하여….”
“고맙지만, 그만 가도 좋소.”
순간 등부형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하지만 그 속생각을 모두 보일 수는 없는 법.
등부형이 예의 그 방긋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저 생도의 말 역시 일리는 있지 않소? 아무래도 좀 이상하게 여겨질 테니 말이오. 기실, 사 교관의 검술 실력을 저 녀석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도 하고 말이외다.”
“검법을 가르치다 보면 자연히 인정하게 될 거요.”
“아니, 아니죠. 그래도 믿음이 없다면 옳은 것도 삐뚤게 보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사 교관님의 검술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도들이 알 수 있도록. 그렇다고 정말 생도들과 검을 섞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교관님의 상대가 되어 드리겠다는 그 말씀입니다.”
등부형이 히죽 웃어보였다.
‘흐흐. 어디 한 번 생도들 앞에서 망신 좀 당해 봐라. 내겐 천군만마와 같은 자하낙인도가 있다. 뭐, 사실 부지깽이를 든다고 한들 너 같은 녀석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겠지만.’
한편 등부형의 말을 듣자 생도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술렁거렸다.
“뭐야? 그럼 등 교관하고 사 교관이 대련하는 건가?”
“하지만 등 교관은 도를 쓰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 교관도 검을 쓰면 되는 거지.”
사비강이 등부형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괜찮겠소?”
“음? 하하하! 지금 날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하하하! 재미있군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고말고요!”
“후후. 좋소. 그럼 후회는 하지 마시길.”
등부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놈. 마지막까지 똥배짱을 부리겠다는 거군. 그럴수록 네가 빠져들 수렁은 더 깊어진다는 걸 모르느냐?’
그는 내심 조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사비강 역시 형식상 예를 다하고는 바로 섰다.
도를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하려던 등부형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음? 왜 검을 뽑지 않는 거지? 이런, 너무 긴장해 버렸나?’
등부형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사 교관. 아무리 긴장을 해도 그렇지 검을 뽑는 것조차 잊으면 어쩌오?”
그의 말에 생도들이 키들거렸다.
하지만 사비강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난 상관 말고 시작하시오. 후후.”
“하지만 이래서야 무방비 상태의 교관을 내가 공격하는….”
“거참, 말 많네. 그냥 시작하라니까.”
사비강이 먼 산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을 만큼 컸기에 등부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조, 좋소이다! 후회 마시오!”
“부디.”
등부형은 내심 이를 갈았다.
그래도 손속에 사정을 좀 두려고 했다.
한데 이렇게 시건방을 떨어서야 자비로운 마음이 싹 사라지지 않나?
‘오냐, 내 오늘 네놈을 부신각주에게 꼭 보내주고 말겠다.’
자하낙인도가 빛을 받아 붉게 타올랐다.
여차하면 공격할 태세.
그럼에도 사비강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흐흐. 아예 얼어붙은 모양이군.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하다니.’
사비강이 들고 있는 검도 요상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서역에서 건너 온 것처럼 보였는데, 보나마나 저잣거리에서 굴러다니는 것들 중 그럴싸한 녀석을 하나 건져온 것이리라.
등부형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찰나.
“들어가겠소!”
마지막 배려였다.
말도 하지 않고 공격했다간 기습이네 뭐네 우는 소리가 나올까 봐.
그런데….
쉬이이잇! 차카앙!
섬광이 번뜩였다.
그 직후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어느새 사비강은 검을 뽑아 들어 올렸고, 자신이 내려친 자하낙인도는 그대로 검신과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났다.
‘부서져…?’
자하낙인도는 마치 붉은 꽃잎이 낙화하듯이 조각조각 흩어져 내렸다.
단 일초.
‘이, 이게 무슨…!’
영원과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자하낙인도 파편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생도들 역시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털썩!
등부형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떠돌았다.
마침내 조각조각 흩어진 자하낙인도의 붉은 파편을 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내, 내, 내… 자하낙인도가…!”
지난 일 년 간 얼마나 애지중지했던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칼을 갈지 않았던가?
“저어… 교관님?”
마침 가까이에 서 있던 생도 한 명이 등부형을 조심스레 불렀다.
그제야 등부형이 작금의 상황을 상기하고는 흠칫거렸다.
‘이, 이게 무슨 꼴사나운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무릎까지 꿇다니!’
등부형이 벌떡 일어나서는 짐짓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헛! 허허헛! 허허허허!”
미친 듯이 웃는 등부형을 보며 생도들은 어리둥절했다.
한참이나 눈물과 함께 웃던 등부형이 생도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보았느냐? 사 교관께서는 이렇듯 너희들을 가르치기에 충분한 실력이니라! 내, 내가 비록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고 한들 단 일초로 이만한 무용을 보이기는 힘든 법. 앞으로는 사 교관을 잘 따르도록 해라!”
생도들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자하낙인도 파편을 잠시 바라보던 등부형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내심 자하낙인도에 대한 미련이 그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뭐라고 하는 듯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등부형의 팔을 잡았다.
“웬 놈이냐!”
등부형이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돌아서자, 사비강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붙잡았소.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하오.”
그제야 등부형은 많은 생도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헛기침을 했다.
“별 말씀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나름 아끼시던 보도였던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됐소.”
“하하하! 아니오. 사실 저 도는 저잣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요. 신경 쓰지 마시오.”
“아, 역시 그렇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소. 후후.”
“그럼, 나는 이만.”
등부형이 몸을 돌렸다.
“아, 잠깐.”
사비강이 다시 그를 불렀다.
등부형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돌아보자, 사비강이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소이다. 후후.”
“선물이라니?”
등부형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비강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사악하게 변했다.
“왜 모른 척을 하십니까? 후후. 하지만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무슨 소리요? 나는 사 형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용천관의 교관이 사파 조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좀 껄끄럽지 않겠습니까? 선물도 좋지만 앞으로는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등부형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 이놈이 어떻게 그걸…!’
뜨악한 표정을 짓던 등부형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하하하! 그럼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비강이 짐짓 큰 소리로 떠들며 등부형의 손을 맞잡았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등부형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별 말씀을. 그럼 나는 이만.”
등부형은 뻣뻣한 자세로 돌아서서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하낙인도가 거짓말처럼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이 귀영부와 내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생도들 앞에서 치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협박까지 당했다.
‘죽여…버리겠다! 이 개새끼!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사비강! 내손으로 죽여 버릴 거다!’
등부형의 얼굴이 귀신처럼 어그러져 있었다.
반면 사비강은 냉소를 지으며 멀어져가는 등부형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
“그 약골이 정말로 등 교관을 이긴 거야?”
“나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단 일 초에 끝나다니.”
“그럼, 등 교관보다 우리 담임 교관이 더 세다는 건가?”
마당의 잡초를 제거하는 생도들이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연우경을 비롯한 곡보옥 무리는 한쪽 바위 곁에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사 교관이 정말 우리 담임이 될 것 같군. 그런데 정말 사 교관이 등 교관을 이긴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등 교관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고 했잖아.”
듣고 있던 생도 한 명이 대꾸했다.
곡보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지막에 두 사람이 귓속말 하는 걸 봤잖아?”
“맞아. 아마도 자신에게 져줘서 고맙다고 했을 거야. 틀림없어.”
“하여튼 교관이라는 것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곡보옥의 말에 연우경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학관에서 내린 결정인 만큼 하루아침에 상황을 뒤집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 시간을 두고 천천히 괴롭히는 맛도 좋지.”
“후후후. 하긴. 이번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상당히 불만이 있는 것 같으니까.”
곡보옥의 시선이 다른 생도들에게 향했다.
몇몇 생도들은 사비강이 시킨 대로 마당의 잡초와 자갈을 제거하고, 기울어진 현판을 바로잡고 있었지만, 다수의 생도들은 끼리끼리 뭉쳐서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 모두 자신들처럼 사비강을 담임 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관 길들이기.
과거에는 용천관이 화려한 위세를 자랑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후기지수들의 출셋길을 위한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후기지수가 용천관에 입관하려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용천관에는 각종 무공 비서(祕書)를 보관하는 승룡각(乘龍閣)이 있다.
과거 정마대전에서 정도맹이 모은 비급들인데, 당시 여러 문파의 합의하에 용천관에서 보관하기로 했던 것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승룡각은 생도들에게만 개방되는 곳으로 대여는 일절 금물이다.
게다가 용천관에서 우수 생도로 지정되면 각종 단약을 제공받는 것은 물론, 정도맹의 주요 직책으로 곧바로 천거된다는 이점도 있다.
실제로 정도맹의 구성원은 원칙적으로 용천관 출신만 선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지만 통상적인 관례였다.
뿐만 아니라, 각 문파나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교감하며 친목을 다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망 높은 문파나 가문에서도 당연히 후기지수를 용천관에 입관시키려고 하고, 또한 교관들을 매수하거나 구슬려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생도들 역시 교관들을 그저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강호 선배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 속에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비강’이라는 존재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
연우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곧 우리를 고분고분 따르거나, 스스로 관두게 되겠지.”
“흐흐흐. 앞으로 학관 생활이 기대되는군.”
곡보옥이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한편 그런 그들을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호오. 등부형의 선공을 단 일 초식에 끝을 내다니.”
절벽 위에 꼿꼿하게 선 노인이 하얀 수염을 쓸며 부드럽게 웃었다.
비교적 작은 키에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위엄이 느껴지는 풍모였다.
그의 곁에는 흑의 경장 차림에 죽립을 쓴 무인이 서 있었는데, 경장으로는 미처 가릴 수 없는 굴곡 있는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마침 그녀의 입에서 옥구슬이 구르는 듯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귀야채주의 수급을 취한 것은 사비강 본인이 맞는 듯합니다.”
“과연. 저자가 요즘 학관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란 말이렷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변변찮은 무인에게 부상을 입고 돌아왔던 창법 부교관이었지요.”
“부신각주가 그를 추천했다지?”
“그렇습니다, 관주님.”
관주.
흑의 경장 여인은 그 노인을 ‘관주(館主)’라고 불렀다.
그랬다.
선풍도골의 노인은 바로 용천관의 주인인 은기륭(殷基隆)이었다.
은기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신각주의 천거가 있었다면, 비록 무공이 달렸어도 필시 됨됨이가 바른 자이리라. 한데 그자가 무공까지 겸비했다면 더 없이 반길 일이지 않은가?”
“교관들 사이에서는 꽤나 불만이 있는 듯합니다.”
“그 정도는 버텨내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가 정말 본관에 변화를 일으켜 줄 도화선 같은 인재라면 말일세.”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아직은 두고 볼 일. 이왕이면 저자가 한바탕 시원하게 설쳐 주면 좋겠군.”
은기륭은 껄껄 웃으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