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95화 (296/328)

295. 촌장을 잡다

태원평에서 하루 정도 떨어진 위치.

붉은빛의 환금호를 내려다보는 세 사람.

“어때요? 예쁘죠?”

명화진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엄청나군.”

“장난 아니네. 이렇게 넓을 줄 몰랐어.”

성철각과 황보궁은 처음 보는 광경에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붉은색의 물결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성철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금호 재배지를 보니 이해가 되었다.

“여기에서 얼마가 빠져나갔는지 따로 신경 쓰지 않으면 전혀 모르겠어.”

“철각 형,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환금호가 사라진 것을 찾아낸 것만 해도 대단하네요.”

“예전 촌장 할아버지께서 몰래 오셔서 말해주셨어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대단한 분이시군요. 그럼 그분을 만나러 가보지요.”

“네. 제가 어디에 사시는지 알아요. 따라오세요.”

명화진은 앞장서서 마을에 들어섰다.

웅성웅성.

마을 주민들이 세 사람을 보며 웅성거렸다.

명화진은 간혹 원주 명왕고와 찾아오기에 얼굴을 알아보았지만, 그녀와 함께 들어선 두 명의 청년은 모르는 얼굴들이었으니까.

마을 중앙에 촌장이 머무는 집이 있었다.

하지만 명화진은 그곳을 지나 안쪽 마을로 더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멈춘 곳은 방 한 칸과 주방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끼이익.

명화진은 나뭇가지로 엮어서 만든 목문을 열었다.

“누구요?”

정문 밖에서 들려온 기척을 느꼈는지, 방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촌장 할아버지. 저예요.”

“이런…… 화진 아가씨가 아닙니까요.”

노인은 그녀의 목소리가 익숙한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스윽.

노인은 구부러진 허리를 겨우 펴며 방 밖으로 나와, 싱긋 환하게 웃는 명화진을 보았다.

“아가씨께서 누추한 곳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요?”

“그 일 때문에 왔어요.”

그 일…….

중요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년 두 명만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주름이 더 진해졌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까요?”

“네. 여기는 철각 오빠이고 덩치가 좋은 친구는 황보궁이라고 해요.”

“아가씨, 위험한 곳에 두 사람만 데리고 오셨다는 것입니까?”

“걱정 마세요. 여기 두 분이라면 하나도 두려울 게 없거든요.”

명화진은 걱정이 안 된다고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현재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원평에 알린 후에도 조용히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아가씨가 온 것을 그가 알면 안 좋아할 텐데…….’

노인의 걱정이 바로 현실로 일어났다.

걱정하자마자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 소저, 그분과 함께 앉아서 쉬고 계세요.”

“네.”

명화진은 노인의 팔을 잡고 마루에 앉았다.

우루루루-

문 밖으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중년 사내가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화진 아가씨가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현재 마을의 촌장이며 환금호의 재배 책임자였다.

“그냥요. 잠시 놀러왔어요.”

“마을에 왔으면 바로 저에게 오지 않으시고…… 가시지요.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갈게요. 촌장 할아버지와 이야기 좀 하다가요.”

“아가씨. 이제 촌장은 그 늙은이가 아니고 접니다. 혹시 다칠 수 있소이다.”

명화진을 압박하려는 듯 목소리가 거칠었다.

“이보시오.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명 소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 같은데.”

“넌 누구지?”

촌장은 매섭게 성철각을 노려보았다.

헐렁한 걸복을 입은 장신의 청년.

하지만 걸복이라고 하기에 너무 깨끗해 보였다.

“보면 모르겠소?”

“거지인 것 같은데 진짜 거지인가?”

“거지이긴 하죠.”

“……?”

거지라고 하기엔 이상했지만 당장 급한 것은 명화진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뭣들 하느냐, 아가씨를 모셔라.”

“옙. 알겠습니다.”

건장한 사내들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가,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오면 당신들 사지 중 하나는 부러질 겁니다.”

성철각의 기세에 움찔거렸다.

“……거지가 미쳤군. 이놈을 때려눕히고 어서 데리고 오지 않고!”

촌장의 명에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차아암…… 말도 안 들어요. 나쁜 놈들은 왜들 이럴까?”

퍽퍽퍽퍽퍽!

그와 동시에 황보궁의 주먹이 사내들을 향해 날아갔다.

“커어어억!”

“아아악!!”

일반 사내들이 내력이 실린 황보궁의 일격을 제대로 받아낼 리 없었다.

여섯 명의 사내들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촌장은 깜짝 놀랐다.

“허억…… 무슨…… 무슨 짓이냐?!”

“말을 안 들으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죠. 네놈도 들어오든지. 아니면 내가 갈까?”

“……자, 잠깐…… 기다려라.”

촌장은 황급히 다가오는 황보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막았다.

“무슨 할 말이 있소?”

“여기서 그만하면 지금까지 일은 봐주겠네. 네, 네놈들이 정말 여기에서 죽고 싶은 모양이지?”

“죽는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야.”

“어어어어?”

샤샤삭.

촌장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네놈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조만간 여기로 무사들이 모여 올 것이다. 죽기 싫으면 항복을 하는 게 좋을 게다.”

“그런가요?”

황보궁은 뒤를 돌아보았다.

“형, 어떻게 할까요?”

“답은 나와 있네. 모두 때려잡자.”

황보궁의 씨익 웃었다.

“알겠습니다.”

파앗!

황보궁은 돌아서는 순간 튀어나갔다.

퍽!

앞에 다가선 황보궁의 오른손이 촌장의 복부에 박혀 있었다.

“켁.”

비명.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스르르르-

촌장은 마치 연체동물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휙!

휘익!

그와 동시에 촌장과 함께 몰려왔던 나머지 사내들 모두 하늘 위로 신형이 날아올랐다.

* * *

명화진과 함께 두 청년만 이곳에 온 이유.

노인은 이제 두 청년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노인은 무공을 펼치는 무인들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절정 무공을 펼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허허. 오늘 말로만 듣던 무림고수를 본 것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저놈들이 너무 약해서 제가 강해 보이는 거지요.”

“아닙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촌부라 할지라도 두 분께서는 무림에서도 상당히 높은 고인임을 압니다.”

노인은 함께 앉아 있던 명화진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보았던 그녀.

좋은 신랑을 만났으면 했는데.

“아가씨께서 저런 분을 만났으면…….”

“하, 할아버지도 마음에 드시나요? 사실…… 제가 좋아하는 분이세요…… 혹시 중원 무림에 일황사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하이고…… 제가 중원 무림에 일자무식한 놈이라도 다른 건 몰라도 그 정도는 압니다.”

“저분이 바로 각제 성철각 님이세요……!”

일황사제 중의 일인.

무림 최고의 무인이 확실했다.

“저분께서도…… 아가씨를 좋아하십니까?”

“그, 그건…….”

명화진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만난 이후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때 성철각의 대답이 들렸다.

“어르신, 맞습니다. 제가 명 소저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노인의 웃음과 함께 명화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 * *

네 사람은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한평생을 환금호를 수확하면서 보낸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 일선은 그만두었지만 항상 잘 자라고 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에 나가서 살폈지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많은 양이 사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근데 아무도 그에 대해서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지요. 환금호는 일반 작물이 아니기에, 몰래 원주님께 알렸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던 건 잘하셨습니다. 저놈들을 보니 큰일 날 뻔했습니다.”

노인은 바닥에 쓰러진 채 누워 있는 촌장을 보았다.

“아이구, 저놈이 언젠가는 사고 칠 줄 알았습니다…….”

“궁아, 저놈들을 깨워서 촌장 집으로 가야겠다.”

“알겠어요.”

툭툭.

황보궁이 쓰러진 촌장을 건드렸다.

“일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

“……철각 형. 진짜로 다들 한 번에 말을 안 듣는구나.”

“그렇지? 그럴 땐 어떻게 한다고 했지?”

“사지를 잘라라?”

“자르는 것보다 부러뜨려.”

“알겠어요.”

파앗!

황보궁의 발이 움직이자 촌장의 어깨가 부러졌다.

“아아악!!”

촌장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꿈틀.

촌장의 비명이 울리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들이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이번에는 반대쪽입니다.”

“아…… 아…… 닙…… 니다.”

촌장은 입을 깨물며 일어나려고 했다.

“진작 일어나면 좋잖아요.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

“앞장서시오.”

“어디를…….”

“기어서 가고 싶소?”

“헉…… 아닙니다.”

한쪽 어깨를 아래로 축 늘인 촌장이 앞장을 섰다.

얼마 가지 않았을 때.

두두두두-

촌장 집으로 가는 도중, 한 무리가 전방에서 몰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어 있던 촌장의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이들은 보통 무인이 아니었다.

환금호와 계약을 했던 그들이 보내준 무인들이었다.

‘이 새끼들…… 네놈들은 모두 죽었어!’

두 명밖에 없으니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촌장은 허겁지겁 앞으로 내달렸다.

부서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무리들 옆에 섰다.

“저…… 놈들을…… 죽이시오!!”

“어허…… 저 아저씨, 많이 맞아야겠네요.”

황보궁은 내력을 일으켰다.

무리들 수장인 사내가 바로 황보궁의 내공을 알아보았다.

“황보세가인가?”

“대단하네요. 한 번에 알아보네.”

“훗. 황보세가의 무공은 별게 아니라서.”

“당신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익혔는지 궁금하군요.”

“크크크. 궁금한가? 그럼 황보세가의 어린놈에게 어르신이 익힌 무공을 보여주지!”

휘리리릭!

사내의 신형이 검은 연기처럼 흐르면서 황보궁의 앞에 다가섰다.

황보궁의 가슴을 향해 뻗은 일장.

흑막이 피어오르며 암흑멸화장(暗黑滅化掌)이 단번에 쏟아져 나왔다.

퍼어어엉!!

흑막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크크크. 암흑멸화장에 살아남는 놈은 없다.’

사내는 자신했다.

팔 성의 내력에 완벽히 가슴을 강타했다.

가슴이 터져 죽었을 것이었다.

그때,

휙!

흑막 사이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케에엑!”

황보궁의 손아귀에 목이 잡혔다.

사내의 눈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황보궁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혈이 잡힌 듯 몸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엄청 자랑하더니 당신도 별거 아니네. 시시해.”

슈우우욱.

“이놈…… 대주를 놓아라!”

황보궁의 손과 몸을 향해 검이 날아왔다.

까아아앙!

검들이 부딪히면서 단번에 튕겨 나갔다.

“허억…… 금강불괴…….”

당황한 무리들의 눈빛과 달리 황보궁은 씨익 웃었다.

“대형이 싸울 때 좋다고 하셔서 엄청 죽을 뻔하면서도 익혔는데. 정말 좋긴 하네.”

남하림은 양천의 무공인 금강수체를 황보궁에게 익히도록 했다.

어릴 적부터 금강수체를 익혔던 남하림과 달리, 황보궁은 익힐 때마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황보궁의 육체가 아니면 도저히 익힐 수 없을 정도.

“일단 당신부터 조져야지.”

황보궁은 손에 잡고 있던 사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아앙!!

사내의 턱이 돌아가면서 단숨에 목숨이 끊어졌다.

“대주…… 가……!”

그들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대주를 한 방에 죽이는 황보세가의 청년.

“네놈들은 누구냐?”

“그러는 당신들은요?”

휘리리릭!

성철각은 취영화류팔선을 펼치며 무리들 사이를 지나갔다.

챠르르르-

스걱.

피피피핏!

무리들 사이로 한 번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차가운 시신으로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서 있는 사내의 눈에 성철각이 발목에 찬 철각반이 보였다.

‘헉…… 저건…….’

“각…… 제…… 성철각!”

창천의 무인들에게 일황사제는 최악의 적수였다.

“단번에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을 보면 창천에서 나온 게 확실하군요.”

“……!”

“에고. 말문이 막힌 걸 보니 확실하네요. 창천에서 또 나쁜 짓을 하려고 이것을 훔치는 모양이외다.”

성철각은 환금호를 훔친 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궁아, 저놈들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여기를 깨끗하게 정리해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타앗!

황보궁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남아 있던 창천의 무인들을 때려눕혔다.

쿠우우웅!

퍼어어엉!!

일각이 지나기도 전에 바닥에 서 있는 창천의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 끝이 났어요? 한참 재미있을 찰나였는데…….”

* * *

덜컹.

촌장의 거처에 들어왔다.

“부장이 말하기를 뒤가 구린 놈들은 항상 증거를 모아둔다고 했지.”

“왜 그런가요?”

“협박용이겠지? 이런 놈들은 물귀신 같은 놈들이라서 만일을 위해 많이 모아놨을 거야.”

“아하, 알겠어요.”

황보궁은 새롭게 하나씩 배워가는 게 즐거웠다.

성철각은 촌장을 툭 쳤다.

“저놈들과 연관된 모든 것들을 여기에 가지고 오면 좋겠소이다.”

“…….”

“어허. 또 시간 끄는군요. 이번엔 정말로 기어 다녀야 할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인지 모르겠소이까? 내가 움직이면 그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촌장의 몸이 달달 떨렸다.

이미 두 팔이 너덜거렸다.

무림의 성인들이라 불리는 일황사제.

소문은 거짓이었다.

이들은 성인이 아니라 악마였다.

잠시 후.

드르륵.

비밀 문이 열렸다.

“어허…… 내가 있을 때는 이런 것이 없었거늘. 이놈아! 얼마나 욕심을 부리려고 이런 것까지 만들었더냐!”

노인의 호통 소리에 촌장은 고개를 숙였다.

성철각은 비밀 문에 들어간 뒤 장부들을 찾아냈다.

“이것 봐라…….”

장부들 사이에서 눈에 익은 이름이 나왔다.

“북방이란 이름이 있네.”

“철각 형, 망한 북방상국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은데…… 주기적으로 표행을 한 곳이 북방표국이라고 적혀 있어. 이런 일에 관여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구나.”

“철각 형, 이젠 어떻게 할까요?”

“부장이 여러 가지 일이 섞여 있을 때는 차례대로 움직이면 된다고 했어. 우선 태원평으로 돌아가서 총관이 어디까지 불었는지 확인해야겠지.”

성철각과 황보궁, 명화진은 마을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시 태원평으로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