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태원평에 도착하다
대막태양궁으로 긴급 전령이 도착했다.
대막살호(大漠殺狐)가 보낸 붉은색 전서.
중년 사내가 다급히 궁주에게 전달했다.
전서를 펴보던 그의 손이 떨렸다.
“뭣이?”
태양궁주 살유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원평 원주의 곁에 일황사제 중 각제와 권소협이 함께 자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은 수하들 앞에서 체통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이런……!’
다행히 그들 두 명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정말로 그들이 태원평에 왔다면 그들의 계약을 해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전에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의무 위반인 걸로 보이는데.”
“맞습니다. 이번 의뢰는 분명 그들이 잘못한 게 맞습니다. 각제가 그와 동행한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계약을 취소하거나 새롭게 계약을 해야 합니다.”
“좋아, 그들에게 연락을 해서 다시 만나자고 해.”
“넵, 궁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태양궁주 살유탑은 대전을 빠르게 나가는 전령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요즘 중원 무림에서 일황사제가 대세라고 하던데…… 괜히 건드렸다가 개망신을 당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군.’
슥슥.
오른쪽 허벅지를 문질렀다.
“…….”
일자로 길게 뻗는 상처 자국.
이미 나은 상처이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상 상처가 욱신거렸다.
‘망할…….’
좋지 않는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용병림 투룡군광검 미공서.
그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는 겨우 중원의 용병이라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와 만나 무공을 겨루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죽을 뻔했다.
그의 손속에 인정이 없었다면 허벅지가 아닌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었다.
‘어…… 으으…….’
살유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그 일을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최근 소문에 의하면 무시무시한 그들조차 일황사제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미친놈들…… 본 궁을 없애려고 작정을 한 거야.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 * *
객잔에서 일어난 일 외에는 평온하게 마차가 움직였다.
“각제, 마지막으로 언덕을 넘어서면 태원평이 나타날 것이네.”
두두두두-
언덕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마대의 거친 소리.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명왕고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우릴 마중 나오는 모양이군.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네. 연락을 하지 않았거늘.”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저 정도로 몰려오는 것이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없는 사이에 태원평이 이상하게 된 것 같구려.”
“괜찮습니다. 부장이 항상 좋은 곳에는 똥파리 같은 놈들이 날아다닌다고 하더군요.”
성철각은 마차를 세웠다.
“두 분은 편히 계시면 됩니다. 저 정도는 큰일도 아닙니다.”
“알겠네.”
명화진은 마차에 내리는 성철각을 보며 얼른 말을 했다.
“조심하세요.”
“명 소저, 걱정 마세요.”
성철각과 황보궁은 마차 앞으로 나섰다.
마차를 호위하던 열 명의 무사들도 검을 뺀 채 두 사람 뒤에 섰다.
히이이잉!
언덕 위로 일백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태원평 소속의 무장무사들.
제법 강해 보였다.
성철각은 언덕 위를 보며 물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태원평 최고의 무사 평야기가 이끄는 평막무력단입니다. 근데…… 저놈들 모두 배신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태원평에는 무력단과 호위단이 존재했다.
호위무사는 말을 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변절자는 나쁜 사람들이죠.”
“죽일 놈들입니다.”
두두두두-
언덕 위에서 일백 명의 기마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단숨에 쓸어버리려는 듯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언덕으로 내려오는 길 양옆에서 강한 내력이 뻗어 나왔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들.
태원평에서 만나기로 했던 불사투군단.
그들은 이미 도착한 뒤 성철각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이었다.
콰아아앙!!
불사투군단의 기습에 평막무력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단숨에 무너졌다.
“네놈들은 누구냐?”
평야기는 놀란 시선으로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어디서 시끄럽게 해?”
휘익!
평야기의 눈앞에 광풍이 지나갔다.
‘어…… 어…… 어…….’
스걱.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에서 붉은 혈흔이 점점 진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무한 죽음.
그들은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하고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불사투군단에 의해 평막무력단은 한 명도 남김없이 전멸당했다.
다각다각.
미공서가 성철각과 황보궁 앞으로 다가섰다.
“미공서 님,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우리가 없어도 각제께서 처리했을 게 아니오. 여기부터 우리가 앞장을 서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성철각과 황보궁은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명왕고와 명화진은 마차 안에서 밖의 상황을 알았다.
‘저들이 용병림이구나.’
평막무력단에 비하면 천군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용병림이 옆에 있었구려.”
성철각과 황보궁이 곁에 있었지만 불사투군단의 존재는 또 다른 안심이 되었다.
“태원평에 들어가면 한바탕 뒤집어야지 않겠습니까?”
“각제, 나도 그 생각이 들었다네. 무력단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이미 태원평은 누군가에 장악이 된 상태인 것 같네.”
“혹시 그가 누구인지 의심이 갈 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이들을 데리고 온 인물이 육 총관이네. 남들보다 욕심이 많긴 하지만 일 처리를 잘해서 총관직을 맡겨놓았다네.”
“태원평으로 가는 즉시 그자를 잡아서 족쳐야 하겠군요.”
“각제, 그가 무력단을 보냈다는 증거가 없지 않는가?”
“무력단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일단 잡아놓고 증거를 찾으면 됩니다.”
“알겠네.”
* * *
육서웅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객잔에서 원주를 죽이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의뢰를 한 곳은 대막태양궁이었다.
설마 실패할 것이라 생각조차 못했다.
의뢰가 실패를 했다면 그것은 대막태양궁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대막태양궁에서는 적반하장으로 거래에 대해 사전 의무 위반을 들먹이며 보상금을 요구했다.
원주 곁에 각제와 권소협이 함께한다고 했다.
명왕고가 돌아오면 큰일이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태원평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다행히 보고에 의하면 원주의 곁에는 각제와 권소협 외엔 없다고 했다.
육서웅은 결국 태원평의 인물들 모르게 무력단을 보냈다.
무력단이라면……!
한꺼번에 밀어붙인다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무림에 대해 무지한 결과였다.
일황사제의 무력이 어느 수준인지 그는 개념조차 없었다.
덜컹!
총관실의 문이 열렸다.
“육 총관님!”
‘허억…….’
불쑥 들어온 수하에 놀란 육서웅이 헛숨을 삼켰다.
“무…… 슨 일이냐?”
“원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혼…… 자서?”
“혼자라기보다는…… 중원에서 무인들을 잔뜩 데리고 오셨습니다.”
“무인들과?”
분명 듣기로는 두 사람밖에 없다고 했는데.
“원주님께서 부르십니다. 평전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시지요.”
“어…… 알겠네.”
이제 어쩔 수 없었다.
“…….”
서랍 안에서 은박지에 싼 작은 환단을 꺼내어 소매에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경내를 지나 태원평전으로 향했다.
‘허어억!’
태원평전의 앞 광장이 비좁을 정도로 가득 찬 무인들.
‘이들이…… 원주와 함께 온 무인들인가?’
그들의 매서운 눈빛을 피하며 육서웅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드르륵.
열린 문으로 대전에 들어서자,
‘원…… 주.’
멀리 자리에 앉아 있는 명왕고와 시선이 마주쳤다.
적의가 담긴 눈빛과 표정.
그 옆에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원주 명왕고 앞으로 다가선 그가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명왕고와 세 명의 사내를 몰래 살펴보는 중이었다.
“원주님, 돌아오셨습니까?”
“육 총관은 잘 지냈소이까? 오는 길에 환영 인사를 잘 받았소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허.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이 늘었구려.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아.”
“…….”
육서웅은 얼굴의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스윽.
황보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장한 청년.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권소협.’
그는 재빨리 환단을 꺼내 입에 넣으려고 했다.
척!
그때, 황보궁이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아아악!!”
강한 힘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툭.
환단이 바닥에 떨어졌다.
“궁아, 정리해라.”
“네. 알겠어요.”
황보궁이 어깨에 내력을 밀어 넣자 육서웅의 몸에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원주님, 이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이까?”
“우선 환금호 재배지에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동안 원주님께서는 이자를 심문해서 관련된 자들을 모두 잡아내면 됩니다. 그 일은 미공서 님께 부탁을 하시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알겠네.”
* * *
남하림은 은하궁에 도착한 후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사흘 후, 황금 마차는 신무맹에 도착했다.
남하림이 없는 동안 신무맹의 내원은 바쁘게 돌아갔다.
안휘사대문의 멸문에 관해 찬반 의견들이 내원 사이에서도 시끄럽게 말들이 나왔다.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신무맹에서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를 내기도 했다.
“어디에서 그런 말이 나오던가요?”
진후도인은 망설였다.
마치 고자질을 하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후도인은 피식 웃었다.
‘하긴…… 못할 말은 없지.’
“서문세가, 단목세가, 하후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소이다. 그리고 공동파와 태산파에서도…….”
“제법 되네요.”
“뒷말이 나올 수 있을 정도이외다.”
“할 말을 하는 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낫지요.”
“괜찮으신지요?”
“사실이니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럴 것이라 반신반의했었다.
그곳들 중 한 곳이라도 신무맹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똑똑.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내원장님, 검제께서 오셨습니다.”
‘검제가?’
진후도인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제가 휘연 형을 불렀어요.”
“그렇군요…….”
검제 이휘연을 내원까지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드륵.
이휘연이 안으로 들어섰다.
“형, 여기에 앉아요.”
남하림은 바로 옆자리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제가 두 분께 할 말이 있어서요. 겸사겸사 온 김에요.”
“잘하셨습니다.”
진후도인은 중요한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최근에 세 명이 만난 경우는 드물었다.
“안휘사대문을 친 창천의 다음 목표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문으로는 산동성이 될 거라 해서 지금 바짝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휘연 형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휘연은 바로 대답을 못 했다.
창천에서 산동성의 문파들을 칠 것이라는 증거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중원 무림인들의 소문일 뿐이었다.
“그들이 왜 안휘성을 가장 먼저 공격했을까요?”
“맹주, 그들에게 이유가 있었소이까?”
“창천처럼 머리 잘 쓰는 사람이 무작정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는 이휘연이 물었다.
“이유가 뭐지?”
“중원을 칠 것이라는 선전포고죠. 그리고 창천의 힘을 무림에 알리기 위한 잣대. 세 문파의 힘을 중원 무림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번 일은 보여준 거예요. 창천이 움직인다면 네놈들도 이들처럼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하니 까불지 말라는 의미. 이런 거죠.”
“제대로 먹힌 것 같군. 전부 겁을 먹긴 했어.”
“맞아요. 그래서 신무맹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던 일에 말들이 많이 나오는 건, 혹시나 같은 경우가 생길 때 신무맹이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죠.”
“그건 알겠어. 우리에게 차기 목표를 묻는 걸 보면, 네 생각은 산동성이 아니라는 말 같은데.”
“무림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이번에는 굵직한 곳을 건드려 보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굵직한 곳이라면…… 설마…….”
남하림이 진후도인과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놈들이 무당파를 노린다는 것이냐?”
“내가 창천주라면 바로 무당파죠.”
진후도인과 이휘연은 말문이 막혔다.
안휘의 세 문파를 한시진도 안 된 시간에 멸문시킨 힘은 대단했다.
무당파가 안휘의 문파들과 전력을 다해 싸운다고 해도 한 시진 만에 전멸시킬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확실한가?”
“세상에 확실한 건 없지만, 다만 가능성은 구 할 이상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걸황이 그렇다고 하면 맞겠지. 신무맹에선 어떻게 하면 될까?”
“신무맹에서 도움을 줄 수는 없어요.”
“…….”
“맹주, 그게 무슨 말이오?”
진후도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무당파만으로는 상대하기가 버거울 수 있었다.
“만일 신무맹에서 움직이는 게 알려진다면 창천에서는 곧바로 다른 곳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때는 창천에서 어디를 칠 것인지 모른다는 거죠.”
“아아…….”
무당파를 위해 다른 문파에게 위험을 넘길 수 없었다.
“알겠다. 창천도 괜히 위험을 부담하지 않겠다는 말이군. 신무맹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
“본도도 가겠소이다.”
“후후, 휘연 형. 신무맹이 안 간다고 해서 무당파에 원군이 못 가는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지? 본 방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냐?”
“창천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 본 방은 산동성으로 가는 척할 거야. 그렇게 되면 확실히 무당파를 칠 준비를 할 게 틀림없어.”
“…….”
개방도 아니라면 원군을 줄 수 있는 곳이 궁금해졌다.
“무당산으로 가는 건 은하궁이지.”
‘은하궁…….’
남하림은 말을 마치면서 미소를 지었다.
“창천은 은하궁이 움직일 거라 예상을 못할 거야. 궁주도 가만히 당하고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둘 다 성격이 비슷해서 지기 싫어하지. 고맙군. 은하궁이 도움을 준다면 해볼 만해.”
“맹주, 언제 이런 생각을 했소이까?”
“보통 이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허, 허허허.”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진후도인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