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창천무장군 무너지다
은하영화당으로 들어서는 여인.
이곳은 은하궁으로 찾아온 귀빈들을 위한 전각이었다.
그동안 많은 귀빈들이 찾아오긴 했지만, 은하영화당으로 안내한 적은 없었다.
오직 다섯 명만 지낼 수 있도록 정했기 때문이다.
은하궁주 유미령은 정원을 지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좋은 일로 찾아온 건 아니지만 늘 만나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문 앞에 선 그녀의 목소리에 이미 반가움이 묻어나 있었다.
“접니다. 들어가도 되나요?”
“넵.”
우당탕!
안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쿵쿵.
발걸음 소리가 무거웠다.
드륵-
문이 재빨리 열렸다.
“누나!”
성문에서 짧게 인사만을 나누었던 황보궁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는 황보궁을 올려다보았다.
하루하루가 달라진 모습이었다.
키는 물론 상체 또한 황보세가의 성인들과 비교해도 훨씬 단단해 보였다.
“궁아는 볼수록 커지는 것 같구나.”
“헤헤, 대형이 많이 먹으라고 해서요. 한참 키 클 나이라고 해서 최대한 먹고 있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먹는 만큼 수련은 해야 할 거다. 잠시 딴짓 하면 필요 없는 살들이 많이 생겨. 알겠지?”
“네. 말씀 명심하겠어요.”
스윽.
황보궁은 옆으로 물러났다.
당무독과 성철각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궁주님, 오셨습니까?”
“방해가 된 건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수님, 당연히 환영합니다.”
당무독과 성철각은 남하림과 나이가 같았으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녀를 형수라 부르기로 정했다.
유미령이 영화당에 들어서자 사내들 세 명만 있던 때와 달리 분위기가 화사하게 변했다.
네 명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격식이란 말이 필요가 없었다.
“그분께서 마교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하림은 마교에 떠나기 전, 다른 사람에겐 연락하지 않았지만, 유미령에게는 연락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볼일이 잘 끝난 듯합니다. 지금쯤 빠르게 돌아오고 계실 겁니다.”
“다행이네요. 잘될 것이라 여겼어요.”
남하림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강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부장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창천에서 움직인다면 신무맹이 아닌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했었으니까요.”
늘 생각하지만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분의 뜻은 신무맹이 나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상대하는 것이군요. 개방의 형제들을 함께 보내신 것을 보면요.”
“형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무련과 마찬가지로 개방에서 직접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본 궁은 뒤로 빠지는 것이고요.”
“은하궁과 사무련, 그리고 신무맹은 오직 한 번. 그때 힘을 쓰기 위해 아껴놓을 생각입니다.”
남하림의 계획.
그는 창천주와 진검승부를 예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본 궁은 그분의 뜻을 따르지요.”
창천무장군을 개방에서 맡겠다고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던가.
오직 한 사람이 일으킨 변화였다.
단기간에 개방을 완전히 변화시킨 인물이 있었기에, 개방은 창천의 대군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터였다.
“언제 그들과 싸우는 것입니까?”
“오늘 저녁입니다.”
“……!”
유미령이 멈칫거렸다.
저녁이란 말.
야간에 기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설마……?”
“맞습니다. 기습을 할 것입니다. 저들이 예상치 못할 것입니다.”
유미령은 놀랐다.
야간에 기습을 할 것이라고는 백에 하나도 생각지 못했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두 분 다 오늘 도착하셨습니다.”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어둠이 더 짙어지는 시간에 즉시 곧바로 창천을 공격할 것입니다.”
“다급하게 움직이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미 본 개방을 여기로 오면서 준비가 끝난 상태입니다.”
당무독은 즉흥적으로 계획을 세운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개방은 어둠을 뚫고 창천을 상대로 싸울 계획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기습을 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할 것이었다.
개방도는 일황사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다섯 명과 함께한다.
그럼 문제가 없었다.
중원 무림에 어느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개방도의 가슴에 가득했다.
“누나, 우릴 아시잖아요. 믿어주세요. 저들을 단번에 밀어낼 수 있습니다.”
‘궁아도…….’
황보궁도 이들과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 * *
정주의 외곽.
창천무장군의 오천 군사들은 진영을 유지한 채 개인 휴식을 취했다.
“자리에 앉게.”
군장 우초문은 마지막으로 군막에 들어온 허륭에게 명을 내렸다.
열 개의 자리.
무장군 십대주들이 군막에 모였다.
“쉬어야 할 텐데 귀찮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소신들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눈썹이 굵고 짙은 사내.
일대주 동주형의 굵은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우초문은 천천히 오른쪽부터 시선을 돌리며 열 명과 눈빛을 마주쳤다.
창천무장군을 이끌어가는 그들.
“드디어 은하궁에 도착을 했다.”
“…….”
십대주들은 이번 계획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군장 우초문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창천주의 명령.
전면전이 아닌 치고 빠지면서 적을 상대하도록 했다.
창천무장군의 오천 군사.
이들은 제대로 공격을 한다면 은하궁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오천으로는 무리였다.
“불만스러운 것을 안다. 하나 창천주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우린 그분의 뜻을 따를 뿐.”
“알겠습니다.”
동주형은 대답을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동 대주, 이미 명을 받았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다. 우린 은하궁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이각이 되면 뒤로 빠진다. 순서대로 움직일 뿐이다. 모두 들었나?”
“존명.”
척.
십대주들이 포권을 하였다.
그렇게 공격 순위를 정하고 있을 때였다.
땅! 땅! 땅! 땅!
둥! 둥! 둥! 둥!
군막 밖으로 깊은 밤을 깨우는 괴음들이 울렸다.
수하들의 고함 소리가 진영 위로 퍼져 나왔다.
“개…… 방이다! 개방이 기습을 했다!”
휘이익!
우초문은 군막 밖으로 빠르게 나왔다.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들.
휙! 휙! 휙!
그리고 붉은 횃불이 하늘을 넘어 군막으로 떨어졌다.
화르르르륵!
순식간에 불이 붙으며 세차게 타올랐다.
“불……! 불이다!!”
“아아아악! 불을 꺼라!”
창천무장군의 오천 군사들은 정신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군막들이 동시에 불에 타고 있었다.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적이 이렇게 접근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대체 경비를 어떻게 봤기에 모를 수가 있단 말이냐?!”
우초문은 어이가 없었다.
창천무장군의 진영은 혼란 그 자체였다.
뿌우우우웅-!!
이번에는 나팔 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렸다.
한 방향이 아니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창천무장군의 군사들은 머리가 깨어질 듯했다.
“거지 놈들이……! 저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라!!”
“네엡!”
팔대주 허륭이 가장 먼저 불에 탄 군막들 사이를 움직이며 나팔 소리를 향해 달려갔다.
‘미친 거지 놈들이 이런 짓을!!’
노기가 찬 표정으로 달려가던 도중.
챠르르르르-
전방에서 독기를 내뿜는 향미사(響尾蛇)의 소리가 낮게 울렸다.
피이잇!
눈앞을 지나가는 날카로운 기.
허륭이 몸을 멈칫한 순간.
“커억.”
날카로운 날이 지나갔다.
왼쪽 가슴 아래에서 어깨 위로 길게 뻗은 혈선이 생겨났고.
털썩.
허륭은 억지로 근육을 움직이며 참아내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단번에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으면서 쓰러졌다.
슥슥슥.
바닥을 스치듯 다가오는 인영.
두려움이 밀려 왔다.
“누…… 구냐?”
“당신들은 건드리면 안 될 곳을 건드렸소. 우리 부장이 얼마나 그분을 좋아하시는데…….”
“……!”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보일 정도로 장신의 사내.
깨끗한 걸복을 두른 그의 발에는 철비늘로 만들어진 각반이 보였다.
“각제…… 성철각.”
“바로 알아보는군. 끝내죠.”
피이이잇!
성철각의 발이 움직였다.
‘이…… 런…… 망…… 하아아알…….’
허망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허륭이 목숨을 잃었다.
‘허 대주가……!’
우초문은 어둠 속에서 허륭의 기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대체 어떤 녀석이지?’
허륭이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만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자.
‘개방에 이런 고수가? 설마 그들인가?’
일황사제.
우초문의 궁금증은 얼마 가지 않았다.
수하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아아아악!! 독이다…… 독제가 나타났다. 피독제를……!”
‘독제!’
일황사제가 맞았다.
허륭이 누구에게 당했는지 모르지만 일황사제 중 한 명이라 확신했다.
틀림없이 개방이 분명했다.
수하들의 괴로운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독제의 독이라면…….’
상당히 까다로웠다.
독제가 만들어낸 독은 강했다.
창천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독을 연구했다.
하나 상대가 보이지 않기에 어디서 독을 뿌리는지 찾을 수 없었다.
뿌우우우우웅-!
여전히 나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싸울 수 없었다.
개방의 기습에 완전히 당했다.
우선 물러난 뒤 재정비를 위해 정렬을 다시 해야 했다.
그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모두 물러나라!!”
하지만 후퇴를 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싸늘한 기가 등 뒤에서 밀려왔다.
‘뭐지?’
우초문은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빠르게 돌아섰다.
공중에 떠 있는 사내의 발.
환보걸선각의 반형무각(反形舞脚)이 머리 위에서 내리찍고 있었다.
콰아아앙!!
두 팔을 올려 막았지만, 성철각은 멈추지 않고 연이어 환영출각을 펼쳤다.
휘릭!
어둠 속에서도 철각반에서 반사되는 서른여섯 개의 빛이 쏟아졌다.
퍽퍽퍽퍽퍽퍽!
각법의 위력.
중원 무림인들은 각제의 각법을 도제의 도법보다 한 수 아래로 봤지만 실제 무공의 강함은 성철각이 우위였다.
우초문은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 반격을 할 틈이 없었다.
성철각의 공격이 언제 끝이 날지 기다릴 뿐.
콰아아앙!
성철각의 마지막 일격을 받아냈다.
“당신 제법이군. 팔 성의 초식을 막아내는구나.”
“……!”
우초문은 미칠 것 같았다.
방금 전 공격이 팔성의 내력으로 펼친 무공이라니.
만일 극성의 내력을 펼친다면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안이 되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로 하겠소이다.”
“아…… 잠…… 깐만.”
우초문은 다급하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수백 년을 살아온 그였지만 살고 싶은 욕망이 여전했다.
“왜 그러죠?”
“그게…… 음…….”
성철각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으면 끝을 냅시다.”
“각제…… 우릴 죽이면…… 창천주께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창천에서 오지 않았었나?”
“…….”
“우린 창천과 싸우고 있는 것이외다. 무엇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살고 싶다면 그냥 말을 하시오.”
우초문은 그의 말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한마디.
#NAME?
대혼술법을 펼칠 수 있게 되면서부터 그는 죽음을 초월했다고 믿었다.
한데, 그 순간부터 그는 오히려 죽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난…… 살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그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짧은 순간.
찰나의 그 순간.
성철각의 눈빛과 표정을 보면서 깨달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
‘영원함을 가지는 순간, 난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
“……큭, 크큭, 크하하하하!”
우초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전신의 내력이 솟구쳤다.
이 기분을 그대로 무공으로 펼치고 싶었다.
“각제, 이번에 제대로 해보지요.”
죽음을 각오하며 상대하기 위해 전 내력을 끌어 올렸다.
‘아아.’
그동안 가져보지 못했던 느낌.
언젠가 딱 한 번 느꼈던,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것이었어.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대혼술법을 익히기 전, 무공을 처음 익혔던 그때.
“이것을 죽기 전에 알게 되어서 다행이군.”
척.
우초문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각제, 고맙소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표정이군요.”
성철각은 내력을 끌어 올렸다.
* * *
야밤의 기습 작전.
창천무장군의 대패였다.
성철각과 수십 초를 겨룬 우초문은 승패가 쉽게 나지 않았다.
하나, 계속 이어지는 수하들의 죽음을 보면서 결심했다.
그는 물러났다.
창천주에게 패배는 죽음.
그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르나 수하들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었다.
우초문은 언제 어디서 죽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대혼술법에 의해 죽음을 초월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죽음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졌다.
창천무장군 오천의 수하들은 물러났지만, 살아남은 인원은 거의 이천도 되지 않았다.
삼대주 태경초가 다가왔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당당하게 정주로 왔던 그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장님, 이대로 돌아간다면…….”
창천으로 돌아간 뒤 우초문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알았다.
“상관없다.”
“군장님. 죽을지도……!”
“태경초. 오랜 시간을 살았다.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할까?”
“…….”
태경초는 그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가자. 죽을 놈이 죽는 것뿐이다. 여기서 개죽음을 할 필요는 없다. 네놈들은 살아서 멋지게 죽어야지 않겠나.”
뚝뚝.
태경초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를 주군으로 모신 뒤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