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역모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걸황 남하림과 자신의 처지는 달랐다.
‘그대는 거부할 수 있지만 난…… 거부할 수 없으니까.’
용문자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한 무공을 익힌들 의미가 없었다.
그는 창천주의 제자가 아닌 인형일 뿐.
창천주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도망을 가고자 해도 금제가 걸려 있었다.
그에게 반항하면 머리가 터져 죽을 운명이었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운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운명이 있다고 해도 그게 잘못된 길이라면 무조건 따르지 않아.”
“그건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슈우우욱-
용문자는 내력을 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는 것뿐.”
그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
창천주가 대혼술법을 펼칠 상대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거 분위기를 보니 결국 나를 죽이겠다는 뜻이군.”
“당연히…… 그대를 죽이고 나도 죽는 것이지.”
남하림은 코를 실룩거렸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그대로였다.
“여기 오면서 생각을 많이 했군.”
“놀리는 것인가?”
“알아서 판단하게. 난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건 아니니깐.”
“…….”
찌이이이이잉-
용문자의 오른손에 기형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걸황, 최선을 다해 싸워주기 바란다. 죽고 싶지 않다면 나를 이겨야 하니까.”
스윽.
남하림은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휙휙휙.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바람 소리가 찰졌다.
“이게 뭔지 아는가?”
“……?”
“세상에 오직 자신만이 제일 불쌍하다고 여기는 녀석을 패는 정신봉이라고 할 수 있지. 말 안 듣는 놈들은 이게 약이더라고.”
용문자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오만하군.”
“오만은 무슨. 난 그럴 자격은 있다고 보는데.”
휘이익!
용문자의 오른 어깨가 움직이는 동시에 기형검이 남하림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위력은 강했다.
남하림도 움직임과 동시에 손에 든 타구봉이 휘둘러졌다.
티이잉!
가슴 앞에서 밀어낸 타구봉의 끝에서 기형검과 일직선으로 마주쳤다.
“정확한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슴을 찌르는군. 수련을 많이 했어.”
“여전히 내가 우스운 모양이지?”
“칭찬을 해도 반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어릴 때부터 성격이 많이 비뚤어졌나 봐. 그건 앞으로 살아가는데 좋지 않아.”
“이 자식이……!”
차아아앗!
용문자는 기형검에 힘을 주며 타구봉을 밀쳤다.
“흡.”
남하림도 내력을 타구봉에 실었다.
팽팽한 힘의 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힘으로 밀어내면서 시선을 마주쳤다.
남하림보다 용문자가 더 놀란 눈동자였다.
‘십문에 필적하거나 넘어섰다.’
용문자는 남하림의 내력 하나만으로 상대의 무공 수준을 파악했다.
최선을 다한 그와 달리 남하림은 여유가 있었다.
걸황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상대가 방심을 하지 않는 이상 진다는 것을, 한 번의 부딪침에 알았다.
걸황을 이기지 못하리라.
창천주의 명을 받아 걸황을 죽이기 위해 왔다.
하지만 걸황을 보는 순간, 창천주가 그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았다.
‘그는 나를 죽이고자 여기에 보냈어.’
용문자에게 창천주는 사부였다.
하나 용문자는 그를 사부처럼 대할 뿐, 진심은 아니었다.
창천주에게 자신은 도구일 뿐이니까.
그래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를 따르는 척하면서 최소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사이에 머릿속에 심어둔 금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창천주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 내가 거짓말을 한 사실을 눈치챈 거야.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이곳에 보낸 것이다.’
빠아악!
순식간이었다.
걸황의 타구봉이 용문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어어억.”
용문자는 타구봉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퍽!
이번에는 뒷목을 내리치는 충격.
‘커억.’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용문자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멍청한 녀석이 창천에 있었군. 애도 아니고…… 싸우는 도중에 뭘 생각하는 거야?”
핏! 핏! 핏!
남하림은 쓰러진 그의 혈을 눌렀다.
신무맹에 데리고 가서 창천에 대해 심문할 생각이었다.
‘흐음…… 이놈을 어떻게 끌고 가지?’
뚜욱.
주위를 둘러본 남하림은 나뭇가지를 꺾어 도구를 만들었다.
그 위에 기절한 용문자를 대충 던져 놓고 떨어지지 않도록 묶었다.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
강한 냉기가 멀리서부터 밀려왔다.
“이건…….”
익숙한 기운이 틀림없었다.
찌지지직.
멀리서부터 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눈앞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폭풍설.
‘엄청나군.’
슈우우욱!
남하림은 양손을 내력을 끌어올린 뒤 폭풍설을 향해 뻗었다.
화르르르-
강한 열기를 내뿜으며 냉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서로 극성의 두 기운이 부딪히면서 사방이 진동했다.
그동안 내력은 밀려본 적이 없었던 남하림이었다.
‘거참…… 어이가 없을 정도군.’
폭풍설을 쏟아내는 상대.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우우우웅-
오히려 상대의 기가 점점 더 강해지며 밀고 들어왔다.
‘여기서 더 밀리면 당한다.’
슈우우욱!
전신에서 무단의 내력을 끌어모으며 상대의 냉기를 밀어냈다.
‘보통 여자가 아니군.’
폭풍설의 중심을 향해 기가 쏟아져 나갔다.
퍼어어엉!!
남하림의 코앞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공중으로 폭풍설이 퍼져 나갔다.
마치 하늘에서 새하얀 꽃이 떨어지는 듯했다.
“…….”
남하림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용문자가 보이지 않았다.
‘……빠르군. 언제 이 녀석을 데리고 갔지?’
휘릭!
사방이 잔잔해지며 여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섰다.
호북제일루에서 잠시 만났던 제령운화였다.
“호호, 오랜만이네요.”
“여기는 무슨 일로 왔소이까?”
“지나가다가 좋은 구경거리가 있더군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구경을 하고 있었지요.”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이죠?”
“글쎄요. 그건 본 천에서 알아서 처리할 문제이니 걸황은 신경 안 써도 되겠어요.”
제령운화는 창천주의 명에 의해 처음부터 용문자를 따라나섰다.
창천주는 그를 죽이기로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용문자의 몸이 아까웠다.
공을 들여 만든 신체였다.
만일 용문자가 사라진 마당에 남하림에게도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일 수 있었다.
예비로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창천주는 용문자가 떠난 직후 제령운화에게 명을 내렸다.
걸황과 싸워 실패했을 시 용문자의 몸을 찾아오라는 명이었다.
“오늘은 그만 가볼까 해요.”
“맘대로 하시오.”
“다음에 또 보죠.”
“안 봤으면 하는데.”
“호호호, 그건 그대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거든요.”
샤르르르-
백의 치맛자락이 하늘거리며 사라졌다.
“하, 하하.”
남하림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창천주가 자신의 몸을 훔쳐갈 거라고?
어이가 없었다.
‘뭐,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군.’
* * *
“욱.”
설백진의 온몸에 깊숙이 박혀 있는 시침들.
‘거지 놈에게 당했어.’
걸황의 무단기는 무력기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상대방의 내력을 없애는 무력기와 달리, 무단기는 단전에서 내력이 나오지 못하게 막아냈다.
무단에 의해 내력의 순환이 어려워졌다.
내력의 운용으로 외부에서 풀어내야 했지만, 혈사천에서 그보다 강한 내력을 지닌 인물은 없었다.
스스로 풀기 위해서는 생고생을 해야 했다.
두둑!
시침을 통해 내력을 증폭시킨 뒤, 단전을 막아선 무단기의 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입안에서 신음이 맴돌기 시작했다.
단전 부위에 꽂혀 있던 시침들이 부르르 떨리면서 점점 몸 밖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좀…… 더…….’
설백진은 온몸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쑤우우욱-
천천히 시침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네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내력을 단숨에 밀어 넣자 몸에 박혔던 시침들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파파파파파파파팟!
사방 벽에 꽂힌 시침들.
설백진의 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허억. 헉헉.”
거친 숨소리가 설백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곧바로 내력을 살폈다.
‘……성공했군.’
단전을 막았던 무단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삼 일 만에 성공했다.
내력을 찾기 위한 그동안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이는 몰랐다.
그의 눈은 살기로 가득했다.
당장 남하림을 찾아가서 목을 따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털썩.
설백진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휴우…… 가고 싶어도 움직일 힘도 없군.”
그는 반각 동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몸이 다시 가벼워졌다.
드르륵-
연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순간.
‘흐음…….’
처음 보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개인 연무실에는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밖에는 광문사군이 지키고 있을 텐데.
“호호호, 애송이에게 당했다고 하더군요.”
“운화, 놀리려고 왔는가?”
“제가 광문자님을 놀릴 수 있겠어요?”
그녀는 손에 의복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옷을 입혀주었다.
“이번에 또 바꾼 모양이군.”
“예쁘지 않나요?”
“그렇군.”
휘익.
설백진은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끌어당겼다.
“상대가 비무림인이라 해도 너무 대혼술법을 자주 펼치면 곤란해.”
“걱정 마세요. 개벽단의 제조법을 알아냈어요.”
“역시 운화의 능력은 뛰어나군.”
설백진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닿은 뒤 떨어졌다.
“천주가 주던 개벽단과 성분이 같던가?”
“거의 비슷해요. 더 이상 개벽단에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좋아요.”
“후후후, 천주는 그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우릴 마음대로 억누를 수 있었지.”
“맞아요. 하지만 이젠 우리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그를 상대할 수 있죠.”
제령운화의 뜻은 분명 배신이었다.
그녀와 설백진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계획이 있었다.
창천주에게서 벗어난 뒤 자유롭게 무림을 거니는 것.
“운화, 오늘은 무슨 일로 왔지?”
“용문자를 데리고 왔어요.”
“그 녀석을…….”
설백진도 그에 대해서 잘 알았다.
창천주의 새로운 몸이 될 인물.
“어디에 있지?”
“광문자님의 방에 잘 던져놓았지요.”
“가자.”
설백진은 제령운화와 함께 연무장을 나섰다.
* * *
덜컹!
설백진이 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
용문자가 틀림없었다.
스윽.
용문자는 들어서는 설백진과 제령운화를 보았다.
“하하하, 오랜만이군.”
“광문자님을 뵙습니다.”
“많이 자랐군.”
“…….”
용문자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설백진은 그를 유심히 보았다.
‘창천주가 원할 정도로 좋은 몸이군.’
그가 자리에 앉았다.
“자네도 앉게나.”
“네. 고맙습니다.”
용문자에 이어 제령운화도 옆에 앉았다.
“듣기로는 신무맹에 가서 걸황을 만났다고 하더군.”
“맞습니다.”
“그를 봤으니 한 가지만 물어보지. 걸황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나?”
“대단한 인물이더군요. 그를 만날 때까지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니군.”
설백진의 입가에 미소가 나왔다.
“네. 그를 이길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강하지.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한 인물이 되었어.”
“그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크크크, 아픈 기억을 들추지는 말게.”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여하튼 그놈은 엄청난 인물이 되긴 했어.”
“…….”
용문자는 두 사람을 보았다.
걸황의 손에서 그를 구한 제령운화가 곧바로 창천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창천으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용문자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이 혈사천이었다.
“두 분께서 저를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네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끄덕.
설백진은 팔짱을 낀 채로 용문자를 주시했다.
“창천주를 위해서 죽고 싶은가?”
“……?”
설백진이 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겨우 누군가의 몸이 되는 것에 화가 나지 않는 모양이군.”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용문자는 돌려서 대답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용문자는 설백진과 제령운화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창천주에게 반감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었다.
“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없지.”
“…….”
“창천주의 죽음.”
쿠우웅!
거대한 충격.
혹시나 했던 생각이 맞았다.
용문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