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53화 (254/328)

253. 호양평

남하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스윽.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서 사람들 뒤로 자연스레 몸을 숨겼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뻔했다.

‘괜히 지금 만날 필요 없지.’

이윽고, 신명항과 신두명이 군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신려세가의 인물이 빈 공터를 가리켰다.

“자네들은 저기에서 군막을 치면 된다.”

“알겠습니다.”

남하림과 팽유도, 성철각 또한 함께 온 무리들과 움직였다.

오백여 명의 무리들은 익숙한 듯 금방 군막을 만들었다.

함께 군막에서 지낼 사내가 멀뚱히 서 있는 세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이, 자네들은 보급소에 가서 우리들이 누울 수 있는 자리들을 가지고 오게.”

“아, 알겠습니다.”

남하림과 성철각, 팽유도는 밖으로 나와 사내가 말한 보급소를 찾아갔다.

신려세가의 무인들과 주천의 무인들의 군막은 가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

[하림 형, 이 정도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곳 모두 강해 보이는군.]

얼마 가지 않아 보급소 천막이 보였다.

천막 앞에 탁자에 앉은 중년 사내가 먼저 물었다.

“몇 명이지?”

“우린 세 명인데요?”

“…….”

중년 사내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남하림을 보았다.

“멍청한 놈들. 네놈들 군막에 몇 명이 자느냐고 물었다.”

“흐음…… 스무 명 정도입니다.”

“그래? 저기 알아서 가지고 가.”

휙!

사내가 천막 안에 쌓여 있는 이부자리들을 가리켰다.

“그냥 아무거나 가지고 가면 됩니까?”

“그래. 마음대로 가지고 가도 돼. 어차피 남는데.”

천막 안에는 물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왜 이리 많습니까? 이 정도의 양이면…… 다른 곳에서 올 예정인데 아직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나도 몰라. 사사방과 살천성에서 온다고 해서 억지로 구해 오느라 돈을 많이 썼는데…… 어휴.”

‘사사방과 살천성이라…….’

슥 주위를 둘러본 남하림이 이부자리를 가득 들었다.

“많이 남는다고 하는데 많이 들고 가자.”

“그래요!”

팽유도와 성철각도 얼굴까지 가리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이불들을 잔뜩 들어 올렸다.

“허어, 이봐. 가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무식하게 한 번에 가지고 가지 말고 다시 오면 되잖아.”

“귀찮아서요. 그럼!”

남하림이 보급소를 나가려고 할 때였다.

보급소 안으로 들어오는 중년 사내.

신려세가의 총내국장 신항소였다.

“어허…… 이 사람들이…….”

그는 부딪히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옆으로 피했다.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나가는 사내들을 보며 신항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 녀석들은 뭐냐?”

“아…… 네. 총내국장님. 방금 전에 도착한 무리들입니다.”

“휴우, 오라는 곳은 안 오고…… 도움도 되지 않는 녀석들만 오는군.”

신항소는 천막 안에 있던 물건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전부 돈이었다.

밖으로 나간 남하림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신항소와 안면이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벌써 들킬 뻔했다.

툭.

군막에 돌아온 세 명은 가지고 온 이부자리를 내려놓았다.

“자네들 수고했네. 이 정도면 충분히 덮고 잘 수 있겠어.”

* * *

호양평의 밤이 깊었다.

군막에서 잠을 청하는 세 사람.

푹신.

남하림의 이불은 다른 인물들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두껍게 깔려 있었다.

그때.

번쩍.

남하림은 눈을 떴다.

군막 밖에서 미세한 기가 느껴졌다.

‘어라.’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남하림이 움직여도 군막 안에서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군막 사이를 지나가는 인물.

경계를 도는 신려세가의 보초 위사들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만 지나가면…….’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움직이는 순간,

스윽.

어둠 속에서 하얀 발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젊은 사내.

‘빠르게 죽이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허리에 찬 검을 잡았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쉬이이익!

사내는 검을 빠르게 찔렀다.

일 장도 안 되는 두 사람의 거리.

“쯧. 말을 안 들으면 죽어야지.”

피할 수 없을 거라 자신했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핏!

남하림의 손가락 끝에서 강기가 뻗었고.

쿠욱.

사내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털썩.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싸늘한 죽음을 맞이한 사내.

남하림은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죽은 사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신려세가의 상황을 혈사천에게 알리려는 간자였으니까.

스르륵-

남하림의 신형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 * *

다음 날 새벽.

군막 밖이 시끄러웠다.

“아이…… 무슨 소리야!”

벌떡!

군막에서 잠을 자던 무인들 대부분이 일어났다.

팽유도도 소란스러움이 귀찮은지 부스스 일어났다.

옆에는 여전히 잠자리에 누워 있는 남하림이 있었다.

“형, 그대로 뒀어요?”

“어…….”

“왜요?”

“귀찮아서…… 어차피 그들이 알아야 하고…….”

“흐응.”

털썩!

반쯤 눈을 감고 있던 팽유도도 다시 자리에 누웠다.

소란스러운 소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용해졌다.

* * *

혈사천의 멸신군이 의창에 들어섰다.

멸신군장 육지웅은 신려세가의 무인들이 호양평에 주둔한 사실을 보고받은 뒤, 비웃음을 뱉었다.

‘하! 멍청한 놈. 무림의 싸움은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거늘.’

그는 멸신군을 이끌고 곧장 호양평으로 향했다.

설백진은 육지웅을 자신의 사람으로 확신했다.

그는 유천의 인물이 아니라, 무림인 출신으로 혈사천에 들어온 무인이었다.

설백진에게 굴복은 했지만, 유천의 무인들은 여전히 그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

하지만 육지웅에게 설백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혈사천에 들어왔을 뿐.

혈사천이 멸하지 않고 존재하면 그만이었다.

육지웅은 현재의 설백진에게 무공을 전수받았고.

자신과 처지가 같은 혈사천의 전 무인들을 멸신군의 아래로 합류시켰다.

설백진이 원하는 대로 신려세가를 친다면, 사파 연합은 단숨에 무너질 것이 확실했다.

그들의 끈은 단단하지 않았다.

신려세가가 사라진다면 그들의 연합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터.

수장이 원하면 따르면 될 뿐이었다.

* * *

호양평에 들어선 지 한 시진이 지났다.

둥! 둥! 둥! 둥!

호양평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진영이 나뉘었다.

두 진영에서 내뿜는 살기가 호양평을 가득 채웠다.

평소와 달리, 호양평에서는 그 어떠한 동물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명항은 진영의 중앙에 섰다.

그와 달리 기성은 신려세가의 무인들 뒤쪽에서, 주천의 무인들과 함께 물러나 있었다.

아직 혈사천에게 주천의 존재를 알릴 시간은 아니었다.

두두두두-

혈사천의 진영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중년 사내가 중앙으로 나오왔다.

그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본인은 멸진삼군을 맡은 복양흥이다! 큰 대결을 앞전에 두고 한 번 놀아볼까 한다. 신려세가에서는 어느 고인이 본인과 검을 겨룰 수 있겠는가?”

“북양흥이 나왔군.”

혈사천에서도 잘 나서지 않는 인물로, 그의 정확한 무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신명항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상대할 인물.

이미 대하벽이 앞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소신이 저자의 목을 자르고 오겠습니다.”

“조심하게. 그는 강한 인물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지옥검향 대하벽은 말 위에 올라탄 뒤 호양평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훗…….’

이미 중앙에 대기하던 북양흥은 달려오는 상대방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신려세가 정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

타아앗!

북양흥은 말 위에서 신형을 띄웠다.

슝슝슝슝.

공중으로 날아오른 그는 달려오는 대하벽을 향해 아래로 권강을 쏟아냈다.

“예의가 없군.”

채애애앵!

대하벽의 허리에서 빠져나온 지옥검에서 검막이 펼쳐지며 상대의 권강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북양흥은 거친 폭발음을 들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죽음의 검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대가 지옥검향 대하벽이군.”

“보는 눈은 있군.”

파아앗!

대하벽은 그대로 몸을 띄우며 뒤로 물러났던 북양흥을 향해 지옥검을 내리쳤다.

제압할 수 있다.

한 번의 초식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아수라팔황검식.

핏핏핏핏핏!

지옥검에서 여덟 개로 퍼져 나깐 죽음의 검기가 북양흥을 전신을 훑어 지나갔다.

‘이겼다.’

대하벽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완벽하게 그의 전신을 베었다고 확신했다.

“크크크.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

북양흥은 구부렸던 몸을 일으켰다.

“……!”

대하벽의 인상이 구겨졌다.

십 성의 내력을 다해 펼친 무공이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우우우웅-

북양흥의 일권에 붉은빛이 점점 진하게 피어올랐다.

‘홍천멸권?’

대하벽은 그의 무공을 알아보았다.

파아앗!

산파홍광(散破紅光)의 초식.

두두두두두-

제자리에서 뻗어낸 일권이 마치 땅이 흔들거리는 듯한 굉음을 뿜어냈다.

콰아아앙!!

쾅!

‘우욱.’

붉은빛이 닿은 부분이 하나도 남김없이 깨지고 부서지며, 대하벽을 향해 쏟아졌다.

우우우웅-

대하벽의 눈동자가 커졌다.

막아내기 위해서는 최후의 검식을 펼칠 수밖에.

부르르르-

지옥검이 떨리면서 다가오는 붉은빛을 향해 내리쳐졌다.

파아아아앗!

지옥검의 검신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서진 검 조각과 홍광이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슈우우우우우-

그리고,

“커어억!”

대하벽은 거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울컥.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졌다.

‘내상을 당했어.’

빨리 운기를 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

“……졌소이다.”

검이 없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대하벽은 패배를 인정했다.

“그래서 살려달라는 말인가? 자존심이 없군. 싸움에 지면 당연히 죽어야지.”

생사결의 대결이지만, 상대가 패배를 인정한다면 물러나는 게 무림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무림의 예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대…… 하벽……!”

신명항은 그가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미 달려 나가기엔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홍천멸권은 백 년 전에 실전(失傳)된 무공.

사파의 전설이라 일컫는 사황의 무공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신명항 또한 그와 싸워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신려세가 뒤에서 생사결을 보던 기성도 혀를 찼다.

지옥검향 대하벽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이제 도울 수 없었다.

호양평으로 달려 나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역시…… 혈사천은 강하다.’

유천의 전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해도 남아 있는 혈사천의 무인들 또한 약하지 않았다.

일대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존재들이 분명했다.

‘밀어붙여야 한다. 단숨에…… 밀지 않으면 질 것이야.’

기성이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휘익!

바람 소리가 이보다 빠르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신려세가의 무인들 사이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신형.

바람이 단숨에 호양평을 향해 불어갔다.

‘……허억!’

북양흥은 이상한 느낌에 앞을 보았다.

마치 공간을 뚸어넘어 나타난 것처럼 대하벽의 뒤에 선 청년.

상대의 신법을 본 북양흥이 무공을 멈춘 채 흠칫거렸다.

몸이 곧바로 반응했다.

싸우면 안 된다.

북양흥은 몸이 반응하는 대로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대하벽은 그가 왜 뒤로 물러나는지 몰랐다.

‘무슨 일이지?’

뒤를 돌아보자,

“……걸…… 황…….”

눈에 익은 얼굴.

걸복이 아닌 평범한 경장 차림이지만, 분명 남하림이 맞았다.

“안녕하시오.”

남하림은 처음에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대하벽이 비무에서 패배한 후, 물러날 것이라 여겼던 상대가 예상과는 달리 살수를 펼치고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걸황이……!”

신명항은 호양평에 나타난 남하림을 보며 크게 놀랐다.

‘그랬군.’

어제 받았던 이상한 느낌은 걸황이었던 것이다.

“저어…… 형님, 저기…… 저분이 정말 걸황이 맞습니까?”

“맞네. 자네들과 함께 온 모양이군.”

“아…… 모, 몰랐습니다. 일반 복장을 해서…….”

“나에게도 알리지 않고 온 것이다. 당연히 자네는 몰랐겠지.”

신명항은 남하림이 몰래 온 이유를 알 듯했다.

‘소소가 부탁을 했군.’

걸황이 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오지 않았다면 대하벽의 목숨이 끊어졌을 터.

기성은 어느덧 신명항의 곁으로 다가섰다.

대승의 기운은 바로 걸황이었다.

“걸황이 올 줄은 몰랐네.”

“저 또한 전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하들은 옆으로 말을 옮겼다.

순간 신려세가의 진영 전체가 웅성거렸다.

걸황이 오셨다.

두 사람의 시선이 호양평을 향해 집중됐다.

북양흥 또한 앞에 나타난 청년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대가 걸황이오?”

“맞소이다. 본인이외다.”

“…….”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었다.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 같은데 여기에서 끝을 내는 게 좋지 않겠소?”

“알…… 겠소이다.”

남하림의 신형에서 흐르는 기를 읽었다.

‘내가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천주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걸황이 나타나다니…….’

멸신군장 육지웅은 돌아오는 북양흥을 보며 표정이 굳어졌다.

혈사천주와 비교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닌 인물.

이곳에서 누가 걸황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는 결정을 빠르게 내려야 했다.

단 한 명의 존재만으로도, 육지웅은 패배를 생각해야 했다.

잠시 머뭇거린 그 찰나의 시간이, 혈사천 멸신군의 운명을 좌우할 시간임을.

이때의 그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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