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신려세가에 가다
남하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항상 좋지 않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크하하하!”
“형님, 한잔하시지요.”
“고맙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재미도 있구만.”
한때 무림공적까지 올라갔던 탈혼마제가 차를 받았다.
그의 잔에 차를 따르는 항걸 장두철.
협의에 살고 협의에 죽는다는 개방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그가 탈혼마제와 정겹게 차를 즐기고 있다.
“제자야, 나이 들어 이것저것 따지면 꼰대 소리 듣는다.”
세상은 두리둥실 사는 게 좋다고 했다.
‘좋긴 하지만…….’
만통자와 탈혼마제만 있을 때와 달리, 장두철까지 가세하자 남하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들과 신려세가에 함께 간다면 하루도 되지 않아 중원에 소문이 날 게 틀림없다.
‘그냥 조용히 다녀와야겠다.’
* * *
스르르르-
맹주전 아래로 비밀 통로가 열렸다.
사대장인 전전은 양삼이 원하는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맹주전에서 곧바로 신무맹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둔 것.
비밀 통로의 마지막 부분은 전전 홀로 완성시켰다.
비밀 통로는 전전 외에는 오직 남하림과 양삼밖에 알지 못했다.
“오우, 이곳에 이런 통로가 있었네요.”
처음에는 조용히 나갈 거라는 남하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팽유도와 성철각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반적인 경장 차림의 무복을 입은 세 사람.
비밀리에 신려세가에 가기 위해 변복을 한 상태였다.
팽유도는 몸에 걸친 청의무복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렇게 입는 게 더 이상해요.”
“나도 이상해.”
성철각도 어색한 듯 갈의무복을 살폈다.
“왜. 잘 어울리는데.”
“부장만큼 할까.”
세 사람 중 가장 옷이 잘 맞는 사람은 남하림이었다.
비밀 통로를 따라 끝에 도착했다.
스윽.
통로의 벽을 만지자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양삼이 말했던 게 이것이군.’
남하림은 통로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구우우우웅-
한쪽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하림에 이어 성철각과 팽유도가 밖으로 나왔다.
“와아…….”
비밀 통로는 신무맹의 뒤편 작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언덕 중간으로 나온 남하림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여기 길이 있군.”
언덕 옆으로 반 장 정도의 길이 보였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신무맹에서 볼 수 없었다.
“가자.”
남하림은 앞장서서 아래로 움직였다.
바닥 높이가 삼 장 정도 남아 있는 곳까지 내려오자,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부터서는 길이 없구나.”
휘익!
남하림이 먼저 신법을 펼치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 뒤를 이어 성철각과 팽유도가 뛰어내렸다.
‘완벽하군. 아무도 모르겠어.’
남하림은 만족스러웠다.
바닥 아래에서 방금 내려온 언덕을 올려다보았지만, 신무맹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속도를 내야겠어. 혈사천에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아.”
“알겠어요.”
휘이익!
파아아앗-
세 명의 신위가 언덕 아래에서 사라졌다.
그 시각.
맹주전으로 들어서는 세 명의 노인들.
“……?”
만통자는 정원에 들어서자 평소와 분위기가 다른 것을 느꼈다.
“왜 이리 조용하지?”
평소에도 남하림 혼자 있긴 하지만, 그를 보필하는 하인들과 시녀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탈혼마제는 건물 안에 남하림의 기를 확인했다.
“안에 없는걸? 어디 갔나?”
“허허, 어디 간다고 하면 말을 하고 갔을 텐데…….”
세 노인의 궁금증이 커질 무렵, 밖에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신무맹의 총관 업무를 맡은 양삼이었다.
“양 총관, 맹주는 어디 갔는가?”
“잠시 볼일이 있어 출타 중입니다.”
“그래? 으음…….”
남하림이 하루 종일 맹주전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들어오겠지?”
“아마 며칠 걸릴 것입니다.”
“……?”
만통자는 이마에 주름이 진해졌다.
“허어…… 며칠이라니…… 맹주가 멀리 간 모양이지?”
“네, 그렇습니다.”
“혹시 어딜 갔는지 알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위험한 곳에 간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잠시 볼일이 있어 나간 것뿐입니다.”
만통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천주님께서는 혼자 가셨나?”
“그건 아닙니다. 도제와 각제께서 동행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갔다는 말에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
“이보게, 만통자, 걱정하지 말게. 중원 무림에서 맹주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네.”
“그건 맞지만…….”
“맹주가 얼마나 제 목숨을 아끼는 사람인 줄 아는가? 모험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놈이란 말일세. 걱정은 오히려 그를 상대하는 놈들에게 해야 할 거네.”
“후후후.”
탈혼마제의 말에 만통자는 웃음이 나왔다.
그가 말한 게 맞았다.
다만 여전히 떠오르는 불길한 징조.
혹시나 모를 위험이 있지 않을까 불안했다.
세 명의 노인은 잠시 망설이던 때, 양삼이 맹주전에 찾아온 이유가 떠올리고는.
스윽-
작은 가죽주머니를 하나 꺼내 장두철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맹주님께서 출타하시며 세 분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신무맹에서 지내실 때 필요할 것 같다고 말입니다.”
슬쩍 가죽주머니 안을 본 장두철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흐음. 제자가 그리 말했던가?”
“나중에 더 필요한 게 생기시면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허허헛, 고맙네. 그렇지 않아도 안에서 한잔 마시는 게 부담이 됐거늘. 우리 마음을 잘 아는 놈은 제자밖에 없구만.”
“가끔씩 말씀을 툭툭 던지시지만, 속정이 깊으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지.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이 있어 그런 인물을 제자로 받아들였는지. 하하핫!”
장두철은 항상 남하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손안이 묵직해서 좋았다.
“가시지요. 맹주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한 모양입니다.”
“허허허, 그럴까?”
* * *
신려세가로 향하는 길은 순탄했다.
하지만 호북성으로 들어오자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휘이익!
세 사람의 앞에 개방의 걸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황님, 걸비 모지영입니다.”
그는 곧바로 품 안에서 서신을 꺼냈다.
“고맙소이다.”
남하림은 서신의 내용을 읽었다.
#NAME?
병호촌에서 의창까지는 삼 일이면 충분했다.
‘빨리 움직이는군.’
자신 있게 신려세가를 공격하려는 듯한 움직임.
혈사천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게 틀림없다.
주천과 신려세가에 맡긴 이상, 남하림은 처음부터 나설 생각은 없었다.
“부장, 우린 어떻게 하지?”
“우린 지켜보고 있다가 만약의 사태가 생기면 나서야겠어. 지금은 변수가 따로 보이진 않는 것 같아.”
“알겠어요.”
“지금부터서는 조용히 움직이자.”
세 사람은 의창을 향해 조심스럽게 향했다.
* * *
의창으로 들어서는 두 개의 길 중, 하남에서 이어진 마을을 지날 때였다.
다다다다-
소란스럽게 달려오는 무리들.
최소한 오백 명 정도의 인원이다.
‘무인들 같군.’
팽유도의 눈에 무리들의 선두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비쳤다.
흑색의 사파연합기가 분명했지만 그들의 복장은 가지각색이었다.
기세도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림 형, 사파인들 같은데? 보아하니 오는 길에 하나둘씩 모여서 오는 모양이네.”
“용기는 가상하네. 혈사천과 싸운다고 하면 두려울 텐데.”
“어떻게 할까?”
“옆으로 물러나 있자.”
“알겠어.”
남하림의 말대로 팽유도와 성철각은 길옆으로 물러났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사파 무인들의 무리들.
선두에서 무리들을 이끌고 있는 이는 중년 사내였다.
신두명 또한 길옆으로 물러나는 세 명의 젊은 사내들을 발견했다.
일반인들이 아니라 경장 차림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혈사천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오히려 의창에서 빠져나가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는 젊은 사내 세 명을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편하게 서 있는 모습.
‘어리바리하군.’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소협들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의창으로 갑니다.”
“의창? 자네들은 혹시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
“무슨 소문 말입니까?”
“허어. 이런 덜떨어진 녀석들이 있나? 무림에 나와서 오랫동안 살고 싶으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하거늘.”
“…….”
“난 신려세가의 가주이신 신명항 형님과 친척이 되는 사이다. 그분을 도우기 위해 신려세가로 가는 길에 사파 무림 형제들을 모으고 있지.”
남하림이 무리를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그들의 무위는 일류 중급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 나름대로 각자의 고향에서는 강한 무위를 지니고 있을지 모르나, 혈사천과 싸우기에는 부족한 실력들이었다.
“그렇습니까? 신려세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건 당연한 일이다. 아마 내가 신려세가에 도착하면 가주 형님께서 고맙다고 할 것이다.”
신두명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의창에서 큰 싸움이 일어나면 다칠 수 있다. 이곳에서 멀리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이야.”
“혹시 저희들도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일행에?”
스윽.
신두명은 남하림을 다시 훑어보았다.
“무공이라도 할 줄 아는지 모르겠군.”
“조금 정도는 펼칠 수 있습니다.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보아하니 사파인은 아닌 것 같은데?”
“무림을 위해 싸우는데 정사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신무맹과 사파 연합은 동맹을 맺은 것으로 압니다. 신무맹으로 가는 도중 소식을 듣고 방향을 바꿔 신려세가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음……! 무림혼이 살아 있군.”
신두명은 젊은 사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뒤에 따라와.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신두명은 세 사람을 무리에 받아 주었다.
“고맙습니다.”
남하림과 성철각, 팽유도는 무리들 뒤로 합류했다.
[하림 형, 여기는 왜?]
[같이 섞여 있으면 우리 신분을 안 들키고 신려세가에 들어갈 수 있잖아.]
[아하…… 그렇구나.]
[역시 부장은 머리가 좋다니깐.]
신두명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전원 출발.”
* * *
신려세가에 비상이 걸렸다.
혈사천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면전을 원하는 그들.
이유는 간단했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이유가 없었다.
신명항은 고민에 잠겼다.
혈사천과 마지막으로 싸울 장소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가주, 어떻게 싸울 생각이오?”
“그렇지 않아도 고민 중입니다. 두 군데 좋은 위치가 있습니다. 기 천주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본인도 마찬가지오. 어디가 좋은지 확신이 서지 않소이다.”
협곡과 평원.
적을 몰아넣고 싸우는 협곡이 통상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이쪽의 인원이 혈사천보다 많으니, 평원에서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파 연합에서 소식이 왔소이다. 가장 가까운 곳인 살천성과 사사방이 내일 정오 정도에 도착할 것 같소이다.”
“두 곳에서 합류를 한다면…….”
“호양평에서 싸우는 게 유리하겠군.”
기성과 신명항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럼, 호양평에 진을 치기로 합시다.”
“좋습니다.”
* * *
신명항과 기성의 결정이 정해지자 호양평으로 신려세가의 무인들과 주천의 무인들이 움직였다.
호양평에 진을 친 지 하루.
정오가 지났건만.
사사방과 살천성이 도착을 하지 않았다.
기성은 중앙 군막에 앉아 그들의 소식을 기다렸다.
‘정오가 지난 지 한 시진이 지났거늘…….’
그들에게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시간만 늦을 뿐이었다면 전서가 도착했을 터.
‘만일…… 사전에 그들의 앞을 누가 막았다면…….’
창천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아침에 일어나 평상시 잘 믿지 않는 주역을 펼쳐보았었다.
‘완벽한 대승의 기운이 있다고 했거늘…… 잘못된 것이라니…….’
“휴우…….”
기성은 심호흡을 했다.
그들이 오지 않는 것으로 혈사천에게 진 것은 아니었다.
신려세가와 주천의 힘은 막강했다.
싸우기도 전에 혈사천에게 주눅이 들 필요는 없었다.
‘내가 많이 약해졌군. 주천의 전인인 내가…….’
웅성웅성.
갑자기 군막 밖이 시끄러워졌다.
“그들이 왔는가?”
휘익!
기성은 기대감에 차 바로 군막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저놈들은 누구지?’
그의 눈에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무리들이 보였다.
사파연합기가 펄럭였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만 왔군.’
어쨌든 인원수를 채워주는 것도 도움이 될 터.
기성을 지나친 신명항이 그들 사이로 다가섰다.
무리들을 이끌고 온 신두명은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가주 형님을 뵙습니다. 두명입니다.”
“네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경원에 있어야 할 신두명이었다.
신명항은 신두명에게 물으며 그가 이끌고 온 오백여 명을 바라보았다.
“본 가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허허, 고맙기는 하다만…….”
신두명은 그의 사촌동생으로, 무공이 약해 신명항이 신려세가 관할 지역 중 한 곳인 경원을 맡도록 보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인물들과 달리 사파연합기까지 들고 본 가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
“가주 형님, 제가 무공이 약한 줄은 알지만 한 목숨 바쳐 본 가를 지켜낼 것입니다.”
“좋다. 최선을 다해 싸워라.”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왔으니 이야기나 하자. 들어오너라.”
신명항이 그와 함께 돌아설 때였다.
스윽.
신명항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신두명과 함께 온 무리 중 익숙한 그림자를 찾았다.
‘뭐지? 내가 잘못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