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현천을 받다
만통자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남하림과 만통자는 마주 보며 앉았다.
스윽.
만통자가 신패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현천지패다.”
“나도 글자는 읽을 수 있어요. 여기 현천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
홀아비 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밉상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탈혼마제가 남하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남하림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걸 주면서 현천을 맡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맞다.”
“싫습니다.”
빠직!
만통자의 이마에 힘줄이 빠짝 올랐다.
“이놈이…… 싫긴 뭐가 싫어? 당장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지.”
“안 고마우니깐 도로 가지고 가세요. 양천 하나만으로도 무거워요.”
“이놈아…… 이건 현천이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양천도 마찬가지라고요. 아!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노인장이 가지시면 되잖아요.”
“이 자식아. 내가 가질 수 있었으면 진작 가졌지. 네놈에게 주겠느냐? 망할 놈이 꼭 사람 속을 뒤집어놓고 있어!”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만통자가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양천의 전인과 비슷한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구……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그러다 가는 수 있습니다.”
타악!
만통자는 현천지패를 잡은 뒤 남하림을 향해 던졌다.
휘익!
“에라이, 썩을 놈!”
처억.
남하림은 날아오는 현천지패를 눈앞에서 잡았다.
우우우웅-
손안에 든 현천지패에서 공명음이 들렸다.
“어라…… 이건 무슨 소리죠?”
“알겠느냐? 현천지패가 네놈을 주인으로 인정한 게다. 그건 네가 어떻게 해도 현천의 전인이라는 말이다.”
사실 만통자는 남하림을 만나러 오면서도 반신반의했었다.
‘젠장…… 진짜로 울릴 줄이야. 아……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하냐.’
양천의 전인이 현천의 전인까지 될 줄은 몰랐다.
“정말로 현천이 전인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회주께서 원하셨으니. 운명이라 생각하면 된다.”
“운명이라……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더라도, 지금 당장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현천의 회주를 만난 뒤 결정을 하겠어요.”
‘자식이…… 쉽게 쉽게 하면 얼마나 좋아.’
스윽.
만통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주를 뵌 후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회주께선 이미 결정하셨으니, 현천무조가 현천지패의 전인으로 모시겠소이다.”
남하림에게 부복을 하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거 참…… 적응 안 되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느 할아버지 같았던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운명을 받긴 하겠어요. 내가 현천의 전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운명의 끈이 그대에게 이어졌을 뿐이외다.”
“방금 만통자란 이름 대신에 현천무조라 하셨는데…… 맞나요?”
“맞소이다.”
남하림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만통자를 보았다.
“……그렇군요. 현천…… 무조. 혹시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많지요.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알려줄까 생각 중이었소이다.”
“하아…… 역시 많군요. 음, 현천지패를 물릴 수는 없죠?”
“현천의 전인이 있다면 가능은 하지만, 지금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이외다.”
“죽을 때까지라…… 이거 너무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안 겁니까?”
“현천주에 들어가시면 알 수 있소이다.”
“현천주(玄天宙)?”
“맞소이다.”
“거기가 어딥니까?”
“현천에 있소이다. 황궁수천지(皇宮守天地)가 현천주이기도 하지요.”
“황궁에 가야 한다는 말이네요.”
“네. 맞습니다. 지금도 하후도 대장군과 황궁으로 향하던 길이라고 들었소이다.”
“알고 있었군요.”
“그를 만나기 전에 먼저 현천주에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만통자는 남하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사전에 남하림을 만나 조율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진정한 현천의 전인이 된다면 동창을 상대하기에 편하실 거외다.”
“앞선 전인은 가만히 있었습니까? 황궁수천이라면서 동창이 날뛰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왜 있었죠?”
“제독동창은 창천과 연관된 인물입니다.”
“……허, 오늘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놀랐습니다.”
창천의 인물들이 황궁, 그것도 동창의 수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현천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게 이해가 되었다.
더구나 회주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현천은 더욱더 움직일 수 없었다.
“동창이 창천과 연관이 있다고 하니 관심이 가는군요, 갑시다.”
잠시 뒤.
남하림은 일행과 이야기를 짧게 나눈 뒤 황궁으로 길을 나섰다.
일행은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현천의 전인이라.”
“하림 형은 정말 바쁜 사람이구나. 무림에 이어 황궁까지…….”
“부장은 일복이 많은 팔자라서 그래. 우리도 그런 부장을 만난 탓인지 일복도 터지고 중원을 무지 싸돌아다니잖아.”
“아항, 맞네.”
팽유도는 곧바로 인정했다.
남하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행은 당무독이 맡아야 했다.
“자, 그럼! 우리도 갈 준비를 합시다!”
* * *
황궁으로 가는 사이, 만통자는 현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알려주었다.
남하림은 만통자의 뒤를 따르면서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궁이 아닌데?’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춘 곳은 황궁이 아닌 석벽 앞.
만통자가 석벽에 다가선 뒤 손바닥으로 댔다.
스르르르릉-
석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현천수문입니다. 들어가지요.”
남하림이 만통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벽과 천장이 반짝이는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멋진 곳이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외다.”
길게 이어진 복도는 처음과 같았다.
‘음……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황궁 아래로 연결이 되어 있겠군.’
삼십여 장을 걸은 느낌이 들 때쯤.
또 한 번 문이 나타났다.
“여긴 현천등문이라 합니다.”
만통자가 처음과 같이 손을 내밀자 현천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호…….’
문이 열리자 안에서 넒은 야외 정원이 나타났다.
‘분명 황궁인 것 같은데.’
황궁에서 이 정도의 넓이라면…….
남하림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정원을 둘러싼 외부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셨습니까?”
정원으로 들어서는 십여 명의 인물들.
그들 사이로 안면이 있는 조여하도 함께 있었다.
“모두 인사를 드리게. 이분께서 현천의 전인이 되실 분이시네.”
“회주님을 뵙겠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숙였다.
“반갑소이다. 본의 아니게 현천의 전인이 되었소이다.”
“이들과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시면 될 것이외다.”
“그러죠.”
만통자는 남하림을 데리고 다시 움직였다.
정원을 지나 또 다른 석벽의 문 앞에 도착을 했다.
‘이번에는 현천지문이군.’
스르르륵.
석문이 열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같이 안 갑니까?”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남하림은 혼자 안으로 들어섰다.
십여 장을 걸어가자 전방에 한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현천 수호단의 단장 홍인이라 합니다. 현천의 전인을 뵙습니다.”
“홍인 단장님. 반갑습니다.”
“여기부터서는 소신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홍인은 남하림을 안내하며 침실로 향해 걸었다.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옆으로 물러났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스으윽-
남하림은 안으로 들어섰다.
‘음.’
침상에 힘없이 앉아 있는 노인.
“어서 오시게나.”
“처음 뵙겠습니다. 남하림이라 합니다.”
“무림의 대영웅. 그대를 직접 보게 되니 기분이 좋구려. 가까이 오게.”
남하림은 침상 곁에 다가섰다.
“노부가 현천의 전인이라네.”
노인이 남하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윽.
손을 잡은 두 사람.
“좋은 기운이네. 이것이 양천의 무단인가 보구려.”
노인은 단번에 남하림이 마음에 들었다.
맑은 기운이 남하림에게 가득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아픈 곳은 없네. 천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남하림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노부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 표정이네.”
“저를 전인으로 고른 이유가 있습니까?”
“그대는 현천지성의 운명을 타고났네.”
“그 말은 처음 듣습니다. 저는 양천의 전인이고, 천괴성이라 알고 있습니다.”
“맞네. 그댄 양천의 천괴성인 운명이네. 하지만 동시에 현천지성, 태을성의 운명도 지녔지.”
“제가 태을성을…….”
“그렇다네. 수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진정한 현천의 전인이 바로 그대이네.”
노인은 아직 믿기지 않는 것 같은 남하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믿기지 않겠지. 태을성의 운명이며 현천의 전인이라고 하니.
그대가 진정한 현천의 전인인지 아닌지는 현천주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일세. 이십 년 전 현천지성인 태을성이 나타났음을 안 뒤, 현천에선 전 중원을 돌아다니며 그대를 찾았지. 그리고 만통자에 의해 그대가 현천지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가 있음을 알아냈다네.”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에게 접근한 것이로군요. 하지만 전 이미 양천의 전인이 되었습니다.”
“상관없네. 오히려 더 좋지 않겠나.”
“……현천은 무엇을 합니까?”
“황궁을 다스리지. 황제를 이용해서 사전에 관군과 무림이 부딪히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이네.”
이게 운명인가?
양천의 전인에 이어 현천의 전인 동안 수호자의 역할을 지고 있었다.
괜히 어깨가 무거워졌다.
“아…… 힘드네요.”
“그대는 무엇이 그리 힘이 드는가?”
“제가 무림도 구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황궁도 구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후후후후.”
남하림의 뜬금없이 한마디에 웃음이 나왔다.
“맞네. 그대가 무림은 물론 황궁도 구해야 하네.”
“제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그러게 말이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만통자가 말하기를 재수 없는 놈이라 하더니…… 그대를 보니 그게 아니구만.”
“이런, 그 노인장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또 늘 노인장이라고 부른다면서…… 싸가지가 없다고 했네.”
“아, 진짜…… 치사하게 그런 말까지 다 했군요.”
“후후, 나중에 나가거든 혼을 내주면 되네. 이젠 그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후후,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기운이…….’
남하림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힘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괜찮네. 시간이 되었을 뿐이지. 자네를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억지로 시간을 늦추었네. 힘들겠지만 수고 좀 해주시게나.”
현천의 전인.
그가 눈을 감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좋은 곳에 가셨으면 합니다.’
남하림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 * *
현천주(玄天宙).
현천의 전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
설렁.
물컹한 느낌이 드는 공간은 포근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얼마 동안 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현천주 안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스으으으으-
머리 위로 푸른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이번에는 붉은색의 강렬한 빛이 보였다.
‘이건…… 태양…….’
태양이 점점 떠오르면서 머리 위로 지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남하림이 계속 걷는 동안 끊임없이 태양이 떠오른 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수백 번의 같은 모습.
‘멈추면 안 돼. 계속 걸어야……!’
남하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슈우우욱-
드디어 공간을 빠져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넓은 광야.
높은 산.
그 아래로 흐르는 긴 강들.
중원이 틀림없었다.
스으으-
중원이 남하림을 중심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NAME?
‘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소리가 들린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세상이 점차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하림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어지러웠다.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점점 정신이 희미해졌다.
* * *
번쩍.
남하림은 눈을 떴다.
“휴우…… 죽을 뻔했다.”
현천주에서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나는 동안, 남하림은 수만 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만물의 이치.
세상을 만든 자연의 이치.
그 과정에서 사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피식.
남하림은 웃음이 나왔다.
‘쳇. 이것들을 알면 뭐 해? 남들이 이대로 살지 않는데.’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었다.
함께하는 세상.
“황궁을 막는 게 아니라 차라리 중원 무림에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현천의 역할은 새로운 왕조에 도움을 주고 무림과 조율하며 관여하는 것이었다.
스윽.
머릿속에 새롭게 흐르는 기가 느껴졌다.
무단의 기와는 다른 느낌.
‘그러고 보니 머릿속이 너무 깨끗해진 것 같은데.’
현천의 기는 내력이 아닌 정신을 맑게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좋은데?”
남하림은 이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공을 펼치는 데는 무단이면 충분했다.
‘나가볼까?’
* * *
드르르륵-
현천주의 석문이 열렸다.
홍인과 만통자가 밖으로 나오는 남하림을 맞이했다.
“두 분이 계셨군요.”
“어떻게 되셨습니까?”
만통자의 물음에 남하림은 곧바로 현천의 기를 운용했다.
우우우웅-
남하림의 신형에서 현천의 기가 흘러나왔다.
홍인과 만통자가 차고 있던 팔찌가 공명했다.
‘현천의 기.’
만통자는 곧바로 알았다.
‘종전의 회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천의 기가 높다. 이 정도 일 줄은…….’
홍인은 흥분한 듯 남하림을 바라보았다..
‘동창을 충분히 잡을 수 있겠어!’
* * *
“와우…… 이건 정말…….”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황궁무고의 존재가 남하림의 눈앞에 나타났다.
현천에서는 이곳을 현천옥(玄天鈺)이라 했다.
현천옥에 가득한 보물들은 황궁 소속의 물건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현천의 소유였다.
현천무옥.
현천병옥.
현천보옥.
세 곳으로 된 현천옥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보물들이 가득했다.
남하림은 마지막 현천무옥에 들어섰다.
정사마 구분 없이 각 문파들의 무공서들이 정리가 된 채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 필사로 적은 복사본이었다.
‘능력도 좋다. 이것들을 전부…….’
개방의 무공편에서도 강룡십팔장이 꽂혀 있는 것을 찾았다.
“이걸 모은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없습니다. 전대의 전인들께서 하나둘씩 모으다 보니…….”
“그럼 이것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그건 저희들도…… 회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오호.”
남하림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이것들을 내 맘대로 처리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나중에 알려 드리죠.”
‘후후후, 이거, 맹주가 된 기념으로 선물들을 주면 다들 좋아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