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염성평야에 도착하다
제안포에서 내린 남하림은 강소성 총분타 소속의 개방 방도들을 이끌고 빠르게 움직였다.
후개 남하림을 따르는 일만 명의 개방 방도들.
그들은 흥분했다.
후개를 포함한 걸협오성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펄럭. 펄럭.
걸성불패기(乞星不敗旗).
남하림은 제안포에서 처음으로 그 깃발을 봤을 때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 개방에 없던 기(旗)였다.
가볍게 했던 말이 개방의 방도들 가슴 깊이 박힌 듯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겠네. 앞으로 천랑성을 걸성으로 불러야겠구만.’
천랑성(天狼星).
성도평야 싸움 당시, 남하림이 마침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기에 가리켰던 별이 바로 천랑성이었다.
어쩌면 개방과 가장 닮은 별이기도 했다.
큰개자리에 해당하는 별.
개방과 개는 뗄 수 없는 사이이기도 하니까.
걸성불패기가 바람에 휘날리며 염성평야를 향해 움직였다.
휘릭!
개방에서 가장 바쁜 곳은 걸비였다.
중원 곳곳에서 찾아낸 수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부장, 천사회와 오가련은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아.”
“다행이네. 겨우 시간에 맞췄어.”
“저들이 보급을 챙기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일 거야. 저번처럼 먹는 걸로 당하기 싫었겠지.”
당무독의 말처럼 숭화삼지에선 보급 문제를 맞닥뜨렸던 천사회였다.
이번에는 같은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보급대와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이동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다 왔어.”
마지막 언덕을 넘어서면 염성평야가 보일 것이었다.
“준비를 해볼까요?”
또 한 번의 격전이 펼쳐질 장소.
강소성 개방 총타 방도들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하나씩 들었다.
“총타주님, 우리가 왔음을 알려야지요.”
“알겠소이다!”
신풍걸은 방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걸행음(乞行音)을 울려라-!”
따다닥!
뿌우우우우웅-!
타타타탁타탁타탁탁!
개방 방도들은 각자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염성평야를 향해 내려갔다.
긴장감이 감돌던 염성평야가 한순간에 떠들썩해졌다.
“뭐지?”
웅성웅성.
갑자기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향했다.
상국주 손장과 역위천.
산동악가 가주 악민과 황보세가 가주 황보인.
마지막으로 환영각 각주 성무항도 다급히 군막에서 나왔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높이 치솟아 흔들리는 깃발.
가장 먼저 안휘성 개방 총타주 공천개(空穿丐)가 걸성불패기를 보며 소리쳤다.
“후개님이시다! 개방의 방도들은 뭣들 하느냐! 후개님을 맞이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 후개님이 오셨다!!”
일만여 명의 방도들이 환호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들고 장단을 맞추며 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염성평야가 순식간에 빈 공간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허어어…….”
염성평야의 기세가 변했다.
환영각은 물론 황보세가, 심지어 산동악가의 무인들도 후개와 걸협오성의 등장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끝났어. 이번 싸움은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군.”
전장 속에서 살아온 인물인 역위천은 개방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허어…….”
동문상국 국주 손장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손 국주, 왜 그러시오?”
“저…… 녀석이 이 정도의 인물이 될 줄은 몰랐소이다. 진작 남 국주의 청을 받았다면…….”
“무슨 청을 말하는 것이오?”
“내 막내딸과 청혼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허어, 안타깝소이다. 거절을 한 모양이군요.”
“내가 가장 아끼는 여식이라서…… 그때는 아무나 줄 수 없다고 생각을 했지요. 내가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모양이외다.”
“이런, 천하제일인 사위를 놓쳤구려.”
그러자 옆에서 황보인이 어쩐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 가에도 참한 아이가 있지요. 다행히 외가를 닮아 후개가 보면 좋아할 것 같군요.”
“참한 아이라면 환영각에도 있소이다. 같은 걸협오성인 철각의 사촌 동생이외다.”
“그렇습니까? 후개 정도의 사내라면 두 명의 여인이 있다고 해서 해가 되지 않을 터인데. 성 형, 우리 한번 잘해보십시다.”
“아암, 맞소이다. 황보 가주의 말씀대로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소이까?”
악민은 두 명의 가주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산동악가라고 해서 달릴 게 없었다.
한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건 이미 지나간 일.
그 사건이 있은 후, 산동악가는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음…… 우리 세가에도…….’
* * *
남하림과 네 명은 개방 방도들의 환영 인사를 받아들였다.
보통 인물이라면 쑥스러울 정도로 과했지만.
다섯 명은 어느덧 익숙해졌는지 과한 환영 인사까지도 예사롭다는 듯 즐기고 있었다.
공천개가 다섯 명 앞으로 다가섰다.
“안휘성 총타주 공천개올시다. 후개님을 뵙습니다.”
“공천개님이시군요. 반갑소이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냥 즐기면서 왔습니다. 오히려 공천개님께서 정말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요.”
“개방의 제자라면 당연히 후개님의 명을 따라야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남하림과 인사를 마친 공천개는 곧바로 나머지 네 명과, 함께 온 신풍걸과도 인사를 했다.
인사를 나눈 후 남하림은 대장 군막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섯 명의 인물들.
남하림의 뒤를 따르던 성철각은 그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백부께서 직접 오셨구나.’
환영각 각주 성무항은 외부의 일에 잘 나서지 않는 편이었다.
남하림 또한 성무항과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하림아-!”
먼저 상국주 손장이 한 걸음 앞서 나오며 가장 먼저 남하림을 반겼다.
“손 숙부님을 뵙습니다.”
군막에 들어간 후에도 서로 처음 보는 사이가 많아 인사가 길어졌다.
덥석!
‘이놈, 단단해졌어.’
황보궁은 아버지 황보인과 재회했다.
“아버지.”
“녀석, 이젠 무림인답구나.”
“대형과 네 분 형님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황보인은 아들이 너무나 잘 자라고 있자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이들과 함께 보낸 건 잘한 결정이었다.
이후, 걸협오성과 함께한 여인이 유극지와 전대 검후의 여식인 유미령이라고 들었을 때는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다음에 소개될 인물에 비해서는 약과였다.
일행의 맨 뒤에서 조용히 서 있는 노인.
손장을 제외한 네 명의 수장들은 진작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노인에게서 무시하지 못할 마기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역위천이 물었다.
“후개, 저분은?”
남하림은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들 외에는 굳이 다른 인물들이 알 필요 없었다.
이번 싸움에서도 그는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탈혼마제라고 합니다. 마교에 있던 분인데, 심심하다고 따라오더군요.]
“……!!”
정파 소속의 무림인은 보통 마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낀다.
그런데 저 노인은 전전대 마교의 인물로, 탈혼마제라 불린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순간 모두 몸이 굳어진 듯, 탈혼마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척!
“선배를 뵙소이다.”
“큭, 그대가 용병왕으로 알려진 역위천인가?”
“한때 용병왕이었지요. 후개에게 진 이후 그 이름은 버렸소이다.”
“크크크, 그런가?”
탈혼마제는 역위천을 살펴보며 전음을 보냈다.
[후배를 보아하니 다른 신분이 있는 것 같군.]
[호천의 전인이외다.]
[호오, 그렇구만. 무림에서 한가락하는 인물들은 모두 구천의 전인이군.]
한순간 파랑이 지나가고, 모두기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일대 주위를 그려놓은 지형도가 놓여 있었다.
당무독을 자리에 앉기 전, 어떻게 진을 쳐놓았는지 빠르게 훑었다.
[무독, 어때?]
[이건 거의 전면전으로 붙는 진영이야.]
[용병림에서 싸우는 전형적인 방식이겠지?]
[아마도.]
[알겠어.]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후개, 할 말이 있으면 해보게.”
“현재 이 자리에는 여섯 세력의 수장들께서 모여 있습니다. 원활한 움직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들 중 한 분이 나서 지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누군가 책임을 지고 나서야겠지.”
역위천은 바로 남하림을 가리켰다.
“후개, 그대가 하지 않겠나?”
황보인과 악민, 성무항도 찬성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남하림은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선 먼저 새롭게 진영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진영을?”
“그렇습니다. 이 일은 여기 무독이 설명을 할 것입니다.”
스윽-
당무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척.
그리고 곧바로 지형도를 가리켰다.
“현재의 진법도 상당히 좋은 방법입니다. 혈군사란 인물이 없다면 말입니다.”
“당 대협, 어떤 문제가 있는가?”
“적이 여기에서 치고 들어온다면 현재의 진영으로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당무독은 푸른색 기를 염성평야 뒤로 옮겨놓았다.
“음…… 여기를 이용해서 막아내면 되지 않겠는가?”
역위천이 현재의 진영에서 붉은 기를 하나 옮겼다.
“맞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지요. 하지만…….”
당무독은 푸른색 기를 반대편에 새롭게 옮겨 놓았다.
“적들은 여기를 칠 것입니다.”
“하…….”
한 번의 움직임에, 역위천이 옮긴 붉은 기가 고립되어 완벽하게 전멸당하는 형세가 그려졌다.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붉은 기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역위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 대협, 적들이 이와 같이 움직인다는 보장이 없지 않는가?”
“불사무혼님, 혈군사가 두 무력단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그는 단번에 본 진영의 단점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렇군.”
혈군사 기성이라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다.
“당 대협, 좋은 방법이 있는가?”
“우린 오행진을 펼칠 것입니다.
당무독은 붉은색 기에 각각의 문파 이름을 적은 뒤 하나씩 다섯 방향에 놓았다.
가장 맨 앞에 놓인 깃발에 용병림이 적혀 있었다.
“선봉진은 불사무혼님께서 맡아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선봉은 우리가 맡을 것이네.”
“고맙습니다. 용병림은 예진(銳陣)으로, 환영각에서는 곡진(曲陣)을, 황보세가에서는 원진(圓陣)을, 산동악가에서는 방진(方陣)을, 마지막으로 상국에서는 직진(直陣)으로 진법을 펼칠 것입니다.”
당무독이 말한 내용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행진의 위치에 오방진.
또 한 번의 진법으로 대진(大陣)을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황보인이 물었다.
“당 대협, 개방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스윽-
당무독은 염성평야 밖으로 두 개의 선을 그렸다.
“저들과 싸움이 시작되면 곧바로 개방은 여기 두 군데로 나누어서 평사진을 펼칠 것입니다.”
평사진(平死陣).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진법이었다.
이번에는 남하림이 나섰다.
“이번 기회에 필히 보여줄 것입니다. 중원 무림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무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역시 신무맹의 맹주가 되기에 충분하네.”
“맞소이다. 후개가 아니고서야 누가 맹주가 되겠소이까?”
지도를 내려다보던 성무항과 황보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게요? 신무맹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외다.”
악민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역위천과 손장도 마찬가지로 처음 듣는 단어에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보인이 슬쩍 남하림을 보았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흔들고 있었다.
정파 무림에 모두 연락을 한 줄 알았는데.
“이런…… 악 가주도 아는 줄 알았소이다.”
“그게 무슨……?”
당무독이 얼른 나섰다.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 아니, 한편에 조용히 앉아 있던 탈혼마제와 유미령까지 다섯 명에게 신무맹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허어, 후개. 섭섭하오. 어떻게 본 세가를 빼놓을 수 있소이까?”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가와 조금 문제가 있었으니, 서신으로 설명드리기엔 어렵더군요.
이곳에 산동악가를 부른 이유는 신무맹 일원으로 생각하고 제안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산동악가에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흐음, 그렇소이까.”
악민의 섭섭함이 줄어들었다.
“후개, 소림사와 무당, 게다가 화산까지 찬성했다면 진정한 무림맹이군.”
역위천은 인정했다.
중원 정파 최고의 문파들이 신무맹에 함께하고 있었다.
‘크흐흐…… 겨우 약관의 나이에 신무맹의 맹주라…… 이들이 말한 방식대로 한다면 비록 결정권을 지니지는 못하겠지만…… 그건 언제든지 바뀔 수가 있지. 이놈들, 무공은 둘째 치고 너무 머리가 좋아.’
탈혼무제는 단번에 파악했다.
‘물론 무림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 녀석이 충분히 나이가 들면 인정을 하겠다는 뜻일 게야.’
하나 그것은 나중의 일.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남하림이 신무맹의 맹주가 된다는 것과, 그렇게 되면 공식적으로 무림 최고의 인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손장은 점점 아까운 심정이 들었다.
무림 최고의 사윗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찼다.
‘아니지, 아니야. 아직 기회는 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남 형님께 연락을 해야겠어!’
그뿐만 아니었다.
다시금 각오하는 두 사람.
황보인과 성무항 또한 필히 남하림의 자신의 집안사람으로 만들고자 다짐을 굳히고 있었다.
* * *
혈군사 기성은 전령으로부터 염성평야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서신에는 염성평야 위에 진영이 그려져 있었다.
“후후후, 백호진이라…… 역위천의 생각인가. 그만큼 자신감이 있는 게로군.”
한 번 싸워 이겼으니 자만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이로써 구천의 하나가 사라지게 생겼어. 후후.”
스으윽.
기성은 바둑판 위에 늘어뜨린 바둑돌을 치웠다.
딱! 딱!
그리고 백돌을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서신에 그려져 있는 진영처럼.
백호진처럼 백돌이 하나하나 놓였다.
“이건 무식한 용병 놈들이 제일 잘하는 진법이지. 하지만 운이 없군.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로 이런 진법을 펼치지 않을 텐데.”
기성은 흑돌을 집었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걸리는 느낌.
‘그놈들이 도착했다지.’
장강을 통해 강소성으로 빠르게 들어간 거지 놈들.
‘그 약은 놈들이 내가 왔다는 모르지는 않을 것이고.’
스으윽-
기성이 다시 바둑판을 쓸어냈다.
“큭, 크하하하하핫! 이런, 완전히 당할 뻔했어. 이것은 함정이다.”
백돌이 사라진 바둑판은 텅 비어 있었다.
기성의 번뜩이는 눈빛 속엔, 바둑판 너머 희미하게 나타난 환영이 앉아 있었다.
‘남하림…… 이놈. 어떻게 둘 생각이더냐?’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상황.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에 따라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결국 급한 자가 먼저 움직인다는 것인가?”
콰아아앙!
기성은 바둑판을 내리쳤다.
찌지지직-
중앙에서부터 바둑판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좋다. 누가 이번 판을 이기는지 똑똑히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