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살인멸구
천살성의 기를 벗어날 수 없다면 그대가 맞이하는 것은 죽음뿐이니라.
중원 무림에 흐르는 소문.
자신과 같았다.
문령도 점점 눈동자가 붉게 변해갔다.
샤샤샤샤-
천살성의 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두두두둑.
삼백육십오 개의 천살혈맥들이 부서지며 섬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녀석도…….’
이휘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자신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녀석이 또 다른 천살성이었다니.
“신기한 일이군. 네놈도 천살성이라니.”
“하하핫! 한 시대에 두 명의 천살성! 우리가 같은 배를 탔다면 좋았을지도.”
“아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놈이 죽을 테니.”
“……크큭. 네놈의 말이 맞군.”
문령이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귀찮군. 그만 끝을 내지.”
이휘연이 타구봉의 끝을 잡고 당겼다.
스르르릉-
잡음 하나도 들리지 않는 매끄러운 발검의 소리.
태극흑검의 짙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우욱.
문령의 손에서도 붉은 강기가 뻗었다.
“홍기조(紅氣爪).”
“크크, 한심걸, 홍기조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지어다.”
“영광이라. 부장 말이 맞군. 근거도 잘난 체하는 놈들은 죽는다더니.”
스륵.
태극흑검의 끝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홍태극(紅太極)이 그려졌다.
‘겨우 태극검을!’
문령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난 중원 무림 모든 무공의 파훼법을 익혔다. 네놈이 펼치는 무당의 검도 마찬가지.’
번쩍!
홍기조가 더욱 불길한 빛을 냈다.
“그래, 어차피 한 놈씩 죽이려고 했는데 알아서 나타나주니 고마운 일이지.”
파앗!
이휘연의 눈앞에서 붉은빛이 짧게 번뜩였다.
스르르-
붉은 강기들이 날리는 사이로 펼쳐지는 연화락(蓮華落).
휘리릭!
이휘연의 머리카락과 상의 자락이 홍기조가 일으킨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하하하! 미꾸라지 같군! 도망은 여기까지다!”
피피피핏!
홍기조에서 나온 강기가 기세를 더하며 망혼강를 만들어냈다.
“흐윽!”
전방을 그대로 집어삼키며 퍼져 나오는 붉은 망혼강.
이휘연은 태극흑검을 앞으로 뻗으며 압축된 십 성의 내력을 단번에 끌어 올렸다.
유원화인(悠遠華人).
휘리리릭!
홍태극의 기가 망혼강을 휘감으며 옆으로 흘려보냈다.
“훗.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미안하지만 이 초식은 이미 알고 있다!”
휘이이익.
한순간 태극흑검에 끌려가던 망혼강이 홍태극을 밀어내며 방향을 틀었다.
샤르르르-
그리고 사라졌다.
‘허초!’
검이 허공으로 비켜났다.
이휘연의 전신은 무방비 상태.
“한심걸. 잘 가라.”
끼이이익-
홍기조가 날개를 좌우로 뻗으며 날아올라,
화라락!
이휘연을 그대로 덮쳤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휘연의 신형.
당당히 착지한 문령이 초토화된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끝났군.”
내력을 거두자 홍기조가 사라졌다.
상대는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했다.
“…….”
찌이이잉-
눈앞에 나타난 붉은 점.
우우우웅-
‘커…… 커지고 있어?’
하늘 위 태양이 땅으로 내려앉는 듯.
슈우우욱-
붉은 태극으로 변한 홍점이 그대로 문령의 몸을 통과하며 지나갔다.
“……어떻…… 게……? 파훼…… 버…… 을 아는…… 데.”
“무공은 마음으로 펼치는 것이다. 파훼법이라고? 넌 속을 모르는 껍데기일 뿐이야.”
스르르르-
쿠우우웅!
문령은 몸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휘이이익!
순간 어느선가 매서운 강풍이 불어왔다.
‘큭.’
이휘연이 순간 눈앞을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이런.’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문령의 신형이 보이지 않았다.
* * *
검은빛 하늘.
휘이이이익-
흑색 유성이 빠르게 떨어졌다.
‘죽음의 유성이 천살성 앞을 지나가다니.’
챠르르-
혈군사는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실패했군.’
주천(朱天).
주작성의 인물이 당했다.
‘그들이 주작령을 상대해서 이길 줄이야.’
혈군사의 시선이 바둑판을 향했다.
한판의 바둑에서 변수는 늘 생기는 법.
‘하나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너무 변수가 많아.’
변수가 많다는 건 수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
휘익!
그가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돌을 전부 쓸어버렸다.
“질 바둑을 미련하게 계속 둘 필요는 없지. 이번 판은 불계패다.”
따악!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흑돌을 하나 주워 바둑판 위에 두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이번 판은 쉽지 않을 게다, 후개.”
혈군사의 웃음에 담긴 살기가 짙었다.
* * *
번뜩!
갑자기 눈이 떠졌다.
‘뭐지?’
잠이 깨자마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악산표국 기 국주의 온몸에 소름이 돌았다.
침실은 어두웠다.
그런데 창문 밖이 환했다.
‘벌써…… 날이 밝았…… 나?’
그때,
‘허억!’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의 눈앞에 검은 인영이 불쑥 나타난 것.
야행성 짐승과도 같은 눈빛.
“누…… 누구요?”
동시에, 침실 밖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악!”
“카아아악!”
날이 밝은 게 아니었다.
건물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기 국주.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당신들……! 이게 무슨, 당신들이 왜?!”
“죽을 때가 된 것뿐이다. 그 전에 한 가지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는데, 줄 수 있겠는가?”
“……?”
“우리와 주고받았던 물건들이 남아 있을 것 같군.”
기후장은 순간 깨달았다.
그도 장사꾼이었으니까.
‘상국의 일이 틀어졌어. 그러지 않고서야 내 입을 막을 리 없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줘도 죽고 안 줘도 죽겠지.’
떨리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런 건 없다.”
“크큭, 간이 부었군. 하나 여기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끝이지.”
휙!
검은 인영이 돌아섰다.
화르르르-
침상에 누워 있던 기후장의 몸이 불에 타올랐다.
“아아아아아아아악!”
타아앙!
세상이 화염에 빠져들었다.
“크하하핫! 본 교의 화염이여. 타올라라!”
* * *
웅성웅성.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악산표국.
그 앞에 악산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어쩐 일인다야?”
“아, 글씨…… 어제 밤에 나와보니 표국에 불이 화아아악 나버렸어야.”
“으메, 우짜노. 전부 다 죽었다네요.”
“애기들도 많았는데…… 이 천인공노할 짓을 누가…….”
다섯 명 또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재현장을 바라보았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남하림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을 뿐.
“하림 형, 어떻게 하지?”
“잠깐 기다리자. 지금은 사람들이 많아.”
“응.”
다섯 명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킁킁.”
구경꾼들은 코를 훌쩍거리며 하나둘씩 불에 타버린 악산표국 앞을 떠나갔다.
“이런 짓을 할 놈들은 신교 놈들밖에 없어.”
“허어, 이 사람이…… 조용히 하게.”
한 사내가 말하자 다른 사내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도 신도들이 있을지 모른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
‘거지?’
사내가 슬쩍 다가온 남하림을 아래위로 살폈다.
깨끗한 거지 복장에 깔끔한 용모.
귀티 나는 얼굴에 환한 미소.
“혹시……?”
“네, 맞습니다.”
“쯔쯔. 내 생각이 맞구만. 그분들 따라 하기 놀이 중이지? 젊은 친구들이 유행을 좋아해서 걱정이야. 괜히 그분들 흉내 내다가 잘못되면 다치니 조심들 하게.”
“아…… 네.”
남하림은 좀 무안해졌다.
“아 참, 뭔가?”
“아, 이런 짓을 할 놈들이 신교밖에 없다고 하셔서. 나쁜 짓을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엥? 그러고 보니 사천 지방 목소리가 아니구만?”
“네. 맞습니다. 떠돌다 보니 하남에서 여기까지 왔네요.”
“그러면 잘 모를 수도. 염라명왕을 모신다면서 지랄하는 것들이 돌아다니면서 돈도 뺏는다고. 아주 개쌍…… 양아치…… 에잉, 욕도 하기 싫구만.”
“아항, 이해가 됩니다.”
“신자라는 놈들은 미쳤고 말이야. 그런 놈을 왜 믿는지 원…… 자네도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충고 고맙습니다.”
‘평판이 좋지 않군.’
남하림은 일행 곁으로 돌아갔다.
“무독, 사천신교에 대해서 아는 거 없어?”
“글쎄? 내가 당문에 있을 때는 조용했던 것 같은데. 민간 백성들 사이에서 믿는 종교 정도? 갑자기 왜 이렇게 커졌는지 모르겠다.”
“누가 뒤에 있지 않고서야 신교가 서궁상국을 먹겠다고 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두두두두-
멀리서 한 무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재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악산현에서 나온 관군들.
“빨리도 온다.”
“하림 형, 원래 관군은 뭐든지 정리가 끝나야 나타나잖아.”
“하긴.”
이윽고.
흐느적흐느적.
시체를 치우는 군졸들 사이를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돌아다녔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손짓을 하면서 주위를 맴돌았다.
슥슥.
현장 조사장부를 들고 몇 글자만 쓴 뒤 붓을 내려놓더니.
현장에 온 지 겨우 이각이 지났을 쯤 코를 막으며 수하에게 소리쳤다.
“현령께서 한 번 오실 테니 그때까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
“넵,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두 명의 군졸을 불에 탄 정문에 세운 뒤 떠나갔다.
이제 구경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조용하네.”
불에 거멓게 타버린 정문.
담벼락만 겨우 남아 있는 정문에 선 두 명의 군졸이 다가오는 다섯 사람을 보았다.
‘뭐여? 거지여, 아니여?’
군졸들은 혼동이 왔다.
“멈추시오. 누구요?”
“개방의 방도이외다.”
남하림은 신패를 꺼냈다.
#NAME?
얼른 앞면만 보여주고 넣은 터라, 군졸은 뒤에 적힌 이름은 보지 못했다.
“아…… 무슨 일입니까?”
관부 소속의 하급 군졸인 자신.
구파일방의 대문파 제자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화재 현장을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그…… 그러시죠.”
군졸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창을 당겼다.
불에 탄 악산표국.
밖에서 보는 것과 직접 대면한 모습은 달랐다.
처참하다는 말이 모자랐다.
“부장, 너무 심한데…….”
한편에 모아놓은 수많은 시체들.
여자와 아이들까지 불에 탄 그대로다.
관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치운 듯,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도 시체가 눈에 띄었다.
쓰으윽-
다섯 명은 말없이 깔린 시신들을 꺼낸 뒤 한자리에 모았다.
‘욕심이 뭔지…….’
시신을 찾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평소라면 손에 먼지가 묻어도 닦아낸다.
지금은 손과 발, 그리고 입고 있는 옷 전체에 그을음이 까맣게 묻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툭.
팽유도와 당무독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고…… 완전 열받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 아, 난 부장이 말이 없으면 슬쩍 겁이 나더라고.]
[무독 형도 그래요?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던데.]
남하림은 허리를 폈다.
시신들을 끄집어내면서 알게 되었다.
‘살육이야. 이놈들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 뒤 시신을 태웠어.’
서궁상국 일이 아니더라도, 사천신교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짓을 했다.
강하다는 이유만으론 살인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무독.”
‘헛. 깜짝이야.’
갑자기 자신을 부를 줄 몰랐다.
“사람들을 죽인 후 불을 지르는 심리가 뭘까?”
“공포심이지.”
“미친놈들…….”
“공포심도 신앙을 믿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니까.”
더 안쪽으로 들어간 이들은 어느덧 무너진 표국주실 앞에 다가섰다.
건물의 기둥만이 남고, 벽과 지붕은 바닥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불에 탄 잔재를 하나씩 치웠다.
그 안에서 발견한 시신 한 구.
‘흐음.’
몸을 숙인 채 불에 까맣게 타버린 시신.
마치 품속에 중요한 것이라도 들어있는 듯했다.
남하림은 조심스럽게 시신을 살폈다.
‘이것을 왜?’
자색빛의 상자.
불에 타는 순간에도 지켜야 했던 물건처럼 보였다.
투욱.
상자를 열었다.
“……!”
보석 같은 귀중품이 아니었다.
신교의 신패와 세 권의 장부.
“신도패군.”
휘리리릭-
장부를 펴 보았다.
“흐음.”
스윽.
남하림은 상자에서 꺼낸 물건들을 품 안에 넣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를 당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