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새로운 시작
내화당.
귀빈을 위한 접객원이라 했지만 여인들의 검문이기에 건물 내부는 화려한 꽃무늬들로 가득한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흐음, 향긋하네요.”
팽유도는 코를 실룩거리며 방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여인의 방에 처음 들어온 사내처럼 모든 게 신기해 보였다.
푸우욱!
팽유도는 의자를 가볍게 툭툭 친 뒤 쓰러지듯 앉았다.
“아 참, 백리 소저가 검문에 있을 줄 몰랐어요.”
“그러게.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네. 좀 달라지기도 했고.”
당무독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표정이 밝던데. 부장, 안 그래?”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아 보였어. 이곳에서 잘할 거야.”
스윽.
이휘연은 상체를 살짝 일으키며 남하림을 보았다.
“부장, 검후를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낼 거지?”
“먼저 그분을 한번 만나보려고요. 그 뒤에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를 봐야지 않겠어요?”
“음, 그게 좋은 생각 같군.”
“연락이 올 때까지 쉬고 있죠.”
터억!
남하림은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앞에 보이는 발걸이 같은 탁자에 발을 올렸다.
“딱 적당한 푹신함이군. 여기 책임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눈썰미가 제법이야.”
남하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들어가겠소이다.”
드륵.
내화당의 책임자인 허류향이 안으로 들어섰다.
‘끄으응.’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홍실에 제집인 양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사내들.
‘이자들이 개방의 걸협오성?’
내화당을 잠시 비운 사이 걸협오성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자들은 이미 중구난방.
‘쯧,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거늘.’
휙. 휙.
그녀의 시선이 좌우로 휙휙 돌아갔다.
귀홍실에 진열된 물건들이 제대로 놓여 있는지 확인하는 것.
삼단 진열장 위에 놓여 있는 청자.
그 아래로 연분홍색의 봉황 조각품.
그리고 제일 중요한 서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행이다. 장식들은 손을 대지 않았어.’
스윽.
발을 내리며 일어선 남하림을 보자 속이 울컥거렸다.
‘내가 저 침향걸이를 구하기 위해 몇 개월을 돌아다녔건만……! 더러운 발을 올리다니!’
허류향은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휴우…… 다행히 냄새는 안 나.’
예전부터 개방 거지들을 상대할 때 가장 곤욕스러웠던 일은 몸에서 나는 냄새.
“큼, 난 이곳을 책임지는 허류향이라 하네.”
“개방의 제자인 걸협오성입니다.”
남하림은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어…… 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남하림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귀홍실을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을 만큼의 압박감.
스윽.
다른 다섯 명도 각자 포권을 했다.
이들의 기도에 귀홍실이 터져 나갈 듯했다.
‘걸협…… 오성이 이 정도의 인물이었던가?’
“반…… 갑네. 혹시 불편, 한 게 있다면…… 밖에 사람이 있으니 부르면 될걸세.”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불편한 게…… 있는가?”
“목욕을 하고 싶습니다만 어디서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개방 제자라 하나 거지의 입에서 목욕을 하고 싶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줄이야.
‘음…… 어떻게 하지?’
하지만 이곳은 여인들만 있는 검문.
사내가 아무 곳에서 함부로 목욕할 순 없을 터.
“흐음, 알겠네. 저기 옆방에 따로 준비를 하지.”
“고맙습니다. 허 당주님께서는 얼굴만큼이나 친절하시군요.”
“…….”
남하림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환하게 지었다.
꿈틀.
허류향의 입술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도 다정하게 변했다.
“다른 것도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을 하게.”
“감사합니다.”
드르르르-
허류향은 귀홍실을 나온 뒤 문을 살며시 닫았다.
‘훗…… 보는 눈은 있구만. 괜찮은 사내로군.’
* * *
‘으음.’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지는 시간.
내화당에 도착한 여주미는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자들이 진짜일 줄은…….’
자신도 성급하게 실수했지만, 모른 척하며 검문까지 따라온 다섯 명도 잘못이 있지 않나?
여주미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어쨌든 그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검후를 만나 자신에 대해 좋지 않는 말을 하면 곤란하다.
‘우선 직접 만나서 사과해야겠지.’
그때, 허류향이 내화당 앞에서 머뭇거리는 여주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먼저 반겼다.
“여주단 단주께서 이곳에 무슨 일로 왕래를 다 하고?”
‘왜 이상한 웃음을 띠고 있어?’
여주미는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류향, 시끄럽다. 잠시 거…… 걸협오성을 만나고자 한다.”
“후후후.”
허류향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왜 웃지?”
“그들에게 무례했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쯧.”
여주미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만하지. 다치고 싶지 않으면. 안 그래도 기분이 별론데.”
“어머나…… 또 무식하게 싸우려고? 네가 자꾸 그런 식이니 애들이 싫다고 하는 거야.”
“…….”
“조금 나근나근하게 말을 해봐. 나처럼. 호호호.”
‘저걸 그냥…….’
항상 얄밉게 웃는다.
검문에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두 사람.
여주미는 특히 허류향을 싫어했다.
“그들은 어디 있어? 빨리 말해.”
“귀홍실에서 쉬고 있지. 잠깐 기다려 봐.”
여주미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귀홍실로 움직였다.
“뭐야? 말도 안 끝났는데…….”
허류향은 복도를 돌아서는 여주미의 뒷모습을 보다,
‘아, 아직 목욕하고 있을 텐데.’
순간 생각이 났다.
‘알아서 하겠지.’
허류향이 돌아서는 그때,
“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허류향이 후다닥 빠르게 날아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여주미의 얼굴.
“야!! 안에서 목욕한다고 말을 했어야지!!”
“어, 봤어?”
“이게! 보긴 뭘 봐!”
* * *
귀홍실에 앉은 여주미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탈탈탈.
남하림은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물었다.
“웬일이십니까? 무작정 들어온 걸 보니, 급한 일이 있소이까?”
거지 복장을 벗은 남하림.
‘잘생긴 줄 알았지만 완전 귀공자군.’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글귀가 생각났다.
“……후개, 사과를 하러 왔습니다. 사기꾼으로 오해해서 기분이 상했으면 미안하외다.”
“괜찮습니다. 이미 그 일은 있었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고맙…… 소이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남하림을 보면서 허류향은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된 듯했다.
“다른 볼일은 없습니까?”
“아. 이런, 쉬는 데 방해를 했군요. 그만 일어나 보겠소이다.”
스윽.
여주미는 고개를 짧게 숙인 후 귀홍실을 나섰다.
‘쳇,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 * *
자오곡 결전에서 일어난 소문은 중원으로 퍼져 나갔다.
무림맹의 힘에 종남파는 무너졌다.
자오곡에서 한 시진도 버티지 못한 종남파 도사들은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종남파의 장문인 선류자는 총군장 범기에게 장문영부 금학령패를 넘기는 치욕을 당했다.
종남파의 십년봉문.
그들도 백리세가와 똑같은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태장로전에 십이장로가 모여들었다.
백리세가에 이어 종남파까지 봉문시킨 군사 제갈령의 뜻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끄응.
십이장로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종남파 출신의 아명도인은 가슴이 답답했다.
입을 굳게 닫은 일장로 공형대사에게 원망을 눈길을 보냈다.
“일장로, 대체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구려. 군사의 독단적인 행동은 너무 하지 않소이까? 더 이상 군사의 만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십일장로. 말이 지나치십니다.”
턱을 목에 붙인 듯한 모습으로 눈을 치켜뜬 칠장로 제갈국.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아명도인을 노려보았다.
“독단적인 행동이라 했소이까?”
“제갈 장로, 지금 동문 세가의 인물이라 편을 드는 것이오?”
타아앙!
제갈국은 탁자를 내리쳤다.
“아명,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시오! 군사와 같은 세가인이라 하나 그는 본 가와 뜻을 같이하지 않소이다.”
“그 말을 누가 믿겠소이까!”
“흥. 믿고 안 믿고는 그대가 알아서 판단하시오.”
휙.
아명도인은 공형대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십년 봉문을 당할 만큼 종남파가 잘못했습니까? 군사를 만나 이번 일에 강력히 항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도 그대로 넘어갔다가는 우린 무림맹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음…… 아명도인. 종남파의 일은 안타깝소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을 하자면 군사의 독단적인 행동은 아니외다.”
“대사. 독단적이지 않다니? 무슨 그런 대답이 있소이까? 그는 분명히 무림맹의 힘을 함부로 이용했소이다.”
“…….”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게 아니오?”
그는 장로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스윽.
일장로 공형대사는 두 손을 모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도인께서도 아시다시피 맹주께서 금지에 들어가시기 전 말씀하셨소이다. 무림맹의 모든 일은 군사에게 일임하겠다고 말이오.”
“…….”
“게다가 군사가 어떠한 일을 하든지 상관없다고 하지 않으셨소이까.”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장로전에서는 맹주의 뜻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보고만 있을 것이오? 장로전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군사의 독단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일장로, 그대가 착각하는 게 있소이다.”
“착각이라니…… 내가 무엇을 착각한다는 말이오?”
“현 무림맹을 중원 무림의 정파들이 모여서 세운 것이오?”
“……그, 그건.”
“맹주를 따르는 은하성의 세력들. 현재 무림맹을 지탱하는 원천인 육천이 그들이외다. 그 외 나머지 세력들도 오 할 이상이 군사가 모집한 세력들이지.”
“아…… 아…….”
“이제 이해가 가시오? 우리가 가진 무림맹의 영향력은 겨우 반의반 정도일 뿐. 군사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 무림맹에서 우리들을 떼어놓아도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아명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군사는 무림맹이 아닌 무림성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것인지요?”
“각자 집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군사의 뜻을 따르든지.”
타아앙!
개방 출신의 십이장로 응걸공은 씩씩거리며 바닥을 세게 두드렸다.
“만일 군사의 뜻이 그러하다면 개방은 돌아갈 것이외다!”
스윽.
“본인도 십이장로 응걸공의 뜻과 같소.”
“본도도 마찬가지외다.
육장로 당양과 삼장로 진하진인도 같은 뜻을 말했다.
‘허어어…….’
일장로 공형대사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젯밤.
결국 하늘에서 아홉 개의 빛이 반짝였다.
구천성의 빛이 점점 강해지며 중원 수호성인 자미성을 가리고 있었다.
공형대사는 며칠 동안 고민에 빠졌다.
‘군사의 뜻이 그러하다면, 우리들도 중원을 위한 새로운 맹을 만들어야 할지…….’
그는 여전히 씩씩거리는 십이장로를 보았다.
“응걸공, 혹시 시간이 되시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이까?”
* * *
검문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내화당으로 일찍 백리희가 찾아왔다.
허류향은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잠시 세웠다.
“잠깐만.”
“안녕하세요.”
“네가 일찍부터 내화당에 무슨 일이냐?”
“걸협오성과는 안면이 있는지라 아침에 차라도 한잔 마실까 싶어서 왔습니다.”
“허어…… 봉황오영의 은영(恩英)이 함부로 사내를 만나러 다닌다고 한다면 검후인 네 사부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분들과 전……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
“됐다. 물러가라. 검후에 도전하려는 제자가 행실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면 점수가 깎이는 줄 모르느냐?”
“허 당주님께서 저를 염려해 주시는 것임을 잘 압니다. 제가 비록 검후님의 눈에 띄어 봉황오영으로 발탁이 되었지만, 검후위에는 뜻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더냐?”
“전 백리세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더욱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거늘. 그깟 사내에게 마음을 주려는 것이더냐?”
“그것이 아닙니다. 전 단지 인사라도…….”
“됐다. 지금 네 모습을 보니 백리세가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백리희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허류향은 뼈아픈 소리를 했지만 속으론 그녀를 이해했다.
‘녀석, 그동안 외로웠던 모양이군.’
검문에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야. 하지만 세가를 위해서 이왕 본 문에 왔다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
백리희가 굳건한 표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허 당주님, 제가 잠시 마음이 흔들린 모양입니다.”
“이제야 은영답구나.”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후에 시간이 나거든 나와 함께 차를 마시면 좋겠구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백리희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오후에 오라고 하는지 이해했다.
자신을 이해하는 허류향의 배려가 고마웠다.
‘녀석.’
허류향은 돌아가는 백리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스윽.
그러고는 귀홍실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일어났는지 가볼까?’
그녀는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섰다.
허류향의 기척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앗.”
팽유도가 문밖에 선 허류향을 발견했다.
“당주님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차 한잔 들여보내도 될까 하고.”
“아하, 들어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허류향은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머지 네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다들 편안하게 잤는지 모르겠네.”
“마치 집에서 지내는 것처럼 잘 지냈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호호호. 후개는 어찌 인사성도 밝구려.”
후루룩.
자리에 앉은 허류향은 차를 마시며 남하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중에 검후전에서 연락이 올 걸세. 묘시까지는 검후께서 개인 연무를 하는 시간이라 만날 수 없다네.”
“네. 알겠습니다.”
“근데……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무림맹과 관련된 일이라 검후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 내용입니다.”
검후와 무림맹이란 말이 나오자 그녀는 궁금증을 거두었다.
“알겠네. ……혹시 심각한 일인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하림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허류향은 긴장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