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도둑맞은 구천신품
반각의 시간이 지나고,
장서원에 가득했던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끄으으응-”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명영도인과 호위무사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선 도인들은 쓰러진 이들을 도와 몸을 일으켰다.
“명영, 어떻게 된 일이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면서 정신이 잃었소이다. 독에 당한 것 같소.”
“여긴 항독(抗毒)의 구역이거늘……! 믿기지가 않는군.”
장서원 안에는 독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항독연이 항시 주위에 흘렀다.
한데 이것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것.
“대체 어떻게 독을 푼 거지?”
“명조 사형, 여가궁에 독광걸이 있지 않습니까?”
“……불가. 자하궁에 외부인을 들일 수 없거니와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맞다.”
괜히 그들에게 빚을 지워 좋을 것이 없었다.
먼저 확인할 것도 있었다.
“명영, 복면인이 여기에 온 이유가 있을 게 아니오?”
“잠시만…….”
장서원주 명영은 둔해진 몸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특별히 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없습니다만…… 앗, 혹시……!”
장서원주는 당황했다.
당장 자하동에 들어가 확인해야 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명영! 어서 확인을 해보게!”
“……장문인이 계시지 않으면 자하동을 열 수 없…소이다.”
“지금 시급한 상황이 아닌가?! 장서원주로서 책임을 지고, 확인을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명영이 망설이던 그때.
다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장문인과 명궁도인이 도착했다.
“명영, 자하동의 문을 열게!”
“네, 장문인!”
수십 명의 도인들이 자하동이 있는 아래로 내려섰다.
“이런…….”
동시에 터지는 탄식.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자하동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휘익!
명조도인은 몸을 날려 자하동으로 뛰어 들어섰다.
그의 목소리가 자하동을 가득 울렸다.
“구천신품이 사라졌다……!”
* * *
화산파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장서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여가궁까지 단숨에 전해졌다.
“하필이면 우리가 올라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기지?”
“그러게요. 괜히 찝찝하게. 오해받을 수도 있겠네.”
당무독과 팽유도는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림 형, 안 그래요?”
‘만통자…….’
남하림은 일행과 떨어진 곳에 있던 그를 슬쩍 보았다.
‘조용하네. 평소라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겠지?’
“……뭐,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우리랑 엮는 게 아니면 신경 안 써도 돼. 화산파와 부딪힐 뻔했는데 그런 걱정이 사라졌으니 오히려 잘됐잖아.”
“음…… 부장 말대로 그러긴 하네.”
성철각에게 남하림의 생각은 늘 옳았다.
“여하튼 조용하게 끝났으니 잘됐지. 화산파에 몰래 들어온 것도 모자라 구천신품을 훔치고 달아났어. 대단한 인물이야. 노인장, 그렇지 않나요?”
“어…… 어……? 뭐라고 말을 했는가?”
“구천신품을 훔친 도둑놈이 대단한 인물 같다고요”
“아, 맞네. 대단한 인물이지. 화산파에 잠입한 것도 그렇지만, 어디로 갔는지도 아무도 모르지 않았나.”
“만약 점괘를 치면 누가 훔쳐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놈아. 내 점괘를 믿지도 않으면서 무슨 점괘 타령이냐.”
“무림에서 만통이란 별호가 그냥 붙으셨을 리 없잖아요.”
만통자는 인상을 썼다.
“뭐, 할 수 없네요. 노인장께서도 모르신다니…… 그럼 내가 범인이 누군지 잡아볼까.”
“……!”
‘범인을 안다고?’
만통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팽유도가 신난 듯 곧바로 관심을 가졌다.
“하림 형!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장서원에 가볼까?”
“어허, 그냥 앉아 있어라. 괜히 화산파를 들쑤시고 다니면 더 시끄러워질 게다.”
“조용히 갔다 오면 됩니다. 우리가 사람 하나는 잘 잡거든요.”
“만통자님, 맞습니다. 부장이 머리가 뛰어나서 도둑놈은 잘 잡습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들어가 봐도 되겠소이까?”
“들어오세요.”
두 명의 도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허야도사과 허인도사가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했다.
“장문인께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후개와 독광걸을 뵙고자 하십니다.”
“지금 말입니까? 화산파에 큰일이 일어난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부른 것입니다.”
“그렇군요. 장문인실로 가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급히 장서원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소이다.”
남하림은 어떠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무독, 장서원까지 오라는 것을 보면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독을 사용했다는데 무슨 독인지 모르는 모양인가 봐.”
“흠, 일단 확인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알겠어. 가자.”
스윽.
“나도 같이 가겠네.”
만통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두 도사를 따라 장서원에 도착했다.
‘흐음…….’
당무독은 장서원의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인상을 썼다.
‘독이다.’
장서원에 항독연이 흐르고 있음에도 원주와 호위무사들이 중독된 이유.
당무독은 가방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 뒤 침을 뱉었다.
퉷!
흰색이었던 종이가 엷지만 붉게 변했다.
“부장, 장서원 주위에 독이 뿌려져 있어. 시간이 지나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중독은 건물 안에서 시작된 게 아니야. 밖에서 중독된 후 장서원 안에서 정신을 잃은 거야.”
“위험해?”
“음…… 죽을 정도로 위험한 독은 아니야. 다만 이 시간에 독기가 남아 있을 정도면, 반각만 꾸준히 맡아도 중독되었을 거야. 목숨과는 상관없지만 아마 반 시진 정도 깨어나지 못했을 거고.”
당무독은 두리번거리다가 주변에 날려가지 않고 바닥에 묻어 있는 가루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얇은 봉지에 가루를 담았다.
“내 생각에 미혼독 종류인 것 같은데.”
“이런 종류의 독을 사용하는 곳은 어디지?”
“이건 처음 보는 독이야. 좀 찾아봐야겠어.”
‘오호…… 저 아이들이 후개와 독광걸이군. 단번에 독의 종류와 중독의 원인을 파악하다니…….’
화산파에도 독을 처리하는 부서가 있었지만, 그들은 장서원주와 호위무사들이 중독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장문인 명진도인은 먼저 만통자를 반겼다.
“만통자 선배, 오셨소이까?”
“허어…… 큰일이 아닌가?”
“모두 목숨은 잃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명진도인은 짧게 인사를 끝낸 후 남하림을 보았다.
“후개, 어서 오시게. 명진이라 하네.”
“장문인을 뵙습니다. 남하림입니다. 여기는 제 형제로 독광걸이라 부릅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못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저희들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볼일을 마친 것 같네. 장서원주와 호위들이 어떻게 중독되었는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했지.”
“혹시 안에 들어가서 한 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는가?”
“범인을 찾아야 할 게 아닙니까?”
“……흐음.”
범인을 찾아야 했지만, 본래라면 외부인이 자하동에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음…….’
단번에 독을 찾아낸 그들에게 믿음이 갔다.
명진도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겠네. 본인과 함께 가세나.”
“고맙습니다.”
휙!
자하동에 들어선 남하림과 당무독을 보는 주위 시선이 따가웠다.
특히 명조도인은 당장에라도 막고 싶은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절대금지구역.
하나 장문인과 함께 들어섰기에, 그들을 노려볼 뿐 조용히 지켜보았다.
“구천신품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기…… 중앙에 놓여 있었소이다.”
명영도인이 대답했다.
남하림과 당무독은 구천신품이 놓여 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네모난 상자가 열려 있었다.
“구천신품이 상당히 작은 물건인가 보네요.”
“…….”
남하림은 구천신품을 담은 상자를 들어 살폈다.
‘이 냄새는…….’
자하동에 남아 있는 미약한 향.
“무독, 어때?”
“맞는 것 같다.”
남하림과 당무독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 알아낸 게 뭔가?”
“장문인, 범인은 사내가 아닌 여인인 듯합니다.”
“여인?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자하동으로 들어오면서 도인의 신발과 다른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도 그건 봤다네. 근데 발자국으로 여인인지 어떻게 알아냈는가?”
“여인의 신발은 사내의 달리 앞쪽 바닥이 닿는 부분에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앞쪽에?”
“물론 그것만으론 정확하지 않지만, 발자국의 앞부분이 많이 진한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거의 일자로 걸은 보폭을 봐서도 사내가 아니라 여인 쪽에 더 가능성이 있지요.”
‘그런 것까지…….’
“그리고 자하동에 미약하게 향이 남아 있었습니다.”
“향? 그 냄새를 맡았다는 것인가?”
“제가 향에 민감한 편이라서요. 성인의 여인은 향냥을 지니고 있지 않아도 그 향이 몸에 배어 있지요.”
“그것도 아는가?”
“뭐, 관심이 많다 보니…… 이제 대충 범인에 대해 알았으니 서둘러 잡으러 가죠.”
“후개, 범인을 알았다니? 방금 알아낸 것은 단지 여인인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거라도 범인을 잡기엔 충분합니다. 범인이 무작정 화산으로 올라오진 않았을 테니까요. 며칠 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 말은……!”
“화산과 가까운 마을을 뽑아 최근 며칠 동안 새로 나타난 여인을 찾는 겁니다. 복면을 쓰고 온 것을 보면 굳이 변장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일리가 있군. 바로 사람을 보내겠네.”
“아, 알고 계시겠지만 사람을 찾은 개방이 으뜸입니다.”
“아닐세, 이미 충분하이. 이 일은 본 파의 문제이니 개방에서는 나서지 않아도 되네.”
휙!
옆에서 듣고 있던 명조도인이 빠른 속도로 자하동을 나갔다.
“낙저랑, 지금 곧장 매화검대 삼군을 모아라. 그리고 나와 함께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간다.”
“알겠습니다.”
명조도인과 낙저랑이 장서원을 빠져나갔다.
‘이런, 큰일이군.’
만통자는 눈빛이 흔들렸다.
순조롭게 처리되었다고 믿었건만.
‘흠…….’
명영도인을 따라 자하동에서 나온 남하림은 만통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뭔가 있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만통자는 화산파에 가는 자신들을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둑과 한패라면 굳이 왜 기다렸을까? 어쨌든 연관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군.’
* * *
같은 시각. 신려세가.
괴동 장약금과 완비연이 명왕대전으로 들어섰다.
쿵! 쿵! 쿵!
육중한 몸매를 지닌 완비연은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소리가 울렸다.
‘일부러 더 크게 소리를 내는군.’
대하벽은 인상을 썼다.
“가주님, 사음문의 손님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했네. 물러서게.”
대하벽이 옆으로 물러났다.
장약금과 완비연은 고개를 빳빳한 든 채 살짝 끄덕했다.
“가주를 뵙소이다.”
“괴동, 무례하오!”
명왕대주 신왕주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오려 했다.
스윽.
신명항은 손을 들어 신왕주를 말렸다.
피식.
신명항의 얼굴에 살소(殺笑)가 피어올랐다.
“괴동, 죽고 싶은 모양이지?”
장약금은 몸이 흠칫거렸다.
전신을 누르는 압박.
순식간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슈우우욱-
장약금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신명항의 내력을 밀어냈다.
“신 가주. 지금 무슨 짓이오?”
“본인의 내기를 막아냈군. 제법이야.”
“예전의 내가 아니외다.”
괴동 장약금이 완비연과 함께 자신만만하게 온 이유.
“저 녀석을 데리고 무슨 일로 왔는가?”
“가주께선 본 문을 무시한 것을 잊으셨소? 그 이유에 대해서 묻고자 왔소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이유를 묻고자 온 것이 아니라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소. 신려세가는 분명 본 문의 둘째 공자와 혼례를 치르기로 한 약조를 어겼소. 그 사건으로 중원 무림인들이 본 문을 얼마나 우습게 알지 상상도 안 되는군. 본 문의 문주님께서는 약조를 깬 신려세가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길 바라시오.”
“훗,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문제를 우기는군.”
“당연히 파혼할 수는 있소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이유에 대해서 본 문에 밝혀야 했소. 근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파혼을 선언한 것은 분명 본 문을 무시한 태도인 것이외다.”
“그래서? 사음문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본 문의 문주께 직접 사과를 하시오.”
“크하하핫! 사음문이 단단히 미쳤구먼.”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크큭, 괴동이 요즘 잘나간다는 소문은 들었지. 어디 한번 볼까?”
파아앗-!
신명항은 손바닥에 힘을 주며 장약금을 향해 뻗었다.
거세게 쏟아지는 지옥명왕장!
‘우욱.’
장약금은 두 팔에 힘을 주며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퍼어엉-!
지옥명왕장을 받아낸 장약금은 십여 걸음을 뒤로 밀려났다.
“신 가주, 이게 무슨 짓이오?!”
“어린놈은 물러나라!”
무시당한 완비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이이익!”
신명항을 향해 달려드는 완비연.
“둘째 공자! 그만두시오!”
장약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완비연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먼저 출수한 것은 자신이다.
단번에 신명항의 목을 꺾을 수 있을 터!
“허허, 한동안 조용히 지냈더니 별 놈이 다 덤벼드는군.”
휘익.
그는 완비연의 장법을 가볍게 피했다.
파아앗!
신명항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헉……!”
“돼지 같은 녀석. 몸에 비해 빠르기는 했지만 자랑할 정도는 아니다.”
스윽-
신명항은 그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두두두두두두두-
완비연의 출렁거리는 두터운 몸을 향해 지옥명왕장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악마의 미소를 띤 명왕이 그를 덮쳤다.
‘아아악……!’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퍼퍼퍼퍼퍼퍼퍽-!
가슴과 배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육중한 등 뒤로 명왕장이 빠져나갔다.
“커어억!”
완비연은 단번에 선혈을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장약금이 완비연의 앞을 막아섰다.
“크흑, 신 가주! 사음문과 전쟁을 원하는 것이오?!”
“여전히 말이 짧군. 네놈이 언제부터 나에게 그리 말할 수 있었지? 기억력이 좋다면 잊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
지옥명왕 신명항.
구천마성을 무너뜨린 후 천사회를 세웠던 설백진의 돌격대장, 지옥명왕이 눈앞에 서 있었다.